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이 함정을 물었다(1)

노을마저 져버리고 시커먼 밤이 왔다.
커다란 사유지에 고성처럼 자리잡은 오래된 건물 하나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다 무너지는 건물이 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
오히려 300년 버티고도 모자라 다시 300년은 문제없이 버틸 것 같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문명 시대에 만들어진 튼튼한 재질의 건물.
하지만 문은 다르다.
문명 시대의 건물이라고 해도 문까지 교체 안 하고 버티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시대를 견디기 힘드니까.
그래서 교체된 '현대적인' 나무 문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이 나를 유혹했다. 그냥 시원하게 부수고 들어가라고.
하지만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소리를 낼 것이고, 원거리에서 집중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지는 않겠지만, 반격 정도는 필요하다. 총으로.
그럼 나는 안 죽어도 놈들이 죽는다. 그리고 하나둘 죽어 나가면 도망가려 할 수도 있다. 그건 귀찮다.
특히 죽이지 않고 잡으려면 나쁜 선택이 된다.
그러니 문을 '따고' 들어갈 필요성이 있다.
"젠장. 아날로그 문을 따는 건 특기가 아닌데."
눈으로 보고, 위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정밀하게 옮길 수 있다. 그게 내 탄약을 발사하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자물쇠의 드라이버 핀들을 열쇠 높이에 맞춰 정밀하게 움직이고, 높이를 유지한 상태로 돌리고 하는 건 쉽지 않다.
차라리 문고리 반대편 잠금장치를 푸는 것이 편하지만, 그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일반적인 문의 두께는 적어도 4cm.
그러니 내부 구조를 조작해야 한다.
손을 문에 가져다 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잠금장치 내부의 위치를 대략 상상한다.
핀이 아니라 자물쇠 반대쪽의 실린더를 눌러 열기 위한 장치를 상상하고 그 위치에 맞춰 기기를 이곳저곳으로 툭툭 움직인다.
다행히도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다. 내가 나보다 큰 질량을 가진 것을 밀려고 하면 대상이 아니라 내가 밀려 나가니까.
그런 식으로 낑낑거리는 동안 내부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니 씨, 술통이 비었잖아! 새것, 새것 가져와!"
내부의 놈들이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듯하다.
"······북쪽 병신들이 전쟁 중인 거 말이다, 얼마나 갈 거 같냐?"
목소리가 젊다. 그리고 째진 듯한 소리.
"저 새끼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전쟁 중이던 것 같던데?"
"여기 돌던 그 연구자인지 뭔지 하는 할아범한테 그것도 물어볼 걸 그랬나."
"뭐 잡고 물어볼 수 있던 것처럼 말하냐?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몰라놓고."
"아, 그 노친네, 내가? 어? 겁을 줬더니 쫄아서 입 다물더만!"
"병신 같은 새끼. 네가 겁을 주긴 뭘 겁을 줘? 보니까 무시당한 거더만."
"뭐 씨?"
"야야, 애 잡지 말고······"
그 와중에 아는 목소리가 하나 지나갔다. 네반. 그놈이다.
철컥.
"당장 다음 주 생각이나 하자. 이제 또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 한탕 해오자고? 근데 이제 북쪽도 슬슬 뭐 없잖아? 한 다섯 번 나가보면 다 떨어질 것 같은데."
"뭔 먼 이야기 말고, 가까운 미래나 고민하자고. 다섯 번은 다 빨아먹고 생각해야지? 야, 술 가지러 어디 가냐!"
"근데 진짜 술 말고, 좀, 어? 여자도 좀 데려와 보자, 네반?"
"여자는 무슨. 이제 노인들과 병신들밖에 안 남았는데. 술 빼앗아 오는 게 고작이다."
······비교적 최근에 한탕 친 건가.
잘 되었다. 오늘 아예 술 마시며 내내 놀 생각인가 보군.
"야, 나 화장실 좀 갔다 온다."
슬며시 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가 발소리 없이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 도중, 한 놈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좀 바깥에서 싸라. 미친 새끼, 술 좀 들어갔다고 아무 데나 싸지 말고. 너 새끼 때문에 방 하나를 못 쓰게 됐잖아?"
"아, 급했다니까? 이제 안 해!"
흠. 화장실이라.
수도 시설의 부족은 화장실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들 되도록 옛 문명 시대의 하수시설과 어떻게 해서든 연결하긴 했지만, 문명 시대의 정화 시설에는 아예 동력부터 필요하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결국 막히고, 뚫릴 때까지 엉망인 상태로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부분 요즘 시대의 화장실은 수동으로 '유지보수'되는 구조를 가진다. 전근대적인 세계가 되니 지저분한 일이라는 이유로 노예를 주로 동원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제대로 된 수세식 변기가 작동 중이었다.
소리가 날까 눌러보지는 않았지만, 물이 고여있고, 그 물은 분명히 흘러 내려갈 것 같았다.
이건 기계적인 구조를 유지보수할 사람 없이 300년 동안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과거의 기술을 유지할 수 있는 기술자가 만졌다.
하지만 깨끗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때나 곰팡이가 슬어 있는 게 아니다. 원래는 꽤 깨끗했을 것을 최근 사이에 엉망으로 관리하면서 급격하게 지저분해진 모양이었다.
바깥의 표지판과도 같다.
제법 깔끔하게 사는 사람이 원래 사용했다. 아마도 연구자 같은 사람이.
"어······ 취한다. 아 씨발, 거 새끼들 X나게 마셔대요."
그걸 저런 놈들이 와서 그 전 사람을 쫓아내고 점거했다.
대화하는 꼴을 보면, 여러 가지로 별로 살려둘 필요성도 없어 보인다. 비교적 양심 상하지 않고 쉽게 청소하고 넘어갈 놈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보가 필요했다. 원래 살고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포함해서. 그러니 여전히 가능한 한 많이 살린다.
특히 네반은······ 그놈 만은 더더욱 꼭 살려야 한다.
불은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시커먼 암흑이 내려온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광증폭 고글을 끼고 소변을 보는 놈 뒤로 접근한다.
이놈, 취하긴 제대로 취했나. 왜 조준도 제대로 못 해······ 이러고 청소도 안 하니 화장실이 이 모양이지.
나도 괜히 소변이 튀기는 꼴에 당하고 싶지 않으므로 놈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놈이 돌아본 순간, 놈에게 아음속 탄을 두 발 날린다.
피휵! 피휵! 화확!
놈도 모르는 사이 장벽이 발동하며 내 총알을 막는다. 기습으로 저도 모르게 죽어버리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건 놈 주변 에너지를 소모한다.
"뭐, 뭐야? 어?"
놈은 아직 제대로 된 말이 아니라 술 취한 꼬부라진 말을 하고 있다. 술에 취했어도 제정신 차리고 다른 놈들을 제대로 된 외침으로 부를 때까지는 약간 더 시간이 걸리겠지.
그 틈이면 충분하다.
나는 놈이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 몸을 가누고 내 쪽으로 휘두르는 주먹질을 간단하게 피했다.
바로 놈의 목을 엄지와 검지 사이로 친 다음 그대로 붙들고 놈의 명치에 무릎을 찍어 쓰러뜨린다.
"켁?!"
명치를 맞아 숨은 가쁘고, 목을 잡혀 그나마 소리도 내지 못한다. 호흡조차 제대로 못 하고 괴로운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놈을 앞으로 잡아당겨 바닥에 뒹굴게 한다.
쿵!
"아 병신 같은 놈! 술 취해서 그렇지 저 새끼?!"
"냅둬, 내일 되면 깨갰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꽤 큰 소리라 반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아직 정신은 못 차리고 있지만 목소리는 내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내가 놈보다는 빨랐다.
놈의 손을 뒤로 빼고 잽싸게 권한 제한 수갑을 채우고, 놈의 옷을 둘둘 말아 얼굴 전체를 파묻듯 묶었다.
기절이라도 시키면 편하겠지만, 안 죽이고 기절시키기는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니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놈이 큰 소리를 못 낼 때까지 묶는다.
물론 놈은 바둥바둥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일단 명치를 다시 주먹으로 쳐서 반항하기 힘들게 한 다음 들쳐 맸다.
"읍! 읍!"
사람 안 죽이고 제압하기는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나는 놈이 바둥거릴 때마다 놈을 들쳐맨 자세 그대로 내 쇠 버클을 놈의 배로 이동시켜 한 대씩 때리며 이동했다.
놈은 잔뜩 피멍이 든 상태로 시설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방 내부에 굴려졌다. 놈을 제대로 된 로프로 둘둘 감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주 어렵지는 않을 모양이다. 놈들은 아직 술에 취한 것 같고, 밤은 깊었다.
***
밤이 되자 레이저 지브라는 데인스의 대역을 맡을만한 대머리 떡대를 정말로 어디서 구해왔다.
"이 친구와 옷을 교환하십시오."
지시에 따라 옷을 교환하고, 대역이 되는 대머리 떡대 남자가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데인스와 라닐 레펜은 레이저 지브라의 뒤를 따라갔다.
"해산한 다음, 우리는 여전히 잠깐 용병을 좀 했습니다. 부러진 톱니 군벌령은 어딘가와 본격적인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닌지라, 아주 옛날의 PMC(Private Military Contractors, 민간군사기업) 같은 활동이었지요."
묘하게 어려운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데인스와 라닐 레펜도 제법 익숙한 문명 시대의 하수 시설이었다.
그길로 어디 비밀 문이라도 열고 들어가서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하수시설 한 가운데의 '길'에서 멈춘 그는 바로 입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는 지금 사용되지는 않는지 냄새는 없었고, 물도 흐르지 않아 습하지도 않았다.
천장이 뚫려 달빛에 비치는 레이저 지브라의 얼굴빛은 창백했다.
"부러진 톱니가 전쟁을 굉장히 오랫동안 경험하지 않고, 평화롭게 진행되다 보니, 조직의 부패가 진행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경험을 가진 변경 칼날 출신의 용병인 대장을 좋게 보고 계약한 거였습니다."
라닐 레펜은 위장용의 미소를 싹 지우고 평소의 무표정한 표정인 상태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레이저 지브라가 잠깐씩 말하다 쉬는 시간에도 그녀는 조용히 듣고, 이야기를 소화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특히 힘을 쓴 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내부 대항전의 개최였지요. 솔직히 재미있는 게 사람들의 전투력을 가장 잘 유지할 방법이라는 게 대장의 기조 아니었습니까."
정말 다급했는지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데인스는 사실 이 사람 만나면 그 웃기는 이름(Laser Zebra, 레이저 얼룩말)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어떻게 봐도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그런데 그게······ 너무 잘 진행된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잘 진행되다 보니, 위쪽에서 이미 잘라버린 방위부 장관 대신 대장을 영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건 좋았죠. 대장도 켄세이 뒤를 쫓아다니다 헤어진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레이저 지브라는 조금 눈을 찌푸렸다. 오래된 눈가의 상처가 아파서는 아니고, 라닐 레펜에 대한 원망이 조금 섞이기라도 했던 듯했다.
"······원망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요."
드디어 라닐 레펜이 입을 열자 레이저 지브라가 입을 부들부들 떨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물론입니다. 지금 와서 당신에게 원망한다고 나아질 것도 아니고."
"기분이 편해질 것 같다면 원망하세요. 그걸 못할 사이는 아니니."
"그보다는······ 방위부 장관이 된 스카 라텔 대장은, 지금 가택 연금 상태입니다. 군벌령 내부에서 일어나는 쿠데타의 낌새를 눈치채고 막으려고 했거든요."
레이저 지브라는 라닐 레펜에게 엎드리다시피 꿇어앉았다. 그리고, 라닐을 올려다보며 양손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기원이라도 하듯, 요청했다.
"······우리 대장님 좀 살려 주십쇼.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복권도 시켜야 합니다. 켄세이. 진짜 마지막 부탁입니다."
라닐 레펜은 한숨을 내쉬고 어설픈 나무 테 안경을 벗었다.
"상세 정보를 전부 말하세요. 그리고, 우리도 '대장'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녹 테라에게 알리기 위한 인원은 이미 확보했습니다. 당신이 들어오자마자······"
"아니, 우리 대장은 아녹 테라가 아닙니다. 그녀에게도 알려야 하겠지만, 별도로 내가 여기 들어오게 만든 대장이 따로 있지요."
라닐 레펜은 레이저 지브라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마지막 어스름파수대, 케이운이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경로를 찾고, 연락해야 해요. 단말 신전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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