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를 줄이고 군대를 키워라(1)

"아니······ 당신들에게 말해서 될 건 없겠지."
그때, 모여있는 사람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여성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비틀비틀 앞으로 나왔다.
"······아마, 부군단장 님이 있을 겁니다."
호릴드와는 다르게 비굴하다기보다는 예의 바른 말투였다.
"당신은?"
"저는 원래 전투 노예였던 년입니다."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건강미가 느껴지긴 했다. 단련한 몸이었나.
"왜 보직이 변경되었지?"
"······자유민인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상해를 줬기 때문이지요."
그 '명령'은 이 아가씨가 예뻤기 때문에 내려진 명령이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뭐,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지만.
"결국 끌려가서 이리되었습니다만, 전투 노예 전에는 가노예 였습니다."
"그 이상한 계급이로군. 그거 원래 노예였다가 가족에 의해 풀려날 경우 생기는 건가?"
"예. 그 과정에서······ 이런 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소용없었습니다만."
그녀는 '이런 일'이라고 할 때 내가 손에 든 알루드 카렉의 머리를 보고 부르르 떨었다.
"어쨌거나 나름 교양이 있는 듯하고······"
잘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존중을 받고 있었다. 아마 가노예나 전투 노예였던 경력 때문인 것 같다. 통치를 위해 지나치게 세분화 시킨 계급은 최고 통치자가 사라진 시점에 어떤 의미의 질서로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작 군사적인 위계질서는 엉망인 것 같았지만.
"내가 이제부터 군단장이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휴리안······ 덴드 입니다."
뒤의 성은 뭔가를 기리는 방식으로 만든 이름 같다. 공식적인 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일까.
"이제부터 여기 있는 휴리안 덴드는 노예가 아니라 일반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노예들은 그녀의 명령을 받는다! 다른 자유민의 명령도 받지 마라!"
노예를 해방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교육이. 그전까지는 어떤 형태든 질서를 만들 필요성이 있다.
생각한 대로, 여기 있는 다른 노예들은 내 선언에 눈에 띄게 안심하고 있다.
"휴리안 덴드. 당신에게 직위와 임무를 맡긴다."
"무엇입니까? 음······ 군단장님?"
"직위는 대관(代官, Vicegerent. 벼슬 대리 업무자). 내 대신 여기 알루드 카렉 군벌령, 아니. 케이운 군벌령의 통치를 하게 될 것이다."
나름 온화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아······ 그, 그건 너무 큰일 아닐까요?"
큰일 맞겠지. 하지만 너도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두 명 정도를 불러 네 비서로 삼아라."
"비서······요?"
"넌 나를 따라 계속 이동하면서 지시를 듣고, 기억해야 한다. 혼자 다 할 수 있나?"
"······아니오. 알핀! 클라넨!"
다소 단단한 몸의 여성과 중년이지만 성적인 매력이 아직 남은 여성의 두 명이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주인······님?"
중년 쪽인 여성이 뭐라 말하기 힘들다 보니 겨우 짜낸 듯한 말로 물어왔다.
"첫 명령이다. 그 누구도, 상대를 주인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해라.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되, 그녀를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대관님이라 불러라. 나를 부를 때에는 군단장님이라 부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두 명은 바로 그리 답하고 잠깐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알겠습니다. 주······ 군단장님."
그나마 휴리안 덴드는 중간에 호칭을 바꿨다. 둘은 내가 노려보자 '아, 아니 군단장님.'하고 정정했지만.
흠. 휴리안 덴드는 비교적 이 와중에도 머리가 좀 돌아갔다. 지목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지만, 나름 괜찮은 인재일 수도 있겠다.
"전투 노예였다고 했지? 전투 훈련을 받았나?"
"전투 훈련은 조금 받았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휴리안 덴드는 잠깐 망설였다 이어 말했다.
"사실······ 직접 전투 능력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전투 능력이 강한 측근을 붙여주고, 내가 앞에서 무력 시위를 해 딴생각을 못 하도록 만들어 둬야겠군."
자신 있게 말하고는 있지만, 나라고 사실 뭔가를 제대로 잘 알고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다. 조금 망치면 어때 젠장, 여긴 어차피 더 망치기도 힘들 엉망인 체계로 이루어진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까지는 못 만들어도 그보다는 낫겠지.
어쨌거나 잘 모르는 머리로 생각해도 무정부 상태가 된 비상시국에 가장 먼저 장악해야 할 건 군사력이다.
물론, 내가 있다면 진짜 군사력은 괜찮다. 문제가 되는 건 내가 부제시의 비상 군사력과 겉으로 볼 때 확실하게 주의를 주는 전시효과다.
일단 내가 무력 시위를 조금 보였으니 전시효과를 일부 줄 수는 있겠지만 모두에게 보인 것도 아니고, 대관이 혼자 있을 경우의 처리가 어렵다.
"알핀······은 저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예, 옙! 저도 전투 노예였던 경우입니다."
"조금 나은 전투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확실하게 들어오는 전투력이 필요해. 군단장, 감독관은 죽었다. 혹시 누군가 다음 순위가 있나?"
"어······ 감독관님······ 아니 감독관이 죽었다면······ 그 아래에는 누가 딱히 없었지······ 않나?"
휴리안이 자기 비서로 뽑힌 두 명을 바라보는 동안 같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두 명 중 중년 부인 쪽이 갑자기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소렌브 님이 약간 높아 보이긴 했어요!"
"소렌브? 아!"
자기들끼리 뭔가 눈치챈 것 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 바로 물었다.
"그 소렌브라는 놈은 내 손에 죽지 않았을까?"
"얼마 전에 알루드 카렉의 심기를 거슬려서······ 지하 감옥에 갇혔을 거예요."
"나노 능력자인가?"
"예!"
알루드 카렉의 지배하에서 나노 능력을 분배받았다는 건 그만한 충성을 증명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유능하다는 뜻이겠지.
심기를 거슬려 갇혔다면 충성을 증명한 것보다는 유능할 가능성이 있겠고.
"좋아. 그럼 그 녀석을 내가 정면에서 두들기고 말을 듣도록 만들 테니, 부하로 쓴다고 생각하도록."
"예?!"
휴리안 덴드가 바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을 해 왔다.
명시적인 계급이 없더라도 나노 능력자는 그것만으로 특권을 가진 엘리트. 법이 조금만 멀어도 사람을 즉시 죽이고 권력관계를 역전 시킬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런 인간에게 명령을 어떻게 내리냐는 물음일 것이다.
"뭐, 일단 방법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는 그다음 일을 걱정해."
"예, 옙······ 으음······. 그다음 일은 무엇······인가요?"
"그 소렌브라는 놈을 시켜 군대를 조직하고, 내 말을 따르는 네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다. 그 과정에서······"
그 뒤로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겠지만, 대부분의 일은 체계가 정비된 뒤부터 할 일이다.
"그 누구도 노예로 떨어지지 않는다. 가두거나 매질을 우선시해라. 죄질이 너무 크다면, 차라리 죽여. 가족은 놔두고 본인만."
"아, 알겠습니다."
즉흥적으로 사법 조항을 만들어간다.
"아직 심판 체계는 못 만들겠지. 법도 없을 테니. 하지만 앞으로 법을 세울 것이다. 그때까지 기본 법 규정을 만든다. 그 제 1항이 그것이다. 이제 더 이상 노예는 늘리지 않는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제거한다."
이 모든 체계의 목표는 노예 해방의 방향성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막고, 한 번에 규칙을 와장창 흔들지는 않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당장 신분이 바뀔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확실히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그걸 해방할 권리는 나와 내 결정을 대리하는 대관만이 가진다."
내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대관을 협박하거나, 아직 어벙벙한 그녀가 속아 잘못된 상대를 노예에서 해방했다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것도 강조해. 대관의 결정이라 해도 내가 와서 번복할 수 있다."
"······그럴······ 그럴 경우, 제가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되겠군요."
물론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실수를 되돌리는 것이 목표지, 실수를 처벌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실수를 많이 해도 좋으니 좀 휘둘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니, 번복을 하는 것으로 다시 노예 계급으로 떨어질 뿐이지, 너에 대해 그것을 이유로 하는 처벌은 없을 것이다. 뭔가 극단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냥 하루 만에 전원을 해방하는 것도 허용한다. 그조차도 내가 돌아와 번복할 수는 있지만, 이유가 있는 한 너를 그 이유로 처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솔직히 그 정도의 일을 저질러야 할 이유는 나도 상상이 가지 않으니 진짜 처벌이 없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라면 그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 본심이다.
어차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있고, 질 능력이 있는 건 나지, 그녀가 아니다. 대리자인 그녀는 인간으로서 가질 동정심과 나라는 채점자에게 나쁘게 보이지 않기 위한 눈치 정도만 가져도 된다.
나머지 내용들은 대부분 점진적으로 이곳을 다른 군벌령, 정확하게는 하넬 드록스의 군벌령과 비슷한 상태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결정에 대해 이유만 잘 적으면 대부분의 일에 대해 처벌하지 않겠다는 설명을 마칠 무렵, 드디어 2층에 도착했다.
따라온 3인을 2층에 두고, 1층에 내려간 내 앞에 새카맣게 몰린 녀석들이 보였다.
휘휘휘휙! 팍, 탁, 텡!
일단 보자마자 쇠뇌를 발사한 놈들에게는 친위대로 발탁하기 위한 가산점 추가. 특히 마지막에 내 버클로 막게 한 놈은 아예 그 틈에 미간까지 노렸다. 잘 쐈군.
하지만 오래 끌 생각은 없다. 그러니 놈들의 앞에 경고 사격을 가하고.
타타탕!
놈들이 깜짝 놀라는 틈에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던졌다.
"알루드 카렉은 내 손에 죽었다!"
경악과 동요. 대략 2초의 시간 여유. 아직 충격을 다 소화하지 못했을 것 같은 시간에 바로 말을 잇는다.
"내가 이제 이곳의 군단장이다!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지 덤벼라!"
제발 헛소리해서 괜히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놈이 없기를. 여기서 대량 학살 같은 걸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좋아. 조용하군.
머릿수가 시커멓게 몰려 있고, 누군가 제대로 된 통솔자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니 원래라면 이런 일은 있기 힘들겠지만, 나름 승산은 있었다. 그게 제대로 작동한 듯했다.
알루드 카렉의 통치는, 사람들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만든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반사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리 개기던 놈들은 모두 노예가 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틈이다. 놈들에게 필요한 걸 때려 넣어줄 대리인을 불렀다.
"휴리안 덴드! 내려와라!"
아차. 그러고 보니 태도에 대해 주의를 주지 않았는데. 그녀가 겁먹은 상태로 내려오거나 하면 좀 골치 아플 것이다. 카리스마는 태도에서 많이 발생하니······
허.
기우였다.
그녀는 나와 있었을 때보다 더욱더 의연한 태도로, 몸을 꼿꼿하게 펴고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왔다.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애초에 외모도 좋고, 여자치고 단련된 몸에서 보이는 당당함도 좋다. 알루드 카렉이 즐기기 위해 청초하게 꾸민 옷자락이 미치는 신비감 역시 한몫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불안해 보이면서도, 그녀들의 '주인'을 따라 나름 자세를 꼿꼿하게 펴고 등장한 두 여자의 어딘지 어색한 태도가 그녀를 더 돋보이게 한다.
인선이 좋았군.
알고 뽑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내 옆에 당당히 선 그녀는, 나름대로 통치자의 카리스마에 가까운 것을 이미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나를 대리하여 통치한다. 하지만 한동안 수시로 돌아와 통치 상황 점검을 할 테니 멍청한 반항 같은 건 하지 말도록!"
이제 맡길 일은 대충 맡겼고······ 친위대 면접이나 좀 볼까.
하지만 그 전에, 저기서 모두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선뜻 접근하지 않는 알루드 카렉의 머리는 다시 집어야겠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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