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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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나의 심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전부라 생각했던 건, 정말 작은 일부였을 뿐.
나의 심상은 요한,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풍경이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결단코 알지 못했을 세상.
고고하게 떠오른 태양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빛날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윽...!”
태양의 열기에 강철이 녹아내린다.
물론, 강철을 녹이는 열기가 나만을 피해 간 건 아니었다.
옷이 불타고, 피부가 녹아내리고, 몸 안에서 치솟는 열기가 내 몸을 불태운다.
손 위에서 빛나는 태양은 말 그대로 내 몸을 부수고 있었다.
“......”
그래도 난 쓰러지질 수 없다.
요한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아직 쓰러질 순 없다며, 굳건히 버티고 선 나 자신을 상상한다.
그러자.
잿더미가 되어버린 옷이, 내가 기억하는 봉화꾼의 복장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불타버린 육체가 불꽃 속에서 원래의 형체를 되찾으며 다시 태어난다.
강렬한 태양의 열기는 다시 태어난 내 얼굴의 반쪽을 다시금 불태우지만, 그것 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도 조금은 당황하며 내 상태를 관조한다.
잠시 눈을 감고 내 몸속에서 타오르는 태양을 살피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내 안에서 불타오르던 다섯 개의 원은 하나로 뭉쳐져 거대한 태양이 되고, 그 태양의 주위에 새로운 원이 생겨난 것이다.
이건, 내가 경지를 넘어섰다는 명확한 증거.
자신의 심상을 생각만으로 지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요한의 꿈 속에서 했던 그 레벨업이라는 것이 도움이 된 걸까?
아니면 내가 태양의 심상을 깨우치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걸까?
뭐, 어째서냐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낼 수 있는 ‘전력’이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승급한 건가...!”
당연히 레온 또한 내 변화를 눈치채곤 앞으로의 전투가 지금까지와 다를 거라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심상을 더욱 응축한다.
녹아내린 철이 레온의 의지에 따라 모여들며 다시금 검의 형상을 이루어 레온의 손에 들리고, 태양에서 내리쬐는 빛을 막으려는 듯 더욱 두텁게 몸을 감싼다.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던, 스틸하트의 전투 태세다.
과거엔 저렇게까지 진심을 낸 레온의 방어를 한 번도 돌파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손을 뻗어 손안의 태양의 불꽃을 뽑아낸다.
홍염도 청염도 아닌, 백염에 도달한 불꽃이 내 손 위에서 불타오른다.
그 무엇보다 익숙할 불꽃을 다루는 것인데도 엄청난 격통이 느껴진다.
당장 백염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지만, 어떻게든 백염을 제어하여 나와의 거리를 좁히는 레온을 향해 백염을 집어던진다.
원래라면 불꽃 따위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스틸하트의 스타일이지만, 백염이 발산하는 열기만으로도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레온은 강철로 된 방패를 만들어내 불꽃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백염은 너무나 쉽게 강철의 방어를 분쇄하며 모든 걸 집어삼키려 한다.
그래도 레온은 끈질기게 내 몸이 더 버티지 못할 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윽?!”
레온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대한 백염이 날아들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양에서 백염이 쏘아진 것이다.
마치 내 손안의 태양이 그러하듯 말이다.
백염에 집어 삼켜져 산 채로 녹아내리는 레온이 택한 것은, 결국 강철의 심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큭...!”
일순간 레온의 몸이 안개로 흩어져 사라지고, 백염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위치에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평범한 불꽃일 때에도 불꽃에 흩어지던 안개가 태양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심상이 사라진 레온의 갑주 이곳저곳엔 구멍이 뻥 뚫렸고, 온몸에서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우리는 강철. 불꽃 속에서 새롭게 벼려지고 태어난다.”
레온은 다시금 심상을 불러내어 피해를 복구하지만, 연달아 심상을 불러낸 탓에 무리가 온 걸까?
레온이 불러낸 갑주는 맨 처음 보았던 멋들어진 형상이 아니라, 이곳저곳 찌그러지고 무언가 회색빛의 점액질이 달라붙어 고장 난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지만 갑옷을 망가트린 회색 물질이 갑옷을 지지하는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검...!”
그럼에도 어떻게든 심상을 끌어내는 레온의 손에 잔뜩 일그러진 검이 나타난다.
이리저리 뒤틀리고, 부숴지고, 망가졌지만.
그래도 검이라 불리는 무언가.
아니, 검이란 단어 말고는 저것을 설명할 단어가 없기 때문이리라.
기사의 손에 쥐어진 것이 검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평범하게 생각해선 저런 검은 당장 던져버려야 하겠지만, 레온은 그 뒤틀린 검을 소중하다는 듯 꽉 붙잡고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철의 심장을 지닌 거인, 그것이... 우리일지니...”
마지막 구절을 레온이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주위의 녹아내린 철들이 다시 레온에게 모여들어 거대한 거인의 모습을 이룬다.
내가 기억하던 스틸하트의 거인은 거대한 기사였지만, 더 이상 내 기억속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건, 기사라기보단 쇳물로 이루어진 골렘 같은 모습이다.
쇳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의 가슴에 레온은 마치 동력원처럼 박혀 있었다.
자신이 심상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심상에 잡아먹힌 듯한 모습.
갑옷 이곳저곳에 뚫린 구멍을 통해 레온의 맨몸에 쇳물이 달라붙은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더 이상 두 눈으로 보고 있기 힘들어, 이젠 애처롭게까지 느껴진다.
모든 걸 끝내기 위해 심상을 조종한다.
“...일몰.”
태양이 저문다.
다만, 지평선 아래로 저무는 것이 아니다.
거인의 머리 위로 태양이 추락한다.
높이 떠 있던 태양이 점차 가까워지며,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하...”
신기하다.
분명히 나의 심상의 일부인데, 나의 심상 영역보다도 더 거대해 보인다.
요한, 네가 나에게 건네준 심상이어서 그런 걸까?
그리고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는지, 점차 추락하는 태양은 영역 안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을 넘어 영역 밖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그 와중, 쇠의 거인은 추락하는 태양을 막아보고자 검을 하늘에 겨눈다.
하지만 태양을 검 한 자루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대로 태양은 저물고.
새하얀 폭발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내가 현재 낼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전력이 레온을 향해 쏟아진다.
세계 전체를 통째로 사용한 일격이 끝나고, 더 이상 심상 영역을 구현할 힘도 이유도 없어졌기에 심상 영역이 자연스럽게 해제된다.
“으윽...”
영역이 해제되자마자, 태양의 힘을 다룬 반동이 곧바로 찾아온다.
몸 안이 불타며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간신히 화염을 몸 안으로 거두지만, 잉걸불처럼 끊임없이 타오르며 내게 고통을 가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아직은 안 된다.
마지막 예우를 지키기 위하여.
“...레온.”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바닥에서 죽어가고 있는 레온 앞에 선다.
팔다리가 완전히 탄화되어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부분조차 끔찍하게 뒤틀린 송장같은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오랜 소꿉친구의 이름을 부르니, 레온은 내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린다.
“...어둡군.”
“밤이니까. 응.”
“밤이 어둡다는 걸, 오랜만에 깨닫는 거 같아. 그렇게 밝은 걸 보고 나니 너무 어둡게 느껴져...”
내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죽어가고 있는 레온은 심상까지 써가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두워. 너무 어둡네.”
“어쩔 수 없잖아. 그런 때니까.”
“그래. 그런 때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네...”
그렇게 하얗게 멀어버린 눈으로 태양의 힘으로 안개가 잠시나마 걷힌 밤하늘을 바라보며, 레온은 내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그런 때인데도, 다시 그렇게 환하게 빛나줘서.”
“난 스스로 빛난 게 아니야. 난...”
“너를 다시 불태운 녀석도 고맙지만. 다시 빛날 마음을 먹은 네가, 나에겐 제일 고마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데도 다시 선택한 거니까...”
“난...”
아니야.
난, 다시 불타오르지 않았어.
요한, 그 아이를 위해 마지막 목숨을 불사른 거일 뿐이야.
그렇게 진실을 이야기하기엔, 죽어가는 레온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너무 어두워. 그래도. 음. 오랜만에, 푹 잘 수 있겠어.”
“...좋은, 꿈꿔.”
“그래. 이젠, 좋은 꿈을. 꿀 수 있겠네...”
“......”
이윽고 레온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레온의 몸은 먼지가 되어 주위의 안개 속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몽마들의 힘을 쓰더니, 마치 몽마들이 죽는 것처럼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소꿉친구의 영락한 모습에 슬픔이 밀려오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억지로 외면하던 고통에 몸을 맡기고, 털썩 바닥에 쓰러진다.
“하하, 다... 끝났네.”
이걸로 내 역할은 끝이다.
그 아이, 요한을 도망칠 수 있게 했다.
그거면 된 거다.
“......”
정말, 이걸로 된 걸까?
기껏 다시 불타올랐으면서, 다시 불꽃이 꺼질 때까지 땅바닥에서 식어가는 게?
이 불꽃을, 태양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
사실은 여기서 끝나고 싶지 않았다.
요한,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네가 보여주는 꿈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보고 싶었어.
너와 함께 마리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리고 어쩌면.
너와 마리와 함께 평온한 삶을 누리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내 선택에 남은 후회를 자각하지만, 이젠 정말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잔불은 잔불답게 얌전히 잿더미로 화해 사라질 미래를 기다릴 뿐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남겨두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찾았다. 헉, 허억. 괜찮아요?”
“...요한? 네가 왜 여기에.”
“마녀씨를 두고 그냥 갈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그냥 버리고 가라고요?”
언제나 넌 내 꿈을 이뤄주는구나,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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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오던 기사는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잘 해결됐어. 더는 우릴 쫓지 못할 거야. 그보다 요한. 이 숲 속에서 어떻게 날 다시 찾아온 거니?”
“낙인 덕분에 대충 위치는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화려하게 날뛰셨는데. 어떻게 몰라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숲의 일부가 불타며 안개가 걷힐 정도였으니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리 있나.
아까의 그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한 걸까?
도대체 무슨 기술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다.
바닥에 쓰러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녀를 서둘러 업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달리기 시작한다.
마녀와 함께 안개가 걷힌 길을 따라 달리며, 나는 마녀의 행동을 타박했다.
“아까 여동생 이야기했던 거, 벌써 까먹은 거예요? 전 마녀씨가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니까요? 마녀씨가 직접 여동생한테 태양을 보여달라고, 말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내가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야.”
평범하게 생각해선 마녀의 말대로 마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맞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도와주던 NPC를 1막이 시작하며 죽이는 암울한 전개의 게임들, 정말 많이 봤다.
난 게임 속 주인공처럼 되길 원하지만 내 인생은 게임처럼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난 해피 엔딩이 좋다.
억지스럽다고 해도, 그 누구도 내 눈앞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다.
게임의 주인공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선택지를 잘 골라서 불살 루트, 1회차부터 노려보자고.
고인물답게.
그러니 일단, 지금은 죽도록 달려야겠지.
이 통로가 닫힐 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니 말이야.
등에 느껴지는 묵직한 마녀의 체중을 느끼며 안개 낀 숲속을 달려 나간다.
그렇게 숲속을 달리고 있으니,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자꾸만 느껴진다.
“...뭔가 시선들이 느껴지는데요. 추격자는 없는 거 맞아요?”
“몽마들이야. 네 말대로 화려하게 날뛰었으니, 우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겠지.”
“괜찮은 거 맞아요?”
“몽마들은 안개 밖으로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으니 괜찮아. 몽마 근처엔 몬스터들이 겁먹고 쉽게 접근하지 않으니,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오히려 좋다니...”
마녀는 이 상황이 오히려 좋다고 하지만, 내 입장에선 굶주린 맹수가 가득 찬 우리에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들어 오싹할 뿐이다.
최대한 빠르게 숲을 벗어나고자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남은 여유 스탯을 사용하면서까지 회복하며 달려보지만, 그래도 난 숲을 벗어날 수 없었고.
“...안개가.”
서서히 안개가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통로가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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