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알아요(1)

"그럼······ 카니스. 너에게만 할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좀 비켜줘."
내가 카니스에게 말 하자마자 주변의 상황을 모르는 우덴 드록스를 제외한 모두가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뭐, 뭣?!"
카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고.
"어머나?!"
오피아는 좋아 죽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웬만하면 저도 안 놀릴 생각이었습니다만······"
라닐 레펜조차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미치겠군. 아니, 그딴소리가 나올 것 같긴 했지.
"젠장, 계승 순위 최고위인 카니스에게만 말할 내용이 있어! 너희가 자리를 안 비워주면 내가 가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대뜸 카니스의 손을 붙들고 끌고 나갔다. 끌려가는 동안 새빨간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던 카니스는 이윽고 얼굴을 들었다.
그녀도 내 태도에서 뭘 이해했는지, 표정은 충분히 심각해졌다. 아직 핏기가 빠지지 않았는지 붉은 채지만.
"······좀 부끄럽긴 했지만, 심각한 거지? 이거."
"그래. 세상이 위험한 상황이라 다른 곳에 돌릴 정신은 없으니까."
"······세상이 안 위험하면 생각이 있다는 소리야?"
"······몰라 나도.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아, 아니 젠장. 그래, 네 말대로 심각한 거니까 본론이나 이야기하자."
"흠. 그래. 소아성애자 같으니."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은근슬쩍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 손부채질했다.
"······네 입으로 그리 말하면 좀 그렇지?"
"몰라, 나도 내 입으로 말하고 나니 좀 짜증 나려고 하네."
그녀는 정말 짜증 내는 얼굴은 아니었고, 그 표정이 정말 이쁘게 보였다.
나 진짜 왜 이 아가씨에게 꽂혔지.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애써 정색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제대로 이야기하자. 이건 어쩌면 오피아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대체 어느 정도의 이야기인데?"
"내가 정말로 유일하게 제대로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잠재운,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에 대한 이야기야."
카니스의 얼굴에서 드디어 붉은 기가 완전히 가셨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인데."
"그렇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말하지는 않는 것이지."
나는 그녀에게 신뢰를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최악의 경우, 내가 죽거나, 뭔가의 이유로 내가 하던 짓을 다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나마 남은 기회는 너뿐이다."
"······신전 기사라고 해도 그렇게 큰 권한은 없는데."
그녀가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신전 기사지. 그것도 다소 믿음이 부족한."
"······그건 무슨 뜻이야."
카니스의 얼굴에 불쾌함이 비쳤다. 자기 말로 믿음이 부족하다 하면서도 그녀 역시 일단 종교인은 종교인인 모양이었다.
"여신은 움직이지 않아. 그 점에 대해서는 검은 용이 맞아."
카니스가 나중에 검은 용의 사고방식을 설명해 준 바가 있었다. '검은 용은, 충격적인 변화를 주고 인류를 위협으로 몰아넣어 여신을 각성시킨다고 했어.'
"······그냥 말을 거기서 끝낼 것이라면, 당신이 얼마나 강하든 간에, 내가 얼마나 얼치기 신도이든 간에 나는 죽자 살자 덤비는 수밖에 없어."
불쾌함의 깊이가 더 깊어졌다. 다행히도, 내 말은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하지만 검은 용의 방식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미친 짓이지."
애초에 광인의 발상이거나, 다른 생각이 있는 소리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런 방식을 택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가능해?"
카니스의 눈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종교인이라 해도 그녀는 교리 자체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그저 구원을 바라는 것뿐이겠지.
기적이 찾아오는 방식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고, 그것에는 경도되지 않은 종류의 믿음이 있었다.
나는, 이 아가씨가 다시 한번 마음에 들었다.
***
케이운과 카니스가 저편에서 이야기하는 표정은 점점 심각해져 간다.
관계가 덜한 우덴 드록스가 멀어지고 데인스, 오피아, 라닐 레펜이 모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힘들긴 한데요······."
오피아는 좀 미묘한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다. 여전히 장난기가 대부분이지만, 그 와중에도 걱정하는 마음도 좀 비쳤다.
"대장이 좀 삭았지? 아가씨는 너무 어려 보이고? 잘못하면 부모처럼 보일걸."
데인스는 이제 슬슬 케이운을 좀 놀려도 될 짬이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대장은 놀려댈 곳은 꽤 많기도 했다.
"부모는 좀 심하게 나간 것 같습니다만."
라닐 레펜 역시 묘하게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피아가 우선 어깨를 들어 보였다.
"놀려대는 건 놔두고······ 어떻게 생각해요? 표정이 진짜 심각한데요."
"대장은 알게 모르게 비밀이 있지? 숨기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하면 헛소리로 들릴까 봐 피하는 가봐? 아가씨 쪽은 그런 것 없으려나?"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그냥 카넥 군벌령이었을 때부터 소매치기로 살았다는 소리만 들었죠."
"나름 유명했습니다. 빨간 머리 좀도둑 하면, 실력이 꽤 좋았다고 하죠. 당신도 듣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가씨였어? 묘하게 잘 돌아다니는 실력 좋은 소매치기라는 소리만 들었는데?"
"그녀와 연이 있는 사람들은 꽤 있었습니다. 대부분 난리 통에 죽었지만."
"하넬 드록스가 내부를 정리하기 전? 무정부 상태?"
"예. 그녀는 실력도 좋았고, 외관도······ 아름······답다고 하기보다는 좀 애처로웠죠."
"지금도 그렇지만요. 보기보다는 깡다구 있는 언니지만."
"그 덕에 소매치기로 알려졌으면서도 그리 나쁜 인상을 받지 않고 잘도 지냈습니다만······. 그녀가 돈을 못 벌게 되면서 문제가 되었지요."
"소매치기가 돈을 못 벌어? 그나마 무정부 사태라면 당연히 더 쉽게 가능했을 것 아닌가?"
"당신도 이 지역 살던 사람이라면 조금만 수소문해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난 정말 몰랐는데?"
"말을 고치죠. '조금이라도' 수소문 해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흠. 당신은 관심이 없었나 보군요. 하긴, 남의 비극이니까요."
"······비극?"
"그녀도 자기 인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너무 나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죠. 선을 넘어가면, 그녀가 가진 무기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실수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무슨 실수?"
"어떤 남자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산을 모두 처분해 가지고 가는 것을 훔쳤습니다. 뒤늦게라도 알고 돌려주려 했지만, 그 남자는 그걸 되찾기 위해 너무 위험한 곳까지 갔지요."
"비극이라면 비극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흔한 내용 아니야?"
"감성이 말라비틀어져 있군요."
"우와 꽤 쓰레기였군요? 케이운씨는 그래도 좀 나은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데인스가 대꾸한 것에 라닐 레펜과 오피아가 즉각 눈을 흘겼다.
오피아는 몰라도 목을 추수하고 다니고, 사람 어깨 살을 도려내는 켄세이에게 그런 소리 듣기는 좀 억울했지만 데인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내가 알아요. 그 돈을 모조리 그 자식 치료하는 데 쓰려고 했는데, 좀 써서 돈이 부족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털려고 한 게 우리 신관님 중 하나였고요."
"엔텔라는······ 그냥 신관도 아니라 대신관이셨지요."
"뭐, 정식으로는 퇴임하시긴 했죠. 지금은 그냥 원로원이시고."
그들의 이야기는 잠깐 그쳤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 않은 것도 있지만, 카니스와 케이운의 이야기가 굉장히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카니스의 표정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대장의 비밀이라는 게? 좀 심각한가 보지?"
"우와. 웬만하면 둘만의 작은 비밀로 간직하게 그냥 둘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는데요. 이건 로맨틱한 문제가 아니네. 두 분 모두 케이운씨 따라 출장 갈 거죠? 저는 선배한테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테니까 두 분도 좀 알아봐요?"
"미쳤나? 난 대장에게 밉보일 생각 없다? 군벌 하나를 하루도 안 걸려서 정복하고 돌아오는 인간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건 미친 짓이야? 그래도 켄세이 님 정도면 되지 않나?"
"저도 정면에서 대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저 사람은 너무 중요한 인물이지요."
지나가는 말 같지만, 그 말에 숨은 의미는 의외로 꽤 극적이었다.
"······당신이 이긴다는 소리야?"
"확신은 어렵습니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근접전이라면 제가 유리하고, 원거리면 제가 불리하겠지요. 어쨌든 누가 봐주고 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닐 겁니다."
"나 솔직히 그거 좀 보고 싶긴 해요!"
"그만둬 아가씨? 왜 세상의 멸망이 걸려있는데 그런 미친 짓을 봐야 해?"
"그럼 세상이 안전해지면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라닐 레펜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남은 상태로 불길한 이야기를 남겼다.
***
부러진 톱니의 군단장은 한 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의장이라는 대표를 하나 뽑기는 했지만, 그 대표에게는 그렇게 큰 힘이 있지는 않다.
의장 나크란 데폰은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 격정을 생각해 보면 이미 커다란 출세가 아닌가.
그리고, 그에게는 어차피 지나간 나날이 앞으로 남은 나날보다 적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대표는 원래 코덱스 교단 소속이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요."
베리엔 핼리아가 빙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화두를 던졌다.
젊은 시절에는 미녀였을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나자 그 모든 미련을 지워버렸다는 듯, 머리를 확 밀고 몸매 관리를 그만뒀다.
그래도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간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그걸 유지해 주는 듯했다.
"당신은 그 루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슬슬 이야기해 줘도 될 것 같지 않아요?"
어차피 30년 전의 이야기다. 그는 엄중한 비밀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할 마음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내 지루함을 달랠 가십거리는 되겠지요."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주의 깊은 마음은 사라질 법도 했지만, 그는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위험이 될 만한 걸 정적에게 노출하면 안 되지."
"우리가 어디 정치다운 정치를 벌여봤나요? 내가 당신 정적이라는 소리도 웃기는데."
부러진 톱니는 기술 숭배 성격을 가진 군벌이다.
문명 지대 군벌의 모체는 대부분 문명 시대의 계엄군이었다.
급하게 조직된 계엄군이 상부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긴급 통치를 하다 결국 지방 호족화 되며 각각의 영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러진 톱니는 형성 과정부터 조금 차이가 있긴 했다.
"기술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정치적인 접근을 약화할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도 정치는 있어."
테크노크라시(Techonocracy).
부러진 톱니는 기술관료제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집단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군벌이었다.
군단장이 아니라 각 부의 장관들이 각자의 분야에 대해 큰 권한을 행사하며 명목상의 대표인 의장은 의회를 주체할 권한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의장님이 원하면 어느 정도는 원하는 대로 흘러갈 텐데요?"
역시나 공인 기질이 가장 큰 사람들이 승진한 결과 자리를 가지게 되는 장관들은 정책에 대해 그리 큰 관심들은 없다.
그저 자기들의 예산 배분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불필요한 권력을 탐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기존 방향에 커다란 변화를 직접 가하지 않는다면, 가장 정치적으로 야망이 큰 의장이 대부분의 일을 결정하게 되는 경향이 강했다.
"내가 보이는 태도나 결정하는 정책에서 선을 넘지 않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군비 축소에 시동을 걸거나 한다면 새로운 방위부 장관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지 않겠나."
"그런 짓 안 하면 된다는 뜻 같네요.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정면에서 효율을 근거로 논파하려 들지, 의장님의 과거사를 이용하는 복잡한 짓은 안 할 것 같은데."
진솔해 보이는 그녀의 말은 편안했다. 실제로 부러진 톱니에서 살벌한 정치투쟁은 발생하지 않는 게 사실이기도 하니.
하지만 딱 한 명, 그런 '약점'을 사용할 것 같은 인물이 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문화부 장관, 베리엔 핼리아다. 나크란 데폰 의장은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면서 묘한 미소를 짓던 그녀는 마저 말을 이었다.
"하긴. 의장님 상대로 그런 필요도 없죠."
"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으음······. 교단이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사실. 더 중요한 건 검은 용 소속이었다는 것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된 말은 그의 머리에 조금 늦게 경고를 던졌다.
핏기가 먼저 빠지고, 나이를 먹어 떨리는 그의 손이 더듬거리며 책상 아래를 뒤진다.
"그······그······"
"말 잘하시는 의장님이 어디 가셨데요? 말을 더듬다니, 슬슬 퇴직하실 때가 되긴 하셨나 봐. 아,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그 책상 아래 둔 핸드캐넌은 꺼내려고 하지 마세요. 뭐, 거기 남겨두지도 않았지만."
"너······너?! 거, 검은 용이냐?! 나는 무사히 나왔다! 검은 용은 약속을 지킬 텐데!"
"물론 당신이 퇴직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벌써 30년간 얼굴과 이름을 고치고 잘도 살아 있는 것 아닌가요? 배교자로 잡히지도 않고."
"그러, 그런데 왜!"
"아, 의장님과는 정말로 정치적인 영향력 대결로 내보낼 생각이었답니다? 우리 정체도 모르는 상태로 조용히 손을 떼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용의 두뇌에서 약간의 정책 변경이 생겼어요."
"나······나를 어쩔 거지?"
"너무 떠시네······ 아뇨, 협박은 하겠지만, 목숨을 빼앗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이제 슬슬 의장직을 내려놓으시면 될 것 같네요."
베리엔 핼리아는 둔중한 몸을 일으키고 의외로 기민한 움직임으로 나크란 데폰 의장의 앞까지 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류 한장을 내밀었다.
"여기 사인하시고, 퇴직한 다음, 여생은 골치 아픈 정치도 잊고 편히 사시는 건 어때요?"
나크란 의장의 눈앞에 내민 문서에는 '긴급 법안 발의서'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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