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얼 위 고

“이건...?”
꿈에 빠져든 나를 반긴 건, 익숙한 폐허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익숙한 내 방의 모습이었다.
사방에 가득 콘솔 게임 패키지가 쌓인, 컴퓨터와 모니터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방.
평소엔 게임들을 제대로 서랍장 안에 잘 보관해 두는데 전부 밖에 나와 있는 걸 빼면,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다.
다시 다키스트 썬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닌 건가?
이렇게 게임 밖으로 나올 줄은 예상 못했는데.
아니, 잘 생각해보면 게임을 하나 끝냈으면 밖으로 나가는 게 맞지.
이 방에서 다키스트 썬을 찾는다면 다시 2회차를 즐길 수 있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솔직히 좀 힘들었지?”
액션 게임을 싫어하진 않지만, 계속해서 즐기기엔 좀 피곤하단 말이지.
감각이 10% 정도만 느껴지는 게임도 6시간 이상은 연속해서 플레이하기 힘든데, 특히나 모든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더욱 말이다.
그래, 이번에는 좀 편안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고르자.
그러면서도 빠르게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으로.
“뭐를 고를까~ 뭐가 좋으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산더미처럼 쌓인 게임의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음에 플레이할 게임을 찾는다.
좀 살벌하게 싸우는 액션 쪽은 잠시 거르고, 좀 평화로운 게임이 좋겠는데.
그렇다고 힐링 쪽 게임을 하려니 그쪽은 플레이타임이 워낙 긴 게임이 많으니까, 그쪽도 패스.
그럼, 이럴 땐 역시...
“플랫포머가 좋겠네.”
플랫포머.
말 그대로 플렛폼, 발판 위를 뛰어다니는 형태의 게임.
이것도 일종의 액션 게임이긴 하지만, 소울류 게임보단 훨씬 평화롭지.
이건 뭐, 죽어도 추락사밖에 더 경험할 게 없잖아?
플랫포머를 즐기자,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내 행동은 재빨랐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
내가 곧장 선택한 게임의 이름은 바로, ‘히얼 위 고’.
플랫포머 게임을 넘어 전 게임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그 배관공 형제가 주인공인 게임이다.
플랫포머 게임을 하고 싶다면 역시 이게 최고지.
한 가지 고민되는 건 시리즈 몇 편을 할 거냐인데, 최신 버전도 충분히 재밌긴 하지만 너무 볼륨이 크니 이번엔 구작에서 하나 고르고 싶은데.
모든 시리즈가 다 재밌지만, 역시 5편을 빼놓을 순 없다.
아니, 그래도 7편도 빼놓을 순 없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난, 결국 두 눈을 감고 둘 중 먼저 손에 잡히는 쪽을 게임기에 집어넣었다.
경쾌한 시리즈 특유의 배경음이 흘러나오고,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내가 고른 게 어떤 게임인지 알 수 있었다.
“7편?”
7편이라, 시스템적 완성도는 5편에서 완성되어서 더 발전할 게 없단 평가를 받았지만 7편에서 또 한 번 발전했단 평가를 받은 또 하나의 명작이다.
주된 발전이라면 그전까진 불가능했던 협동 플레이가 가능해진 게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
“좋아. 그럼 시작...”
더 간볼 것도 없겠다, 나는 곧장 게임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응?”
어째선지 게임이 제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1인용 플레이가 불가능하고 협동 플레이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뭐야, 꿈속이어서 이런 제한이 생긴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이상한데?
“버그난 건가? 아니, 꿈속인데 버그가 나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참 동안 게임 패드를 붙잡고 이리저리 메인 화면을 조작해도 화면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으음, 다른 게임을 해야 하나?”
7편이 안 되면, 5편을 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CD를 꺼내려던 순간.
“...?”
등 뒤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척이 느껴진다.
마녀가 내게 알려주었던, 안개의 냄새.
서둘러 등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있던 건.
“무슨...!”
정체불명의 몽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분홍색 하늘, 걸어 다니는 버섯, 의미 없이 허공을 떠다니는 벽돌과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청록빛 잔디, 정체 모를 금속으로 이루어진 드워프들의 기계와 비슷한 무언가.
심지어는 바람이 흐르는 방식까지.
모든 것들이 단 한 번도 보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나마 내가 아는 풍경과 비슷한 것이라면, 하늘을 떠다니는 살아있는 구름 정도뿐이다.
“이게, 이게 뭐야...?”
꿈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것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일 뿐이지, 아예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이 이렇게 튀어나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꿈의 주인은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한 거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닮지 않은 꿈이라니.
미치광이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하고 세세하다.
하지만, 평범한 이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꿈에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의욕을 불태웠다.
“오히려 잘 됐어. 흐흐흐.”
아무도 보지 못한 꿈이라니.
도대체 어떤 맛이 날지, 너무나 기대된다.
이런 걸 보면 괜히 몽마를 죽인 인간이 아니란 게 느껴진다.
흔히 말하는 영웅이라는 부류의 인간들은 다 이런 꿈을 꿀까?
영웅들이 이런 꿈을 꾼다면, 어머니가 왜 그렇게 영웅들에 집착하는지 알 것도 같다.
난 조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어떤 맛이 날지 잔뜩 기대한 채로 꿈을 한입 베어 물었다.
“으응?”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힘을 꽉 주어도 도저히 꿈이 조각나지 않는다.
마치, 이 상태로 박제된 것처럼 말이다.
“뭐야, 이게...?”
이상해.
아무리 멋지고 엄청난 꿈이라고 해도 내가 이빨조차 박을 수 없단 건 이상하다.
내가 하급 몽마여서 그런 거라고 쳐도 살짝 맛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마치 이 꿈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듯, 너무 명확하게 고정되어 있다.
도대체 이 풍경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러는 거지?
“이것도... 안 되네. 뭐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버섯, 계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지나치게 밝은 세상.
그래,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하다못해 조금 색다른 풀밭 정도는 조금 정도 바뀔 수 있잖아?
그런데 풀밭의 일부, 심지어 흙 알갱이마저 바뀌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못 먹겠다. 이건.”
한참을 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러한 부분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냥 포기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거 오기가 생긴다.
이대로 이 만찬을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랬다간 몽마의 수치지.
이 꿈,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먹어 치워주마.
그냥 정면에서 꿈을 먹어 치울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조금 우회해야겠다.
꿈 자체는 단단할지 몰라도, 그 주인을 공략한다면 충분히 꿈이 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주인을 공략할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지만 꿈 이곳저곳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꿈의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여나 뭔가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꿈을 즐기고 있나 싶었지만,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으음. 분명히 있을 텐데...?”
꿈을 꾸는 주인이 꿈에 나오지 않는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자신이 등장인물로 나오진 않더라도 꿈을 어떤 식으로든 관찰하고 있을 텐데, 왜 보이지 않는 거지?
“...관찰?”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관찰, 관찰?
그래.
시점이다.
꿈을 꼭 꿈 안에서만 관찰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 난 곧장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고, 이내 하늘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아주 희미하게, 물질은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작은 통로가 하늘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몽마인 나조차도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고 갈 정도의 작은 통로.
만약 이걸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진짜, 웬만한 몽마보다도 이 사람이 더 꿈을 잘 다루는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지나 꿈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곳까지 상승하니.
“뭐야, 여긴...?”
다시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는 모든 것이 엉망인 이상한 세상이었다면,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천이나 종이와는 다른, 처음 보는 재료로 만들어진 책 같은 것들이 가득 쌓인 어두컴컴한 방 안.
그러한 방의 중심엔, 조금 두꺼운 거울 비슷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
꿈속에 진입하기 전 보았던 얼굴과 완전히 동일하다.
즉, 저 남자가 이 꿈의 주인이다.
저 아래의 꿈을 비추는 거울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아직 나를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으음, 다른 게임을 해야 하나?”
좋아, 잘 됐다.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틈에 저 남자의 기억을 읽어서 빈틈을 만들어내자.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직접 기억을 읽어보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의 기억을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음...!”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간신히 최근 기억의 파편만을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에잇, 숲에 들어오고 나서 있었던 일은 나도 알고 있다고.
그것보다 훨씬 전, 이 남자의 약점이 필요해.
내 생각보다도 기억을 읽어내는 게 어려웠던 탓일까?
남자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며 나를 발견했다.
“무슨...”
“윽...!”
이대로라면 이게 꿈이라는 걸 들킬 수도 있다.
그랬다간 꿈에서 쫓겨나거나, 최악의 경우 그 몽마처럼 죽을 수도 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이 만찬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건 싫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머리에 퍼뜩 생각나는 선택을 해본다.
“아, 안녕? 오랜만이네?”
“...마녀씨?”
“아. 응. 마녀. 그래, 마녀야. 안녕~?”
아주 조금 읽어낸 기억, 거기에서 이 소년과 꽤 친해 보이던 인물의 외형을 가져와 변장한다.
솔직히 이것도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할 순 없지만, 몽마의 모습 그대로 마주하는 것보단 속여넘길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완전히 머리가 새하얘진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적당히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소년에게 무해함을 어필한다.
“...먼저 라트가로 간 거 아니었어요?”
“그게. 그게 말이지. 그래, 도와주려고. 널 도와주려고 왔어!”
“흐음?”
“으음...!”
어, 이게 아닌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나?
누가 봐도 자신을 의심하는 소년의 반응에 포커페이스를 지으며 소년의 의심을 가라앉히려 시도한다.
“날 도우러 온 거라고 했지?”
“그, 그치? 아무래도 너 혼자서 숲을 빠져나가는 건 힘들어 보여서...”
“그래? 잘됐네. 이리 와서 앉아봐. 이건 혼자서 하기엔 좀 힘들어서.”
“으, 응?”
뭐야?
속은 건가?
흐흐흐, 이렇게 간단하게 속이다니. 나, 어쩌면 임기응변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흐흥, 좋아. 뭘 도와주면 되는데?”
“같이 게임이나 하자. 나 혼자서 하기엔 좀 심심해서.”
“게임? 뭐, 얼마든지 도와줄게!”
게임?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잘 됐다.
이대로 기회를 엿보다가 약점을 파악하면, 거길 찔러서 바로 먹어치워야지.
후후, 오늘은 정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남자의 지시에 따라 이상한 거울 앞에 앉았다.
“자, 이거 받아. 일단 튜토리얼부터 알려줄게. 이 스틱을 움직여서 캐릭터를 조작하고...”
“응. 그리고?”
그나저나 도대체 게임이란 게 뭐지?
뭔진 모르겠지만, 적당히 즐기는 척하면 방심을 이끌기 쉽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남자와 함께 게임이란 것을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으윽! 아니! 분명히 눌렀잖아! 이게 왜 안 되는데!”
“누른 게 아니라 안 누른 거겠지.”
“아니! 진짜 눌렀는데...!”
난 이 게임이란 것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뭐야, 이거?
엄청 재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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