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타나다니(2)

[오피아가 마지막 유도 구간에 들어갔다.]
뮤리데는 진짜로 왜인지 버섯을 못 먹게 되면서······ 오히려 조금 더 건강해진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인간들 시간으로 초라는 단위를 들었다. 그럼 120초 정도 지나면 유인 후 탈출 구간에 들어갈 것이다.]
어딘가 좀 더 똑똑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잘못하면 무서운 일이지만, 왜인지 위험한 방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도가 올라간 기분이라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럼 출발할 거야 뮤리데. 몇 마리 정도 나를 따라올 수 있을까? 꽤 멀리 갈 건데."
[우리는 인간의 달리기를 따라갈 수 없다. 특히 너는 더 빠르니······ 얼마나 싣고 달릴 수 있지?]
카니스는 홀가분한 상태를 선호한다. 그녀의 전술이 가벼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뮤리데의 쥐 몇 마리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20마리."
[그 정도면 가벼운 지시는 따를 것이다. 먹이만 잘 주도록.]
여러가지 친해진 건 사실인데, 뭔가 친구 살점을 빌리는 기분이라 좀 이상하긴 했다.
"가자······ 어······ 작은 뮤리데?"
'케이운에게 중요한 물건'을 담은 등 가방에 공간을 만들고 20마리의 쥐들을 실은 카니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오피아가 탈출로에 진입했다······ 3, 2, 1, 지금!]
카니스는 뮤리데의 신호에 맞춰 얇은 장막으로 닫혀있던 '비밀 문'을 열어젖히고, 오피아의 뒤를 쫓아가는 검은 용의 발톱들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화악!
물론 하나로는 부족하다. 오른손으로 단검을 던지자마자 왼손에 들고 있던 쇠뇌를 겨냥하고 발사한다. 퉁!
콱!
"아악!"
오피아를 추적하던 병사 중 꼬리에 있던 인원이 어깨에 박힌 볼트에 분노의 일성을 지른다. 그 소리에 놀란 검은 용의 일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가장 뒤에서 비교적 느긋하게 쫓아오던 '타격대', 아마도 C-24라는 로봇들이 위장한 복장째로 카니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니스는 여기 보라는 듯,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삐익!]
왜애애애애앵!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문명 시대 말기, 살상 기능을 가진 로봇에 해킹 시도가 있을 경우 울리게 되어있던 프로토콜에 따른 것이다.
좁다란 터널에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통에 진동으로 인해 천정의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그건 카니스 입장에서도 괴로웠다. 케이운으로부터 주의를 듣지 않았다면 그녀도 힘들었을 것이다.
가방의 쥐들조차 찍찍거린다. 조금만 참아 뮤리데.
검은 용도 처음 당한 시도에 깜짝 놀랐는지 행동을 멈추고 귀를 막는다. 그 틈에 카니스가 또 다음 단검을 던지고······
[본 기체에 대한 해킹 시도가 진행 중입니다. 진단 중. 차단 성공.]
4기의 타격대가 카니스를 포착한다. 그리고, 나머지 검은 용의 추적대들까지 모두 반전했다.
그들도 알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카니스다.
"신전 기사 카니스!"
"무너진 다섯 개의 신좌에 맹세코."
카니스는 슬쩍 웃고, 그대로 원래의 입구 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비상용 탈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저년을 잡아!"
메이브의 외침이 들렸다.
"이단의 길에 찢긴 살을. 배교의 길에 흩뿌려진 피를."
그래 그렇겠지. 당신은 내 오빠의 원수. 나는 당신의 동생의 원수.
그는 케이운을 죽이기 위해 왔다. 검은 용에게 위험하니까.
하지만 그는 카니스를 더 죽이고 싶어 했다. 개인 용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카니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핑계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상호적이었다.
카니스는 모든 것을 걸고 검은 용의 메이브를 추적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를 추적할 단서와 자원이 부족했다.
"이단의 길에 찢긴 살을. 배교의 길에 흩뿌려진 피를."
그래서 카니스는 그에게 그 핑계를 줬다.
카니스는 C-24를 해킹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불결한 기계의 전원을 내려라. 캐퍼시터의 불꽃조차 남기지 마라."
카니스는 케이운이 만든 가장 커다란 '요새'에서, 보란 듯 가방을 짊어지고 움직이고 있다. 잠깐 봤다고 못 볼 놈들이 아니다. 그녀의 작은 실루엣에 등에 짊어진 가방은 눈에 잘도 띌 것이다.
그리고, 케이운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맡겼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짊어진 가방 같은 것에.
"오염된 지성의 데이터를 삭제해라. 패리티 비트의 파편조차 남기지 마라."
이유는 간단했다. 카니스는 케이운의 연인이니까.
카니스는 또다시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사실도 아니다.
그건 미끼였다.
***
단말 신전. 코덱스 교단의 신도들이 일하는 신전이자, 신도들의 통신 수단.
이곳에 패킷 코인을 가져간 일반인이나, 신관 이상의 계급들은 신전의 통신 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
사용되는 통신 방식은 카니스도 알 수 없지만, 이 역시 여신의 은혜이며, 서로를 홀로그램 영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영상 저편의 케이운은 웬 처음 보는 노인과 함께 있었다.
그쪽도 뭔가 급히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카니스가 먼저 급히 할 말이 있다 손 들고 상황 설명을 했다.
'······뭔가 복잡한 일이 있나 보네. 하지만 이것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놈들이 미끼를 물었어.'
케이운은 그 말에 잠깐 생각한 뒤 답했다.
'서둘러 돌아가야겠지만, 그 전에 놈들이 내 요새를 건드리면 곤란해. 놈들이 그 정도 정보는 알고 있겠지?'
'알루드 카렉 지역의 군벌령이 당신에게 흡수되었다는 것과 당신이 요새를 건설하고 있던 정보라면, 그렇습니다.'
라닐 레펜이 답하자 케이운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유도하자. 나도 일단 꽤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쪽으로 가겠지만, 나와 중간에 만나자고.'
'유도라니, 뭐로?'
'내 '연인'인 카니스가, 내 시설에서 중요한 걸 가지고 옮긴다.'
카니스가 그 말의 겉뜻을 이해할 때까지 대충 2초가 걸렸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나서야 그 속뜻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먼저 터져 나와야 했다.
'뭐······ 뭔데 갑자기!'
카니스는 진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속뜻을 조금 늦게 완전히 이해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는 걸 봤다는 표정들이 되었다.
'그, 대장? 좀 뜬금없지 않아?'
데인스가 바로 호들갑을 피웠다.
'병상에서 일어난 걸 평생 이토록 감사해 본 적이 없어요. 실로 여신님의 인도네요.'
오피아는 즐거워 입이 귓가에 걸렸다.
'······무슨 소리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제 남편도······'
왜인지 라닐 레펜이 생기가 감도는 얼굴로 회상에 들어가려 했다.
'조, 조용히! 조용히!'
케이운 역시 당황해서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를 높였다. 다시 찾아온 정적.
'······우와, 선배님, 선배님 남자가 지금 얼굴 빨개져서 상황을 정리하겠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어요!'
하지만 오피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 닥쳐 오피아! 저건 다른 뜻이니까!'
카니스는 케이운의 진짜 말뜻을 드디어 이해했다.
'채윤. 너 왜 노인네 끌고 와서 여자랑 꽁냥거리고 자빠졌냐. 죽을 날 멀지 않았으니 확 죽으라고? 쿨럭!'
'아 좀, 조용히!'
케이운이 기어코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단말 신전 내부는 엉망이 된 분위기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케이운이 억지에 가깝게 외쳐 말을 이었다.
'앞쪽은 소문으로 퍼뜨리고, 뒤쪽이 중요해! 이쪽으로 카니스가 옮겨!'
'옮기라는 건 어떤······ 거야? 중앙? 아니면 보조?'
카니스는 상황이 더 엉망이 되기 전에 재빨리 호응했다.
'보조. 중앙은 아직 안 돼.'
케이운 역시 바로 답했다.
***
중요한 정보도 있어 회의가 살짝 길어졌지만, 계획은 실행되었다.
흘려진 루머는 두 가지.
엉뚱하게도 신전 기사 카니스가 케이운이라는 배후 실력자의 연인이라는 것과, 케이운이 그녀에게 뭔가 커다란 것을 맡겼다는 이야기였다.
적극적으로 관련 이야기를 모색하던 검은 용은 당연히 이 소식을 물었다. 어딘가 직접적으로 함정처럼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회적으로 쓸만한 정보.
케이운의 약점을 노출한 것 같은 이야기.
일반적인 상식을 기반으로 볼 때, 케이운에게 그런 이야기가 돌았을 때의 이득은 보이지 않는다. 카니스가 연인이라는 게 거짓말이면 어쩔 건데.
특히 아주 상식적인 판단, 설마 케이운이 차라리 검은 용에게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할 리는 없다는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다면 정말로 의심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건 진짜 함정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과도하게 큰, 정말 문명 지대 전체와 싸워 이길 것처럼 굴고 있는 남자가 나만 믿으라고 떵떵거리며 한 함정.
카니스도 남자다운 남자라는 건 좋다고 생각했다. 케이운은 시종일관 그 남성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그가 자기 입으로 말하는 능력도 충분히 보였다.
그러니 꽤 괜찮았다. 그녀도 왠지 생각이 없지도 않았고.
하지만, 정작 나중에 식고 나서 생각해 보면 이용되는 느낌이 강했다.
그건 그, 고백인지 작전 계획인지 모를 곳에 있던 여성진들이 꺅꺅거려 놓고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라 생각해 보면······ 그거 왠지 로맨틱 한 게 아니라······' 하는 공감대를 만들기 딱 좋았다.
"거기 서라!"
그나마 작전은 잘 작동하는 것 같았다.
케이운의 연인 카니스는, 케이운에게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고 있다. 검은 용은 그걸 무시하고 괜히 복잡한 지하 시설 같은 걸 뒤질 시간은 없다.
그들은 카니스를 쫓아야 한다. 그녀가 가진 뭔가, C-24를 방해한 그것을 막아야 한다.
"카니스으으으!"
메이브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처절함, 원수가 보이는 행동이 그녀의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용당한 기분을 달래준다.
달려가다 뒤를 힐끗 보고 메이브를 바라본다. 카니스는 그냥 도망만 치면 안 된다. 여기서 그들에게 신빙성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테면, 적극적으로 이 시설에 가두려는 듯한 움직임을 취한다든가.
콰앙!
설치해둔 폭약이 그들과 카니스의 사이에서 터졌다. 케이운이 그동안 노예에서 해방하며 일 시킨 노역자들이 파헤친 미로가, 계획된 방식에 따라 망가지고, 무너졌다.
못 나오도록 막지는 않는다. 그들은 결국 이 '요새'의 너무 깊숙한 곳까지 파헤치기보다는 바깥으로 나가려 할 것이고, 나가기 적합한 길들이 그들을 유도할 것이다.
"바깥에 얼마나 있지?"
[4명.]
메이브는 전원을 모조리 요 좁은 곳 내부에 넣지 않았다. 도망친다면 그걸 잡고 지연시키고, 바깥에서 증원이 오는 것을 망볼 인원은 남겼다.
하지만 그 숫자면 카니스를 잡을 수는 없다.
바람의 길을 만든다. 그녀가 배워왔던 요령에 따라, 깔때기 형태로 퍼져나가다 끝에서 한번 돌며 되먹임을 할 수 있는 형상.
그녀가 잡을 수 있는 공간에 볼텍스 캐논(Vortex Cannon)의 형태로 만들어진 바람의 흐름이 전방에 생긴다. 그 사이로 충격적인 바람을 넣어 카니스 등 뒤를 민다.
팡!
확산하지 않고 고리 형태로 회전과 함께 전방으로 쭉 뻗는 바람이 카니스의 등 뒤를 다시 민다. 적절한 타이밍에 폴짝 뛴 카니스는 긴 스텝으로 순식간에 가속하며 출구를 향해 달린다.
팡!
두 번째 가속이 들어가고, 아직 최고 속도에 도달하지 않았던 그녀의 등 뒤를 다시 한번 민다. 원래라면 사람 하나를 밀기 힘들 바람이지만 그녀는 가볍고, 그녀 앞의 기압은 낮아진 상태다.
마찰도 중량도 작은 그녀가 강렬하게 집중된 바람의 추진력으로 밀리며 전진하다.
사람 같지 않은 속도로 뛰쳐나간 그녀의 옆으로 4명의 발톱이 지나갔다. 그들은 조금 느리게 카니스를 확인하고, 따라 뛰기 시작했다.
지시받지 않아도 알았겠지. 그녀는 어딘가 도망가고 있다. 그들의 적이 도망가고 있다. 도망가는 적은, 가능하다면 쫓아가서 죽여야 한다.
하지만 늦었다.
저 지하에 처박은 C-24들이라면 모를까, 그냥 웬만한 능력자들로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적어도 단거리에서는 무리다.
발사된 쇠뇌가 그녀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오지만, 그녀의 몸 주변에는 언제나 기류가 돌고 있다. 정확하게 방패의 기능은 아니더라도, 멀리서 발사되어 운동 에너지가 적당히 떨어진 발사체를 흔들 정도는 된다.
그들이 해 줘야 할 일은, '그녀가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저쪽으로 뛰던데요?' 하는 정보를 그들의 본대에 알려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미끼를 물려고 쫓아올 것이다.
여기서 버린 게 얼만데, 이대로 놓치려고? 대체 뭐를 케이운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는지 모르잖아? C-24의 해킹 시도도 한 건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자, 어서 쫓아오렴."
[나는 이제 생각이 어렵다. 카니스 말만 따르겠다.]
"괜찮아 뮤리데. 안에서 쉬고 있으렴. 먹을 것도 넣어 놨으니까, 속도에 적응하면 움직이는 도중에도 먹을 수 있을 거야."
뮤리데와 대화하면서 카니스는 집중했다.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부글거리는 느낌을 완전히 재울 수는 없지만, 카니스는 그가 감히 이 조강지처를 버리지 못하리라는 것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정말로 이렇게 써먹으면서 그녀를 버린다든가 하는 짓 한다면 카니스가 찔러도 그는 양심상 얌전히 찔려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실컷 부려 먹힌 카니스에게는 그런 권리 정도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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