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뭔가 깨달은 것 같다, 라고 생각했다.
쿨란 부족의 제의에 승락을 표하고 회담이 열리기 전에 중앙대륙으로 출발해 정세를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아직 인원이 확정되지 않아 모두가 들뜨고 흥분해 있는 사이.
랑이는 혼자 골똘히 생각중이었다.
“..이거 뭔가 될 것 같아.”
자신의 상태창에 있는 정령력.
본체가 나무이니 우선 땅과 관련된 것에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지구에서 봤던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능력을 키우게끔 하던데.
마릴족 거처의 땅을 파헤치고 조물조물하며 여러가지 시험을 해보는 중이다.
“..자, 느껴보는거다! 츠아아압!”
방향은 맞았는데 첫 단추를 끼우지를 못하는 느낌이다.
왜, 왜 잡아채질 못하는거니, 나 자신.
수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름 : 랑이
클래스 : 미정
진명 : 〼〼
능력치 : 근력(3) 체력(2) 민첩(3) 마력(10) 행운(10)
고유 특성 : 관찰력[C]
잠재 능력 : 정령력[A]
〼〼
근력과 체력이 무려 +1 올라간 것이다.
너무나도 낮은 숫자에 충격받고 매일 아침 운동을 한 보람이 있었다.
비록 마릴족의 지나친 친절함에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과하게 움직여 좀 힘들었지만.
효과가 눈앞에 보이니 불평을 할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나는 전사쪽은 아냐. 관찰력은 뭔지 모르겠고. 정령력. 저걸 파야해.”
문제는 정령력을 어떻게 쓰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
“..땅아, 움직여라! 똥개!”
되는대로 지껄이고 힘을 주려해봐도 배만 아프다.
“에잉, 알 것 같기는 뭐가..”
땅에 발을 한번 걷어찬 후 한숨을 쉬며 랑이가 떠난 자리.
새싹 하나가 퐁-하는 소리를 내며 솟아 오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히 상태창에 적응해갔다.
마릴족 내에서도 어느정도 서로 정보가 공유되었다.
원래 체력이 약한 이들은 몸을 쓰는 일에 더욱 열중했고, 머리가 좋았던 이들은 각자의 특기를 살리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의외로 모두가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지. 게임은 생각보다 친절하지 않거든.”
랑이는 그 모든 것을 단순하게만 볼수가 없었다.
그 눈동자의 의미가 어떠했든, 신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다.
곧 시련이 올거다.
그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은 정상으로 오를 것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할 것이다.
그러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힘을 키워놔야 하는데.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제자리 걸음인걸까..”
인간이 되고나니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즐거웠던 것도 잠시. 각종 생리활동과 익숙치 않은 몸은 조바심을 부채질했다.
“..그렇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너무 행복해.”
잠을 자고 난 후의 만족감.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의 황홀함.
몸을 격하게 움직이고 난 후의 개운함과 성취감.
그 모든 것이 불편함을 덮고도 남았다.
“이 것이 필멸자들의 생이구나. 왜 ‘한'님이 인간을 그리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아.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또 그 소리야?”
“왔어?”
어느새 다가온 희와 자연스럽게 등을 대고 앉는다.
서로의 심장고동을 느끼며 오늘도 함께다.
“누가 될 것 같아, 사절단은?”
“몰라. 하지만 난 당연히 갈거야.”
“..그 자신감의 근원은?”
“안되면 되게 할거야. 너도 꼭 같이 가는거야, 랑랑.”
“..그래.”
늘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지.
고집쟁이 딸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지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아마도 최고의 전사들로 이미 추리고 있을 테지.
참 사랑스러운 부녀다.
남 걱정할때가 아니다.
난 고아나 다름 없으니 자수성가해야한단 말이다.
복잡한 심경으로 해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모래 사이로 자그마한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어른어른하게 보이는 것이, 혹시 잘못본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눈을 크게 떠본다.
땅딸막한 체형에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수염이 난 노인같은..
“..어? 난쟁이?”
랑이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에 난쟁이가 화들짝 놀라는듯하며 사라져버렸다.
“..희. 혹시 너도 봤어? 저거 귀신이야?”
“아무것도 없는데? 뭐를 본거야?”
“난쟁이같은게 저기서 지금 걸어가고 있었는데, 못봤어?”
“엥? 난쟁이? 무슨소리야, 정령도 헛것을 봐?”
“그러게.. 뭐였지..”
정령이 인간이 된건 처음이라 제자신이 정상인지 아닌지도 알수가 없다.
느낌상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는데.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아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와아아악! 아 진짜! 귀신이든 뭐든 내 앞에 나타나라고! 내가 귀신따위 무서워할 것 같아?!!”
랑이가 그동안 쌓인 분노를 탈탈 털어내어 괴성을 지르는 순간.
모래 사이에서 난쟁이가 다시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랑이에게 삿대질을 하는 난쟁이를 보며 랑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번개같이 낚아챘다.
“...감히 이 몸을 잡은건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처자야!”
“하. 진짜였네. 혹시 그대는 대지의 정령인가? 느껴지는게 그러한데.”
“안다면 예의를 갖추거라, 꼬마야!”
“아니, 꼬마라니? 나 이래뵈도 귀한 몸이신데?”
“귀하고 말고 내가 너보다 갑절은 더 살았느니라!”
“아..그러네. 미안해요, 할아범.”
랑이의 대꾸를 들은 난쟁이의 얼굴은 거의 거품을 물고 기절하려는 것 같았다.
짙은 다갈색의 피부를 가진 난쟁이는 온몸이 붉게 변했다.
“워워. 미안해. 내가 좀 배운게 없어서. 다른 정령들은 어떻게 대하는지 몰라. 가르쳐줄래?”
“흠흠.”
수그러들은 랑이의 대답을 듣고 간신히 진정하는 듯 하는 난쟁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휴우. 그래, 어린 정령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나. ‘수'님의 아이로구나. 인간에게서 요상한 기운이 느껴져 와봤다.”
“할아범의 이름은 뭐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모든 것은 이름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나는 대지의 정령, 란드.”
촉이 왔다. 저건 본명이 아닌 닉네임 정도 되는 거다.
아직 나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는 뜻.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목표했던 바는 이루었다.
- 최초로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 업적을 계산중입니다..
- 타이틀 ‘정령의 친구'가 부여됩니다.
- 최초로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 업적을 계산중입니다..
- 타이틀 ‘앞서가는 자' 가 부여됩니다.
이름 : 랑이
클래스 : 미정
진명 : 〼〼
타이틀 : 정령의 친구, 앞서가는 자
능력치 : 근력(3) 체력(2) 민첩(3) 마력(10) 행운(10)
고유 특성 : 관찰력[C]
잠재 능력 : 정령력[A]
〼〼
스킬 : 정령 소환(대지) [C]
스킬이 추가로 생겼다. 덤으로 타이틀도.
이제 앞으로 이 할아범을 소환할수 있게 된 것 같다.
아무튼 다 잘 된것 같다.
“...이, 이게 무슨?”
“미안, 할아범. 이제 할아범은 나한테 종속된 것 같아.”
“(@#^%(@#$(@#$”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한참 내뱉던 란드는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인간이 아닌게 다행인건가. 날 그만 쉬게 해다오. 머리가 아파.”
“그 마음 알것 같아. 난 앞으로 할아범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종종 불러도 될까?”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지 모르겠군. 너와 난 이제 연결되었다. 지켜보겠다, 그대의 자격이 되는지.”
“고마워. 이제 들어가서 쉬어.”
자격이라. 저 말이 왠지 중요한 단서인것 같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냐에 모든 것이 달려있나보다.
“랑랑. 누구랑 말한거야? 괜찮아?”
문득 정신을 차리자 옆에서 미친사람을 본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희가 있다.
“..그래. 너한텐 안보였나 보구나. 나중엔 실체화도 할 수 있겠지.”
“..으응. 괜찮은거 맞지?”
“난 괜찮아. 그렇게 전염병 대하듯 하지 말아줄래? 상처받을 것 같은데.”
“미안! 헤헤헤헤헤..”
어쨌든 이로서 한걸음 나아갔다.
뛰어난 인간들 중엔 이미 앞서가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더 분발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랑이가 우려한 앞서가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지슈였다.
물의 신 에페의 후예로 마릴족은 기본적인 치유력을 갖는다.
그 중 대신관급인 지슈는 그들 중에서도 본래 신성력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석상을 확인하고 돌아온 후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아내를 찾았을때 그는 깨달았다.
“..스킬이라.”
시대가 바뀌려는 이 시점에도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내가 안쓰러워서.
그래서 그녀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은 것 뿐인데.
스킬이라는 것이 상태창에 추가됐다.
그 다음부터는 느껴지는대로 행했다.
- 최초로 스킬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 업적을 계산중입니다..
- 타이틀 ‘첫 걸음을 내딛은자' 가 부여됩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상태창에 쓰여진 것 처럼 신성력을 통한 방어 계통 인것 같다.
한 부족을 이끌고 보호하는 족장에게 딱 들어맞는 능력이 아닌가.
“..쉴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몸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반투명한 구체가 형성된다.
시험을 더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어느정도의 물리적에 대한 방어는 가능한 것 같다.
마법이나 다른 종류의 공격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만약 모두가 이런 식의 능력을 얻는다면 그것을 얼마나 빨리, 잘 개화시키느냐가 관건이 되리라.
회담에 앞서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 같아서 적잖이 안심이 됐다.
그 스킬이 정작 아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상심했지만.
“..그러나 누가 어떤 스킬을 얻을지 알수가 있는가.”
마릴족의 공주님, 희는 분명 자신이 가야한다고 떼를 쓸것이다.
최대한 말려볼 생각이었으나 솔직히 끝까지 막을 자신이 없었다.
고집 하나 만큼은 세계 최강인 어여쁜 따님이시니.
그러니 할수 있는건 그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인원을 함께 보내는 것.
또한, 그 아이를 최대한 준비시키는 것.
좀 낙천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지 어릴때부터 총명했던 아이다.
세계수의 분신이신 랑님도 그 아이의 곁에 머물고 계시지 않은가.
아마 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으니. 어디까지 아비인 제가 지켜줄 수 있을지 그것이 두려웠다.
“..에페시여. 부디 그 아이를 지켜주소서.”
신과의 연결이 끊긴 마당에 신이 제 기도를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할수 있는건 기도 뿐이다.
“..려. 나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오늘도 아내의 곁에서 그녀의 온기를 확인하며 약한 마음을 다 털어낸다.
이 방을 나서는 순간, 흔들림 없는 수장의 모습이 되어야 하기에.
지슈가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건 그의 아내, 려의 앞에서 뿐이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그가 방을 나섰다.
“오늘 회담에 참석할 인원을 확정한다. 저녁에 방어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두를 불러 모으도록.”
완벽은 없다. 최선만이 있을 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다.
마릴족의 전통대로 중요한 것을 정하는 자리에 빠질수 없는 각종 진미가 준비되었다.
급격하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는 별개로 모두는 즐겁게 먹고 마셨다.
음식은 모자람없이 넘치도록 준비되었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만큼은 술이 제외되었다.
흥이 넘쳐흘러 벌써부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들이 나왔고, 족장인 지슈마저 그 모든 것을 즐기며 마음껏 먹고 마셨다.
어느정도 모두의 배가 불렀을때, 지슈가 잔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본격적인 부족 회의의 시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쿨란 부족에서 회담을 요청해왔다.
족장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마릴족 홀로 현재 벌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파악하고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여, 마릴족의 대표로 회담에 참석할 이들을 정하고자 한다.
우리 부족을 대표할 이들이기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추천하고 싶은 이가 있으면 발언하라.”
마릴족은 기본적으로 사명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규율이 엄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족장이라고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저 중대사에 결정을 하는 이, 그리고 큰 방향을 잡아주는 일 정도의 역할을 했다.
회의를 할때면 각자의 의견 또한 자유롭게 꺼낼 수 있었다.
지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이름들이 나왔으나 대부분이 중복되었다.
감추는 것 없이 늘 소통하는 부족의 특성상 모두가 느끼는 바가 비슷했던 것이다.
“좋다. 얼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군.
거론된 이름들이 10명 정도이니, 5명 정도로 추리겠다.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뭘 물어봐요, 족장님 마음대로 하셔요~.”
“맞아 맞아, 왜 자기 일을 떠넘기고 그래요?”
온갖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럴줄 알았다는 듯 지슈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오늘 자정이 가기 전 최종 명단을 확정할테니, 준비하도록. 출발은 내일이다.”
<한걸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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