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엘의 기억에서 본 적이 있다.
지구라는 차원에서는 판타지니 무협이니 오로지 상상만으로 적힌 소설들이 인기를 제법 끌었다.
그 중 한때 주류가 되었던 소재가 차원이동, 회귀 그리고 빙의였다는 것.
지구라는 이름을 듣지 않았다면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은 관심종자의 말이라고 치부할테지만.
우연으로라도 그 이름이 거론될리가 없지 않은가.
엘의 기억속에서 지구라는 차원을 엿본 것 처럼, 혹시 그 곳에서도 이곳을 엿볼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더이상 자신이 가진 정보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실망감.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다는 갈망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예언서라니, 그것도 다른 세상에서?”
“그런게 있다면 이 땅 어딘가에 있어야지, 무슨 다른 세상이야?”
“마계나 천계 이런 곳에서 온건가? 그런데 지구라니?”
“이제 외계인까지 등장인가? 말세네.”
“아니, 다른 것보다..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자레드의 말이 끝난 직후 고요하던 회당은 웅성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조용.”
잠시 모두가 진정하길 기다린 그는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용이 있긴한데. 이 내용을 믿을 수 있는가를 떠나서, 굳이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사실이든 거짓이든 시작점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럼 그 사람을 데려와서 사실 확인을 하겠다는 건가요?”
그 모든걸 고요한 눈으로 보고 있던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소년의 이름은 할리. 머리카락 색으로 보건데 차기 쿨란 족장이다.
“데려올 필요는 없지. 회담이 성사되면 아마도 장소는 중앙대륙이 될 것이다.
그때 정보길드를 통해 접선한다.”
“......”
생각에 잠긴 얼굴인 할리의 주변에서 조심스러운 의견들이 오간다.
혼란스러움이 컸지만 주로 그 내용이 빨리 알고 싶다거나 역시 자레드가 현명했다는 내용이었다.
랑이도 내심 동감했다.
지슈는 현명한 리더지만 모두를 품고 가기에 아무래도 결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고.
자레드는 소신대로 밀어붙이니 반감은 살 수 있어도 결정과 실행에 걸리는 시간이 짧았다.
그 조금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마치 칼과 방패를 보는 것 같다.
그때였다.
또 한번의 격변이 일어난 것은.
- 1차 던전이 오픈됩니다!
- 게이트가 무작위로 열립니다.
- 게이트는 던전을 공략하기 전에는 닫히지 않습니다.
올 것이 왔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란드를 소환했다.
원래라면 소환된 후 한마디씩 하는 란드지만 그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랑이의 옆에서 조용히 사방을 주시한다.
“..던전? 그게 뭐지?”
“뭐가 열리고 닫힌다고?”
오랜만에 보인 시스템 메세지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인 반응들을 보인다.
랑이는 회당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차피 당할거라면 눈뜨고 당하는 것이 낫다.
살길은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을의 한켠에 형성되고 있는 검은색의 형체가 보인다.
인근 지역에 B급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주변 5미터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게이트 안으로 이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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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시스템 메세지가 친절해졌다고 느꼈는데, 그 내용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경고 후 5초만에 이동이라니.
대피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차피 끌려 갈거,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가라는 건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이동된 곳은 사방이 어두웠다.
어느정도 어둠이 눈에 익은 후 눈에 들어온 주변은 커다란 굴의 내부 같아 보인다.
“..땅굴 던전이라니.”
“대지의 정령과 함께 땅굴 던전이라니. 운이 좋군.”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행운 수치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었나봐.”
랑이가 회당에서 나온 순간 이동이 되어서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5미터라. 상당히 애매한 거리이다.
과연 누가 이동되었는지 짐작이 잘 되지 않는다.
“..이거 설마 벌레가 나오는 던전이야?”
“벌레만 동굴을 파는건 아니지.”
아무리 벌레와 공존할 수 밖에 없는 나무 출신이라지만.
나름대로 상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각 나무마다 이롭고 해로운 곤충이 따로 있는 것이다.
‘..흰개미만 아니면 돼.’
나무를 갉아먹는 개미다.
감히 세계수를 해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나무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오래 들어왔다.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법칙이겠지만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꺼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비록 자신은 나무 자체가 아닌 정령체라고 하더라도.
“란드, 이 땅굴의 주인이 누군지 알수 있어?”
“..이 공간은 아무래도 단절된 세계인 것 같다. 이질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군.
뱀일 가능성이 높지만 흙에서 나는 냄새가 수상하다.”
“..어떻게 수상한데?”
“배설물이 있다. 파충류의 것이 아닌.”
귀에 들리는 단어들이 그냥 전부 불길하다.
어쨌든 이 던전은 B급. 그리고 자신의 능력도 나름 B급.
어쨌든 같은 급이지 않은가.
해볼만 할거라고 믿는 수 밖에.
“..언제까지나 여기서 있을수는 없으니 전진해야겠지.”
“그러는게 현명하겠지. 걱정말아라. 정령술의 기초는 믿음 아니겠는가.”
“..역시 츤데레. 그럼 정령술 연습을 실전에서 한다고 생각해야지.”
“내가 힘을 마음껏 쓰게 해준다면야.”
두려움이 오기가 되어버렸다.
그 힘, 내가 한계까지 끌어다 써주지.
대지의 정령과 함께하는 땅굴이라. 생각해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러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디뎠다.
뱀이라는 단어를 들어서인지, 왠지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냄새 같기도 하고, 비늘냄새 같기도 한.
이 공간을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게 만든다.
“..란드. 혹시 냄새도 맡을 수 있어?”
“시비거는 것이냐?”
“그런게 아니라. 혹시 비린내 나지 않아?”
“눈치챘군. 맞다. 그래서 뱀이라고 했었지. 간혹 이런 땅굴을 깊게 파놓고 사냥감을 낚아채 들어와 천천히 녹여먹는 뱀이 있거든.”
“..성격이 엄청 나쁜 뱀인가 보네. 그런데.. 비늘 냄새 인게 맞지?”
“..그것까지 눈치챘구나.”
“정말로 피냄새도 나는거라구?”
“아무래도 이 땅굴의 주인은 호전적인 성격인 것 같군.”
“......”
더 이상 물어보기가 무서워졌다.
아는 이의 이름이 나올까봐.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는 이들은 아닐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걸 어떻게 알아?”
“회당은 5미터 밖에 있었으니까.”
대지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거리 개념이 확실한가 보다.
모두가 이동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긴한데.
그렇다면 주 전력이 모두 회당안에 남아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 씨가 된다고 목숨을 건 실전을 하게 생겼다.
느낌탓인지 뭔지 아까부터 기묘한 소리마저 들려오고 있다.
스으윽-.
사아악-.
땅굴을 파고 사는 생물은 진동으로 상대의 위치를 안다고 했었지.
“..란드. 제가 움직이는 동안의 진동을 가려줄 수 있어?”
“그러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은 란드가 고개를 끄덕여준다.
란드는 처음부터 뭔가를 알려주는 법이 없다.
어쨌든 내가 주체가 되어 풀어가야 한다는 뜻이겠지.
가끔은 야속하게도 느껴지지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하게 방어해줘.”
이번엔 대답도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잠시 바뀌며 내 몸 주변으로 무언가가 씌워졌다.
“..방어막 같은건가?”
“감이 좋구나. 하긴 태생이 다르니.”
어느샌가 피워 물은 연초를 입에 문채로 우물우물 대답해온다.
연초에서 나는 풀냄새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이끼?”
벽에서 뭔가가 느껴질까 싶어 짚으며 가는데 표면이 미끌거린다.
“이끼는 아니다.”
이끼 다음으로 생각나건 달팽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꼭 이런 미끌거리는게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양이 많다.
“간섭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더이상 만지지 않는게 좋겠다.”
간섭이라.
그동안 보여준 그의 태도는 무심함이 아니라 정중함이었나 보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독이네.”
“독 자체라기보단 그런 성분이 포함된 점액 같군.”
그와 동시에 멀지 않은 앞쪽에서 미세하게 동굴의 폭이 넓어진다.
조심스럽게 벽을 끼고 돌아가며 눈앞에 거대한 공터가 나왔다.
벽의 천장과 위 아래에 빼곡히 달린 반투명한 계란형 주머니들이 보인다.
어떤 생명체의 것인지 모를 알 이었다.
언뜻 봐도 수십개는 되어 보이는데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고, 겉은 짙은 녹색의 핏줄같은게 살짝 비춘다.
크기가 어느정도 큰 알은 심지어 조금씩 움직이기도 하며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뭇한 형체가 보인다.
이곳까지 오면서 줄곧 보스몹 하나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리를 지어 사는 건 아닐거라고 지레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충격으로 잠시 멈칫해있는 사이, 그중 가장 크기가 컸던 알 하나의 표면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던전이 공략되려면 이 모든 알을 죽여야 하는걸까.
아직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무수한 생명체를 없애는 것이 맞나, 마음이 복잡해진다.
‘일단은 어떤 종류의 몹인지 보자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순간, 생명이 탄생했다.
결과적으로 란드의 발언은 반은 맞았다.
아직 갓 태어난 새끼이지만 그 정체는 한번도 보지 못한 종류였으니까.
뱀처럼 긴 몸체에 등쪽으로 날카롭게 번뜩이는 비늘.
그러나 짧은 다리가 수십개가 달려있다.
얼굴부분이 가장 섬찟했다.
마치 사람처럼 생긴 얼굴에 입이 얼굴의 반 이상 정도로 컸고 그 안으로 뾰족하게 날카로운 이빨이 자리잡고 있다.
막 세상으로 나왔음에도 포식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온몸의 점액을 털어내던 새끼가 갑자기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한다.
끼에에에에엑!
꺄아아아아아악!
동물의 비명소리 같기도, 사람의 비명소리 같기도 한데 음역대가 높아 듣는 것 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알아듣지 못해도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겠다.
새끼가 어미를 부르는 소리였다.
“란드, 준비를.”
랑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 거대한 흙벽이 세워지고 곧이어 뭔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콰아앙!
랑이가 보지 못한 사이 뒤에서 어미가 오고 있었나 보다.
새끼는 랑이가 있는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기어오고 있고, 흙벽의 뒤 편에서는 굉음이 연이어 울려퍼진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진퇴양난이다.
“갓 태어난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라니. 난이도가 상당한데.”
그런 상황에 정체 모를 생명체들이 소환되어 왔으니.
어쨌든 대화로 풀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목숨이라도 내줄게 아니라면 이해심이나 동정심은 버려야 한다.
아마도 어미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갑작스레 감지되는 생명체들을 적이라 간주하고 죽였으리라.
흙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초조함마저 띄고 있는 것 같다.
<던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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