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오의 맹세

사비성 / 646년
금화는 아름다운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로 의자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의자왕은 금화와 동침하던 중 길흉을 점쳐보라 명령했다. 금화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만일 백제가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않으면 목전에 망국의 화가 있을 것이고, 그들을 죽이면 천만세 영원히 국가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의자왕은 놀라며 물었다.
“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고금의 이치이거늘. 충신 형제를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하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금화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로는 충신이지만 실제로는 충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자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충신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금화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신은 하늘의 뜻을 말하는 지라 누군지는 모릅니다.”
의자왕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두 충신 형제라 하면 성충, 윤충 형제라는 것을 천하가 모르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다시 부흥한 백제이기에 말도 안 된다.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거라.”
어느 날, 의자왕은 임자와 술을 마시며 별 뜻 없이 물었다.
“그대는 성충을 어찌 생각하는가?”
임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성충은 재주와 지략이 세상에서 매우 특출합니다.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면 백에 한 번도 실수가 없습니다. 또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말솜씨도 있어 이웃나라 사신으로 가면 어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사람이니 천하에 매우 특별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특별한 만큼 그를 다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신이 들어보니 성충이 고구려 사신으로 갔을 때 연개소문과 친해졌다 합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에게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제가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천하에 무슨 일을 못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백제의 연개소문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는 공이 아직 대권을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며 성충을 매우 후대하였다 합니다. 성충이 이처럼 불충한 마음으로 이웃나라의 강력한 대신과 친밀한데다 동생 윤충 같은 명장도 있으니 신은 만세 후에는 백제가 대왕 자손의 아니라, 성충·윤충 백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의자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이 계속해서 돈다는 것은 의혹이 있는 것이리라. 윤충의 강남 정벌 계획을 중단시키고 그를 불러다 옥에 가두라.”
금화는 의자왕의 신임을 얻어 그의 곁에서 더욱 큰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의자왕의 허영심과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교묘한 계략을 세웠다.
어느 날, 금화는 의자왕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 성충과 윤충 형제가 백제의 국운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들이 폐하를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의자왕은 놀라며 물었다.
“그대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는가?”
금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들이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백제의 미래를 위해 그들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의자왕은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나 성충과 윤충은 백제의 충신이다. 그들을 함부로 처단하는 것은 백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금화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폐하, 백성들은 폐하를 따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시면 그들은 따를 것입니다. 폐하의 국운을 위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의자왕은 금화의 말에 설득되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성충과 윤충을 제거하겠다.”
의자왕은 성충과 윤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백성들은 충격에 빠졌으나, 금화의 영향력으로 인해 반발은 금세 잠잠해졌다.
김유신은 자신의 서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웃었다.
“국가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다. 이제 이 나비는 신라의 꽃 위에서 영원히 춤출 것이다.”
조미곤은 김유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군님, 당신의 계략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이제 백제는 더 이상 우리의 적수가 아닙니다.”
의자왕은 백제 부흥을 이끌던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지혜와 용기로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권력이 공고해지자 그의 마음에는 자만과 허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스스로 쌓아올린 공든탑을 스스로 무너트리고 있었다.
영주성 입구 / 646년
영주성에 도착한 까마귀 장군의 눈앞에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성은 불에 타 엉망이었고,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의 부하들이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는 가운데, 성 안에는 1,000여 명의 고구려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까마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죽리가 까마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까마귀 장군님. 연수영 대인님.”
까마귀는 억지로 환히 웃으며 답했다.
“언제부터 기다리신 겁니까. 설마 절 잡으러 오신 건 아니시죠?”
고죽리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농입니까. 제가 무슨 재주로 천하의 용장 연도금류 까마귀 장군을 잡습니까. 인사차 왔을 뿐입니다.”
연수영은 고죽리를 보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의 행동은 까마귀에게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까마귀가 말했다.
고죽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장군."
영주성 안 / 646년
영주성의 주실 안에서 고죽리와 까마귀는 마주 앉았다. 까마귀는 고죽리의 방문 목적을 파악하려 애썼다.
까마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막리지께서 보내셨습니까?”
고죽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까마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양만춘 장군에 대해 물어보아도 됩니까?”
고죽리는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막리께서는 후계를 걱정하십니다.”
까마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후계라니요. 대막리지께서 정정하신데, 무슨 뜻입니까?”
고죽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장군은 연남생, 남건, 남산 대인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까마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막리지의 아들이자, 후계자 아닙니까.”
고죽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막리지는 자식들을 부족하다 생각하십니다.”
까마귀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고죽리는 조용히 말했다.
“대막리지 사후에 자식들이 원만하게 지위와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란 뜻입니다. 자식들이 어리석으니 아비 된 마음으로 경쟁자를 의심한단 뜻이죠.”
까마귀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정녕 소장도 의심하는 겁니까? 소장은 그저 작은 대인을... 대인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고죽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대막리지께서는 장군을 필요로 하시고 믿으십니다. 허나, 완전히 신뢰를 하지도 못하십니다.”
까마귀는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어찌해야 합니까! 소장은 대막리지께 지금껏 충성을 다했습니다. 단지 작은 대인을... 연모한 죄뿐입니다. 그것이 그리도 죽을 죄입니까.”
고죽리는 까마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 장군도 대막리지를 의심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까마귀는 말문이 막혔다.
고죽리는 이어서 말했다.
“장군께서 유주에 남는 것을 대막리지께서 왜 허락하셨겠습니까. 장군이 유주에서 영주로 이동하시는데 고구려 군의 제지를 받으셨습니까. 고건무의 목을 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막리지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실 뿐입니다. 대막리지를 그리도 이해 못하시겠습니까.”
까마귀는 안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대막리지는 왜 이리 어렵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쓸쓸해 보이십니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고죽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막리지께서 직접 말씀을 못하신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요하, 요하를 건너지 마십시오.”
까마귀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감사하다, 전해주십시오.”
고죽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구려는 오랜 전란으로 지쳐있고, 대막리지는 후대를 위해 능력 있는 장수, 대신들을 가려내고 계십니다. 하북, 산서, 산둥을 점령하였지만, 방어선은 더 길어졌고, 신라와 당은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백제는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고요. 대막리지는 평화가 길지 않으리라 생각하십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아들들, 연남생, 남건, 남산이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피로 획득한 권력이기에 또다른 반란을 두려워하며 항상 경계 속에 살았다. 그는 까마귀와 연수영 같은 유능한 장수들을 응원했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졌고, 그때마다 자신의 결정을 되돌아보며 불안에 떨었다.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권력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의 치열한 삶은 끝없는 의심과 불안 속에서 지속되었다.
까마귀는 고죽리와의 대화를 마치고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개소문의 고뇌와 쓸쓸함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을 물리치고, 대륙 북부를 점령한 절대 영웅이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황폐화된 전쟁터였다.
까마귀는 연개소문의 삶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의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그가 겪는 고독을 느끼며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한낱 시골 도살자에서 지금의 까마귀를 만들어 준 건 누구보다도 연개소문이었다. 원망하기도, 두렵기도 하지만, 연개소문과 고구려는 그가 버릴 수 없는 삼족오의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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