꿈꾸는 노예
가끔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한다.
이게 차라리 게임 빙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
차라리 게임 빙의가 나았다.
내가 자주 하던 게임의 세계관이 썩 밝고 희망찬 세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이다.
그야, 맨몸으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판타지 세계에 내던져지는 것보단 뭐든지 나을 테니까.
자고 일어나니 어두운 판타지 세계에 던져진 내 기분을 너희가 알아?
아니, 완전한 맨몸은 아니긴 하다.
어째선지 30대를 향해 달려가던 내 몸이 이세계에 오고 나니 파릇파릇한 10대의 몸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이 망할 판타지 세계엔 신분제가 있으며, 기사가 있고, 마법과 몬스터가 존재한다.
몬스터가 있으니 던전도 있으며, 던전의 옆에는 몬스터들의 시체를 해체하는 푸줏간이 있다.
난 그러한 도살장에서 핏물과 오물을 뒤집어쓰고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몸으로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노예가 된 것만 해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야, 똑바로 일 안 해?”
“...죄송합니다.”
퍽.
오물을 치우는 손이 조금 느려진 걸 어떻게 알았는지 조장 개자식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일체의 애정이나 걱정 따윈 없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손찌검이다.
당장이라도 들이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책잡힐 것 없는 대답을 내놓았지만, 안타깝게도 조장은 오늘의 장난감을 나로 정한 모양이다.
“어쭈? 이것 봐라. 눈깔 뜬 거 보소. 이러다 치겠어?”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냐. 눈깔부터 돌아가 있는데. 내가 우습지? 요즘 오냐오냐했더니, 좀 살만한가 봐?”
“아닙니다.”
개자식.
속으로 그런 욕설이 튀어나오는 걸 꾹 억누르며, 나는 가만히 조장 놈이 지랄하는 걸 견딘다.
단순히 말로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손까지 날아드는 강도 높은 괴롭힘이지만, 여기서 내가 반항하면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이건, 내가 이 빌어먹을 푸줏간에 노예로 잡힌 첫날부터 이어진 일방적인 괴롭힘이었다.
이곳의 노예가 된 지도 벌써 몇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여전한 게, 참 부지런하다 싶다,
저 자식이 나를 왜 저렇게 싫어하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참아야 한다.
애초에 저 녀석이 노리는 건 나를 던전에 들어가는 기사들의 고기 방패로 던져줄 명분을 만드는 것이니까.
그냥 취업 준비하면서 게임이나 하던 현대인이 뭐 다른 저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덧 나를 괴롭히던 조장의 손길은 더욱 거칠어져 거의 구타 수준에 도달했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어떻게든 버틴다.
“......”
주르륵.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으면 구타를 견디지 못한 피부가 찢어져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였지만, 조장은 구타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 이것 봐라?”
오히려, 내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선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더 강하게 나를 때리려 한다.
이번 건 진짜 맞으면 위험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올 고통을 억누르려 하고 있으니.
“...저기.”
“윽. 뭐야?”
어디선가 굉장히 기괴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에 가래가 낀 수준을 넘어, 마치 칠판을 긁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목소리다.
그렇기에 나와 조장은 단번에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마녀, 무슨 일이야?”
“...그게.”
마녀.
그녀는 아주 조그마한 불씨를 만드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이 푸줏간에서 폐기물을 불태우는 일을 맡아 하는 노예였다.
당연하게도 진짜 이름은 마녀가 아닐 테지만, 단 하나의 특징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마녀라 부른다.
끔찍한 화상.
마녀의 얼굴은 완전히 녹아내려 제대로 된 형체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푸줏간의 모두가 꺼림칙해 하는 탓에 마녀는 마녀라 불린다.
조장 역시 혐오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마녀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감히 말을 걸어온 이유를 물었고, 마녀는 조심스럽게 고목처럼 앙상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일, 해야 하는데. 불쏘시개. 다 떨어져서.”
“쯧.”
모두가 마녀를 혐오한다는 건, 그 누구도 마녀와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마녀를 도와 몬스터들의 시체를 불태우는 일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기에, 조장은 혀를 차며 내 정강이를 툭 걷어차며 중얼거린다.
“그래. 가 봐라. 운 좋은 줄 알아라. 너. 다음에 또 농땡이 피웠다간 바로 던전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조장도 마녀와 엮이는 걸 꺼려서 굳이 마녀에게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하는 설명을 하기보단, 대충 나를 마녀에게 넘겨준다.
애초에 자기 스트레스를 풀려고 나를 괴롭힌 건데 굳이 스트레스 쌓일 일을 할 필요가 없겠지.
“가,자.”
나를 이끌고 마녀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 감도는, 그 누구도 잘 접근하지 않으려 하는 재투성이의 화장터로 향한다.
화장터에 도착한 난 곧장 익숙하게 불꽃을 살피지만, 마녀가 말한 것과는 달리 화장터의 불꽃은 조금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제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뭐야, 장작. 다 떨어졌다면서요?”
“...곧 떨어질 거야. 몸은. 괜찮아?”
“뭐, 늘 있는 일이니까요. 적당히 자고 일어나면 나아요.”
“그럼. 다행이네.”
“저야말로 고맙죠.”
아무래도, 이건 마녀의 배려였던 듯하다.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준 데에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이자, 마녀의 입에서 칠판을 긁는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멋모르는 사람이면 마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꽤 오랜 시간을 마녀와 함께 보내온 나는 알 수 있다.
이건 마녀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부 마녀를 무서워하지만, 내게 마녀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내겐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언젠가 마녀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에겐 여동생이 있던 것 같다.
그 여동생의 나이와 비슷한 외모로 보이는 나에게 여동생을 겹쳐 보는 탓에 내게 잘해주는 걸까?
마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에서의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쓰러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솔직히 내게도 마녀의 외모나 목소리가 썩 좋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은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잖아?
마녀를 위해 화장터 한쪽에 가득 쌓여있는 기름 개구리의 기름 주머니를 가져와 불 속에 집어넣으니, 몸에 좋지 않아 보이는 매캐한 냄새가 확 하고 풍겨온다.
평소보다도 더 강렬한 냄새에 목이 시큰거리는 걸 느낀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마녀가 내게 조언을 건네온다.
“...조심해. 오늘은 슬라임이 섞여 있어서. 코를 막는 게 좋아.”
“슬라임이요? 이 근방에선 안 나온다면서요?”
“...슬슬 안개가 몰려올 시기니까.”
어쩐지 평소 시체를 태우는 것보다 악취가 더 독하다 했더니, 슬라임이 시체 사이에 섞여 있던 모양이다.
마녀의 말에 코를 막은 채로 슬쩍 고개를 들고 시체 더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에 모든 빛을 빨아들이듯 일렁이는 어두운 숲.
원래는 저 숲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하겠지만, 마녀의 말대로 안개처럼 보이는 것들이 일렁이며 숲에서 손길을 뻗어오고 있다.
안개.
이곳이 밝고 화목한 판타지 세상이 아닌, 어둡고 우울한 판타지 세계인 이유다.
저 안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주제에 마치 파도처럼 주기적으로 밀려오며 괴물들을 함께 데려온다.
안개는 괴물들의 영역이기에, 인간들은 안개를 피해 달아나지만, 안개가 삼키는 땅은 달이 지날 때마다 더욱 늘어난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인간들이 살아갈 땅이 전부 안개에 먹히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이미 태양도 밤에 집어삼켜진 지 오래니 말이다.
“에휴, 어쩐지. 갑자기 지랄하더니 벌써 안개가 올 시기네요? 근데, 평소보다 좀 더 빠른 거 아니에요?”
“...그렇지. 점점 빨라지고 있어.”
내가 안개가 밀려오는 주기에 신경을 쓰는 건, 왜인지 저 안개가 밀려올 때마다 조장 녀석이 내게 지랄을 떨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지랄하더니, 다 저거 때문이었어.
“확, 그냥 탈주해 버릴까? 내가 튀면 자기도 좆되면서 지랄이야.”
“...요한.”
“농담이에요, 농담. 아무 준비 없이 탈주하면 개죽음인거, 저도 잘 알아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혹사당한 몸으로는 이 푸줏간을 탈출하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겠지.
만약 푸줏간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해서 추적대에 잡히든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하든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제대로 노예를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조장 정도는 길동무로 데려갈 수도 있겠지만, 고작 조장 하나와 교환하기엔 난 너무 아까운 목숨이다.
“...그래도. 계속 이런 곳에 있고 싶진 않네요.”
그렇지만 이런 곳에 계속 틀어박혀 있기도 아까운 목숨이지.
기왕 이세계에 왔는데도 여행도 다니지 못하는 건 너무 아쉽잖아?
마녀는 내가 계속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불편한지, 서둘러 내게 평소처럼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이야기 말고. 평소에 해주던 이야기나 해줘.”
“아. 그럴까요? 지난번에는 어디서 끝났죠?”
“...음. 주인공이 거대한 화로를 지키는 문지기를 쓰러트리는 부분.”
“아. 거기. 문지기를 쓰러트린 뒤에 기사는...”
언젠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을 피우는 데에 질린 내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작했던 이야기를 마녀가 마음에 들어 해서 그때부터 계속된 이야기다.
해가 사라진 세상에 다시 해를 되찾기 위한 기사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들었던 걸까?
먼저 내게 뭐라 부탁을 잘 하지 않는 마녀가 유일하게 먼저 내게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세상도 해가 뜨지 않는 세상이니 이야기에 몰입하기 쉬운 걸까?
“그렇게 해서, 기사는 세상을 태우려던 성녀를 막아냈습니다. 미쳐버린 성녀였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정신을 되찾은 걸까요? 성녀는 기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무슨 말인데?”
“환한 태양이, 다시 보고 싶다는 중얼거림을요. 성녀의 유언을 가슴에 새긴 기사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불이 꺼진 태양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후의 이야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요.”
“...아쉽네. 언제나 느끼지만, 넌 여길 나가더라도 이야기 하나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거야.”
거의 다 끝나가는 기사의 영웅담을 중간에 끊자, 마녀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마녀에게 변명하듯 진실을 입에 담는다.
“이건 제가 지어내는 게 아니어서요. 이후 이야기를 알려면 저도 좀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그렇겠지. 이건 네 꿈의 이야기였지?”
이번에도 마녀는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이 이야기를 전부 지어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긴 하지.
도살장의 노예가 무슨 일을 겪었다고 이런 모험담을 이야기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정말 진실만을 말했는걸.
왜냐면, 이 이야기는 전부 내가 지구에서 보고 경험한 이야기들이니까.
지금은 단지 꿈으로밖에 다시 경험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체를 불태우고 있으니, 하늘에 떠오른 달이 서서히 땅속으로 모습을 숨긴다.
“다들 작업 중지! 작업 중지! 밤이 되었다!”
“드디어...!”
밤이 되며 더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녀와 헤어져 어디 헛간 같은 좁아터진 방에 몸을 집어넣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이 그리 즐겁지 못해 보인다.
“제발, 오늘 밤도 무사하길...”
“흡몽약은 언제쯤 오는 거야?”
그러한 다른 노예들의 대화를 무시하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든다.
“......”
아, 진짜 좆같다.
진짜, 죽고 싶다.
앞으로 이 생활이 언제쯤 끝날지 모르겠다는 점이, 진짜 끔찍하다.
마녀가 없었다면, 아니 있는 지금도 그냥 자고 일어나서 상쾌하게 자살해서 이 지옥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이세계로 넘어오며 얻게 된 능력 덕분이다.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최고의 능력이다.
“...됐다.”
잠에 빠져들었던 내 눈이 조금씩 열리고, 나는 낯익은 주위의 풍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제는 타락한 성녀를 간신히 처치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불 꺼진 태양으로 나아가 태양에 불을 붙여 이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것뿐이다.
“좋아. 그럼, 끝판왕이나 잡으러 가볼까?”
꿈속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내가 이세계로 넘어오며 손에 넣은 단 하나의 능력이다.
- 작가의말
신작으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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