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S#143. 요하강 (당군 철군) / 645년
요동의 겨울은 처절하리만큼 가혹했다. 뼈가 시리고, 상처가 벌어지고, 발은 얼어 감각이 없었다. 군량은 떨어진 지 오래되어 군마까지 먹는 지경에 이른 당나라군은 눈을 맞으며 철군하고 있었다. 요하강 앞에 선 이세민은 쓸쓸히 하늘을 본다.
“친히 요하강에 다리를 놓고 고구려 정벌을 완성하기 전까지 떠나지 않겠다. 맹세하였는데. 어제 부셔버린 다리마저 아쉬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세민이 흐느끼자, 장수들과 장병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삼족오다! 고구려 군입니다!”
놀란 이세민은 지체 없이 요하로 뛰어 들어 강을 건넜다. 양만춘과 추정국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이 퇴각하는 당군을 거세게 추격해 오고 있었다.
“활을 쏴라! 놈들을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죽여라!”
안시성에서 고립되어 처절한 전투를 한 양만춘은 당군에 대한 증오의 깊이가 그 누구보다 강렬했다. 추정국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세민이 급하긴 했나 보군요. 이 화려한 황금갑옷까지 벗어던져 놓았네요.”
“씹어 죽일 놈. 이대로 보낼 순 없죠. 반드시 놈의 목을 치겠습니다.”
요하강을 뛰어들며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져 살기 위해 버둥대던 이세민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다. 찢어 죽여야 했다. 양만춘은 개마무사를 이끌고 요하강을 도하하는 당군을 향해 돌진했다.
“네 이놈! 감히 어딜 가느냐!”
어느새 나타난 설인귀의 현란한 창술이 양만춘을 막아섰다. 고당전쟁 개전 이후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난 그의 무용은 당군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양만춘과 설인귀는 치열한 일기토를 벌였다. 고구려 최고 무장 까마귀조차 설인귀를 잡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과연 귀신같은 솜씨로구나. 허나 오늘이 네 놈 제삿날이다. 내 친히 목을 삼족오에 꽂아 주마. 오너라!”
양만춘은 저도 모르게 무인의 피가 끓어올랐다. 순수한 힘의 갈구, 강한 자에 대한 열망에 환두대도를 높이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설인귀는 이세민이 요하를 무사히 건너 한참을 퇴각한 것을 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양만춘, 까마귀. 고구려에 쟁쟁한 무사들이 많구나. 오늘은 이 몸이 바빠 다음을 기약하마. 꼭 다시 보자꾸나. 하하하.”
“네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목을 내어 놓아라!”
달아나는 설인귀를 쫓는 양만춘을 추정국이 막아섰다.
“양만춘 장군님. 깊숙이 추적하지 마시죠. 뒤에 쳐진 놈들부터 처리하시지요. 이제 시작 아닙니까. 급할 것 없습니다.”
양만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인귀는 말머리를 돌리며 양만춘에게 도전의 미소를 보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양만춘. 하지만 기억해라.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너의 목을 노릴 것이다.”
양만춘은 이를 갈며 설인귀가 사라지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다음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 설인귀, 널 반드시 꺾고 이세민의 목을 칠 것이다.”
설인귀의 무용은 다시 한번 당군을 구해냈고, 이세민은 가까스로 요하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그의 현란한 창술과 냉철한 판단력은 당나라군에게 유일한 희망의 빛이었다.
S#144. 당 하북성 공략 / 645년
고구려의 까마귀는 당 하북성을 공격하기 전, 연수영의 소식을 알지 못해 답답하고 불안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비사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전사들과 부하 장수들을 두고 어딜 갈 수 있겠는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다가왔다.
걸걸중상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형님, 연수영 대인 생각하십니까. 까마귀 장군, 연수영 대인의 소식을 듣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실 줄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이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대인도 형님이 고구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길 기도하고 계실겁니다.”
까마귀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중상. 하지만 연수영 대인의 안부를 알 수 없으니 마음이 너무 무겁다. 그녀가 무사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 미안하구나. 못난 형이다.”
걸사비우도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형님, 연수영 대인은 강한 분입니다. 분명히 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이 전쟁을 승리해야 연수영 대인도 안전해지지 않겠습니까. 힘내십시오.”
까마귀는 눈물을 닦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맞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연수영 대인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 생각해야한다. 부끄럽구나.”
흉폭한 전장의 악귀 까마귀는 연수영과 전사들 앞에서는 한없이 상냥한 강아지 같았다.
걸걸중상이 힘차게 말했다.
“형님, 저는 믿습니다. 형님만 곁에 있다면 길을 여시고, 없던 길도 만드실 겁니다!”
걸사비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형님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형님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까마귀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너희의 말이 큰 힘이 되는구나.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사들을 위해,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싸움을 끝까지 해내겠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까마귀의 결의를 느끼며 함께 외쳤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고구려 만세! 삼족오 만세!”
까마귀는 전사들의 결의와 함께 당 하북성 전투를 향해 나아갔다. 연수영을 위한, 고구려를 위한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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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까마귀군은 연개소문의 명령에 따라 당나라의 하북성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풍요롭고 비옥한 이 땅은 고구려 병사들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잡병들과 식량들이 넘쳐나는 상황에 까마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으하하하. 이건 뭐 잡병들에 식량들은 넘쳐납니다!”
걸사비우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싸울 수 있는 남자는 모두 고구려 원정에 동원했으니 무주공산이구나. 마음껏 즐겨라, 하하하.”
걸걸중상도 신이 나서 화답했다.
고구려의 까마귀는 그들 눈앞에 펼쳐진 풍요로운 옥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는 당나라가 왜 척박한 고구려를 침공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문했다.
“어째서 이렇게 비옥한 땅을 가진 당이 우리 고구려를 침공한단 말인가?”
걸걸중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막리지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산서성을 공략하고 있다. 우리가 하북성을 점령하면 대막리지와 함께 이세민의 아들놈이 지키는 유주를 공격하러 간다.”
까마귀가 답했다.
이제 고당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손쉽게 하북성을 점령한 까마귀군은 그 풍요로움에 내심 놀랐다.
“이세민이 왜 요동을 침략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까마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S#145. 영주성 (당군 진영)
힘겹게 퇴각길에 오른 당군은 마침내 영주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폐허와 불타버린 도시였다. 군사들은 절망감에 빠졌고, 도시의 흔적을 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장손무기는 탄식하며 말했다.
“폐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개소문이 남하한 게 사실인 듯합니다.”
이세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신성, 비사성, 요동, 건안, 안시성을 공격하는 동안 개소문이는 후방을 노리고 들어왔구나. 무서운 놈이야. 요동 방어선이 뚫리지 않으리란 확신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우리 군량은 얼마나 남았는가?”
장손무기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60만 대군이 10만도 남지 않았습니다. 먹을 군량조차 없으니···”
이세민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위징, 위징이 있었더라면 내 이런 치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장손무기는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고단하셔도 어서 유주로 가셔야 합니다. 개소문이 유주마저 점령한다면 국운이 기울어집니다.”
이세민은 장손무기의 말에 꼿꼿이 허리를 피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엉덩이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를 본 장수들은 근심어린 눈으로 이세민을 바라보았다.
“폐하,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휴식을 취하시지요.”
한 장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멈출 수 없다. 유주로 가야 한다. 개소문에게 이길 방법은 그것뿐이다.”
장손무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결의를 저희가 받들겠습니다. 힘내십시오, 폐하.”
이세민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과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의 눈빛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당군의 필사적인 퇴각은 그렇게 초라하게 이어졌다.
이세민은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을 보며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졌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장수들은 이세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세민과 함께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앞길은 험난했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폐하, 우리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명예를 되찾겠습니다.”
이세민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말을 달렸다. 그의 눈에는 결의와 함께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위징, 내가 널 그리워한다. 네가 있었다면 이 치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폐허가 된 영주성을 뒤로 하고, 당군은 유주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지쳤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승리의 의지만이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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