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식>

“......”
“받아들이겠는가.”
“그렇게 하겠소.”
비장한 눈빛으로 마릴족 전사의 리더가 답을 한다.
답을 하자마자 양쪽 팔을 조심스레 잡힌 후 어딘가로 안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대들은?”
랑이와 희는 서로를 쳐다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이야 있겠는가 싶기도 했다.
무섭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 묘한 감정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의아하게도 일행들은 각각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이동하며 보니 물웅덩이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한 웅덩이에 한사람씩 안내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다짜고짜 랑이의 양팔을 잡고 물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마릴족과 랑이로서는 딱히 겁날 이유는 없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겁할만했다.
직접 들어와 본 물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투명했다.
“..물안에 들어온 것이 맞는건가?”
분명히 온몸의 감각은 물에 잠긴 것이 확실한데, 눈으로는 그 사실을 인식할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과 이 모든 것이 접혀진다고 느꼈을때.
랑이를 안내하던 이들은 랑이의 머리를 살짝 눌러 물 속에 푹 잠기도록 유도했다.
오랜 시간을 마릴족과 함께 바다에서 살아온 랑이었지만.
이건 특별했다.
차가운 물의 온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때 보이는 것은 양쪽에서 안내하던 그들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것은 바로 나 자신.
새하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녹색눈을 가진 랑이 자신이었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척 생소한 경험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인간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과, 인간이 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동경해왔던 그 대상이 되었다는 기쁨에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볼 겨를이 없었다.
타인의 시선이 되어 스스로를 보는 기분이란.
‘..괜찮은걸까?’
스스로를 제대로 직시하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동안 애써 덮어왔던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인간이 된건 좋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수는 있는걸까?
그 질문을 수면위로 띄우는 순간.
투명하게 일렁이던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
분명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 주체가 순식간에 바뀐듯 시야가 바뀐다.
사방이 너무 흔들려 제대로 서있을 수 조차 없게 되니 문득 겁이 났다.
“..저기? 이게 의식이라면 이제 그만 꺼내주면 안될까요?”
입밖으로 무의미한 질문을 던져본다.
다시 찾게 된 온몸이 주는 감각으로 보건대.
이 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현실과 전혀 다른 시공간.
아무래도 고대에 사용되던 유물로 정화의식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이유로 이 것이 의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사방이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수로 돌아왔다.
마릴족과 오래 있어서일까, 아늑하게 느껴지는 물에서 빠져나오자 이 곳까지 안내해주었던 이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게 보인다.
“..저게 다야?”
“뭐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강심장인가? 안그렇게 생겼는데..”
“마릴족들은 다 이러네. 영 싱겁다구.”
들려오는 대화로 봐서는 갑작스레 돌아온 물안에서 패닉이라도 하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물에서 의식을 해준건 마릴족에게 천운이었다구.
“..그런데 저 여자. 하얀 머리잖아.”
“맞아. 마릴족에서도 혹시 하얀 머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쿨란 족에서는 한 시대에 한사람만 하얀 머리를 타고 난다.
태어날 때부터 족장이 될 사람이 그렇게 정해지는 것이다.
본의아니게 랑이도 하얀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고, 아무래도 그들이 보기에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다들 어디에 있나요?”
들려온 대화로 볼때 랑이의 의식이 일찍 끝나지는 않은 듯 한데.
주변에 낯익은 이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정화의식이 오래 걸려 먼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오세요.”
어쨌든 그들이 원하는대로 시험이고 의식이고 다 해줬으니 위험은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지켜보던 시선.
그 시선의 주인공이 하얀 머리를 휘날리며 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시리의 후예가 설마 왈가닥..?”
그러고 보니 자신의 현재 모습이 시리를 닮았다.
갈색 피부에 하얀 머리카락, 연두색 눈동자를 했던, 숲의 향기를 풍겼던 그.
말수는 없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생각이 깊었다.
왠지 옛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감상적이 된다.
쿨란 족의 마을은 짐작했던 대로 였다.
자연을 최대한 해치지 않고 마른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움막들.
화려한 장신구들을 걸친 부족민들.
전반적으로 어두운 갈색 피부에 다양한 색의 머리카락들.
엘과 만나며 각성하기 전까지, 랑이는 이들 부족의 보물이었다.
세계수와 가까이에서 소중히 모시며 ‘수'와 교감할때 랑이는 그 곁에 늘 함께였다.
마족들이 결계를 건드리며 깨지기 전까지는.
찾아온 엘을 만나고 각성되기 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마치 긴 잠을 자며 잠에 취해있었던 듯, 드문 드문 그런 일이 있었나 정도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인 세계수, 태초의 나무인 ‘수'에게서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랑이었지만, 인간사에 대해서 만큼은 무지할 수 밖에 없었다.
마릴족은 나름대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개중에 가장 큰 움막 두개를 배정받았고, 휴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았다.
“랑랑! 왜이렇게 늦게 왔어!”
어느새 기운을 찾은 희가 바람같이 달려온다.
“내가 얼마나 늦은건데?”
“우린 이미 와서 간단히 배도 채우고 씻고 했다구.”
체감상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랑이에게 흐른 시간은 다른 이들과 달랐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어땠어?”
“뭐가?”
“어머니를 만난거 아냐?”
“..어머니?”
“어? 우린 전부 물속에서 세계수를 보고 왔는걸?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고는 했어.
원래는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든 결과를 보여주든 뭔가 있어야 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저 회색빛으로 변한 것 같은 세계수의 형상만 보고 끝났어.”
“..그랬구나.”
그래서였던 것 같다.
랑이 자신의 모습이 보였던 것은.
“..나도 어머니를 보고 싶었는데.”
“..어? 어! 미안해! 아니 난 울릴 생각이.. 괜찮아?”
뺨에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이었구나.
인간은 이럴때 눈물을 흘리는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희가 양팔을 크게 벌려 안아준다.
“..울지마, 랑. 울지마..”
울지말라는 희가 오히려 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한 둘은 한껏 울어재끼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랑랑, 배고프지? 먹을 것 갖다줄게.”
“고마워.”
마음껏 울고나니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개운하다.
인간이란 참 신기한 종족이다. 몸과 마음의 상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불완전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것 같은 매력이 있다.
자신이 희를 돌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서로 기대고 있었구나 싶다.
“큰소리를 땅땅 치고 왔는데. 면목이 없네.”
마릴족 모두가 있는데서 그러지 않았던가.
희를 잘 돌보겠다고.
진정하고 나니 상당히 멋쩍어진다.
얼마동안 쉬는 시간을 가진 후 모두 회관이라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부족차원에서의 회의가 있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할때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거대한 움막 안에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이곳 저곳에 장식하기를 좋아하는 마릴족에 비하면 거의 텅 빈 수준이었다.
마릴족 전사들과 희 모두 내색은 안했지만 당황한 분위기다.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쿨란 부족은 뭔가 더 진지하고 경직된 분위기였다.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해 어느덧 공간이 다 찼을 무렵, 지슈와 비견될만한 덩치의 사내가 입장했다.
하얀 머리카락으로 보건데, 족장인 자레드가 분명했다.
덩치가 크다는 점에서는 지슈와 비슷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고압적인 인상마저 주고 있는 미간의 흉터와 각진 턱.
군살이 하나도 없는 근육질에 머리카락은 길게 땋아내렸다.
원래도 경직된 분위기였으나 자레드가 들어서는 순간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마치 군대같은 분위기인걸.’
당당하게 들어선 자레드가 주변을 둘러본다.
언뜻 보기엔 그저 훓는 것 같았지만.
분명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1초정도 더 머문 곳을 보자 단번에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카락이 보인다.
천장 사이로 한줄기 내려온 햇살이 닿는 부분은 마치 은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머리카락색 외에는 한구석도 닮은 데가 없지만.
부자지간인 것이 확실해보인다.
“찾았다, 날다람쥐.”
들었을까?
중얼거린 랑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선이 마주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가 튄 것 같다.
파지지직.
“..도도한 고양이었나?”
호리호리한 몸매에 진하게 올라간 눈매가 인상적이다.
소년인가, 소녀인가? 성별이 모호하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 입술을 씨익 올리자 미간에 주름이 진다.
“뭐야, 재밌잖아 이거.”
무거운 마음을 추스리며 찾아온 이 곳에서 길들이고 싶은 고양이를 찾았다.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주쳐오는 소년을 마주 보는 랑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쟨 뭔데 우릴 노려봐?”
단순한 희의 말에 더욱 더 눈빛에 힘이 들어가는 소년을 보며 랑이는 유쾌한 감정을 느꼈다.
‘강아지와 고양이라. 대.박.예.감.’
“우선, 먼길을 와준 마릴족에 감사를 표하는 바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우리의 우방이 되어주어 고맙군.”
자레드의 발언으로 둘의 대치는 중단되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한건 아니지만 고개를 까닥인 그의 몸짓에서 정중함이 묻어나왔다.
“실리아 제국, 세데아 제국과 대륙 연합에 회담을 제의했고, 아직 그들의 답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보길드 ‘란'에 의뢰를 해두었고 마침 1차 자료가 전달되었다. 변함없는 우애를 보여준 마릴족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 내용을 공유하겠다.”
말투로 보았을때, 아마도 강력한 무력으로 부족을 통솔하는 타입인듯 하다.
어쩌면 지금 같이 혼란한 시대에는 어울리는 지도자라고 할수도 있겠다.
보아하니 정작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사춘기인지 그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인지 두눈 가득 반항심이 가득해보인다.
“조사를 요청했던 부분은 첫째, 패치에 관한 것. 둘째, 요주 인물들의 능력치 및 정보. 마지막, 각 나라의 동향이다.”
아무래도 강대한 무력에 지력도 더해야 할 것 같다.
지슈처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하겠지만 어려운 시기를 타개해나갈 수 있을 위인이다.
세상에서 동떨어져 살아온 부족의 지도자 치고 정보의 중요성을 제법 잘 인지하고 있다.
랑이로서도 궁금했던 부분이므로 귀를 쫑긋하며 경청했다.
“답이 온 것은 둘째 요청에 대한 부분.”
두루마리를 뒤적이며 뜸을 들인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실리아 제국의 황태자 ‘바하'가 가장 높은 능력치를 보유했다고 한다.
행운을 제외한 수치들이 10에 가깝다고 알려졌으며 검증되지 않은 소문으로는 제법 강력한 스킬 또한 보유했다고 적혀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신성력을 가졌다고 확인된 바, 아무래도 신성력과 관련있는 스킬일 것이라는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
아무래도 엘과 아렌의 피가 강하게 흐르는 이가 나타난 것 같다.
“..한가지 흥미로운 소문이 적혀있는데.”
잠시 턱을 문지른 그는 말을 이었다.
“다소 신빙성이 없는 말이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왔다고 한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며 예언서에 적힌 내용들을 본인이 다 알고 있다고 한다는군.”
“..다른 세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랑이를 직시하며 자레드가 말을 잇는다.
“그렇다. ‘지구'라는 곳에서 왔다고 한다는군.”
들릴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쿵.
<정화의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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