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세데아 제국에서 온 회신을 마지막으로 모두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회담 장소는 예상했던 대로 대륙 연합에서 정하고 주최까지 감당하기로 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아는 이유는 가장 안전해서 였다.
대륙 연합 자체의 내부 갈등으로 제대로 연합되지 못한 그들이 가장 만만했던 것이다.
세데아 제국과 실리아 제국도 나름대로의 체면을 지킬 수 있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회담을 주최하지 않아 돈이 굳는건 부수적인 효과겠지.”
할리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그정도는 예상하고 예상 지점에 인원을 풀어 대기중이다.
마침내 자신이 시작한 정보길드와 사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다.
“할리라고, 이름이? 차기 족장이라며?”
회담 성사가 이루어지자마자 쿨란족과 마릴족은 그대로 출발했다.
희는 내내 할리의 주변을 맴돌다 이제서야 말을 걸었다.
할리는 대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하던 생각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회담에 참석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준건 의외였다.
분명 이미 정해놓은대로 따르라며 윽박지를 줄 알았는데.
심지어 호위마저 단단히 붙여주지 않았던가.
‘감시의 목적이 더 크겠지만.’
“이봐!”
무시당한걸 확실히 깨달은 희가 할리의 팔을 낚아채려 접근했지만 할리의 옷깃조차 스칠 수가 없었다.
“무시하는거냐고, 지금?!”
푸른빛의 피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어진다.
마릴족에서 공주님처럼 자라온 희로서는 이런식으로 모욕을 당한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감히 자신을 무시하다니?
마릴족의 대표로 회담에 참가하는데 쿨란족에게 무시를 당했다.
어느새 생각이 가지를 쳐 드라마틱하게 뻗어가기 시작할때.
“무슨 용건이지?”
“날 무시한거냐고 물었어.”
옅은 청보라빛 눈동자에 제법 비장한 기운이 맴돈다.
‘이제 좀 대화가 되겠군.’
“..잡담을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이야?”
“소개를 하려면 정식으로 하고. 아니면 회담에 필요한 대화를 하는게 맞지 않을까? 놀러가는게 아닌데.”
“......”
푸른 빛의 피부가 눈동자를 거쳐 머리카락으로 색이 점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릴족의 공주님은 생각보다는 싹수가 있어 보였다.
바로 발끈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실은 랑이라는 저 여자를 도발하려고 건드려본건데.
아무 반응이 없다.
‘설마 역으로 읽힌걸까.’
나름대로 여러 사람들을 봐왔고 잘 읽어낸다고 생각했는데.
저 여자처럼 아무것도 읽혀지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다.
눈동자를 빼고 온통 새하얀 여자는 마치 백지같았다.
속도, 겉도.
“..그런데.”
“...?”
“마릴족에 하얀 피부라니. 일행이 맞나 싶은데.”
“일행 맞고. 마릴족 내부 사정 이니 신경 끄시지.”
미움받았나 본데.
반쯤 의도하긴 했지만 바로 반응해오는 걸 보니 역시나 단순하다.
마릴족의 공주가 감싸는 존재라.
저 둘은 평범한 또래의 친구 사이 같지가 않다.
공식적으로는 외사촌이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해도 어쩐지 수상하다.
도착할때까지 알아낸다, 정보길드 수장의 명예를 걸고.
일부러 험한 지형을 골라 정글을 빠져나갔다.
인간의 본성은 시련이 왔을때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결과적으로 시련이 찾아올 틈이 없었다.
그새 험한 정글에 익숙해진 마릴족의 전사들이 위험해지기도 전에 다 처리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희가 본인의 능력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할리는 애써 실망한 마음을 눌렀다.
이 세계에 닥친 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대표로 회담에 참여하는 일행이다.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할리의 속마음도 모른 채 희는 그새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랑랑, 나 너무 신나.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거잖아.”
“여행..이라기엔 좀 중요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렇다고 즐기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지.”
“..그말도 맞긴 하네.”
어쩌면 이런 희의 마음가짐이 가장 바람직한지도 모른다.
미리 걱정해봐야 벌어질 일은 벌어질테니.
여러모로 특별한 아이다.
할리가 보기엔 철이 없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주변을 환히 비추는 태양이 되어주고 있지 않은가.
정글을 벗어나며 어느정도 안면을 익힌 쿨란족 사람들마저 희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할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저들이 쿨란 부족의 마을로 진입했을때 부터였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데 확연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몸이 허해져 귀신이 들린 건가 싶어 무섭기도 했지만.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설마 귀신들린게 내가 아니라 저 여자..”
안그래도 생김새가 귀신스럽지 않은가.
혼잣말을 하는 것도 몇번 목격했다.
‘회담자리에 미친여자를 데려온다..’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할리는 결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해 몸이 고장난것 같아 밥을 우걱우걱 퍼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회담에 대한 불안이 스스로를 좀먹는 것 같다고 생각할때.
일행 뒷편의 수풀이 움직였다.
동시에 모두가 튕겨오르듯 전투태세를 취했다.
랑이와 희를 빼고.
정글을 막 벗어난 지점이다.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누구도 이 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쿨란족이 간혹 정찰을 했다고 한들 제대로 안다고 하긴 힘들다.
내색은 안해도 각자 한껏 긴장해있던 참이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이는 후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른쪽 손등에 감싸진 것은 시겔.
마력을 증폭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마법사.”
일행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마법사는 일행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두손을 서서히 들어올려 모두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때, 그는 두손을 활짝 펴서 공격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가까이 온 그가 머리쪽의 후드를 벗어내리자 소리 없는 경악이 모두를 휩쓸었다.
“..난.”
유명한 마탑의 수장.
주황색 눈동자에 남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린다.
소문대로 화려한 미인이다.
“..음? 제 이름을 아시는 분이 있으시군요? 뜻밖인데요.”
실수다.
할리는 당황함에 입술을 꺠물었다.
“보기 힘든 분들이 모여 계시길래 인사나 드릴까 합니다.”
어쩐지 목소리나 말투가 노래하는 듯한 울림을 가졌다.
경직된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는 살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식사를 나눠주셔도 좋습니다. 기꺼이 먹어드리죠.
제 이름은 난입니다.”
다행히 그는 모른척 넘어가주기로 한 것 같았다.
빌미가 잡힌 것 같다.
뻔뻔하게 합석을 청하는 그를 보며 일행은 일제히 할리를 바라봤다.
딱히 정해진 리더는 없었지만 그동안 길을 이끌었다보니 그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듯 했다.
“..이리로 앉으시죠.”
할리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름을 밝히며 합석을 청할때 거절하는 법을 알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마탑의 의중을 알 수 없던터라 이 기회에 무언가 알아냈으면 싶기도 했다.
마치 구름속을 걷듯 걷는 사내였다.
아니, 사내같기도 하고 여인같기도 했다.
큰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듯 했다.
가운데에 피워놓은 모닥불을 보며 잠시 아련한 눈빛을 하던 그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운치가 있네요. 그렇지 않은가요?”
마치 노래하듯 말을 잇는 그, 단 사람에게 일행은 모두 압도되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내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관조하던 랑이가 나선 것은.
“..노래를 잘 하실 것 같으신 인상이네요. 한 곡 청해도 될까요.”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나요?”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죠.”
잠시 고개를 기웃거리던 그가 이내 미소를 짓는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나는 분이시네요. 절 아실리가 없는 나이신데.”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으신가봐요. 보기보다.”
틀린 말을 한건 아닌데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를 느낀건지 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운다.
“..설마. 그럴리가. 그렇지만..”
난은 혼자 열심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랑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둘의 미묘한 대치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하는 와중 희가 입을 열었다.
“..화아. 정말 노래를 잘 하세요? 목소리가 너무 좋으세요! 혹시 음유시인이세요? 마법사같으신데..”
사실 랑이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기 전까지 일행은 마법사로 보이는 이에게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외모가 드러나는 순간 많이 누그러들긴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랑이의 요청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분위기가 바뀐 듯 했으니까.
“하하, 귀여운 숙녀분이시군요. 한때는 세상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그만두었지만.”
긍정의 말에 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법사라는 말인게요?”
내내 조용하던 마릴족의 전사 한명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느슨해지던 공기가 팽팽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네, 맞습니다.”
가벼운 긍정에 모두 침묵에 빠졌다.
마법사는 쉽게 볼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고, 인식이 아주 좋은 편도 아니다.
세상과 떨어져 살아온 마릴족과 쿨란족은 당연히 마법사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할리를 제외하고는.
‘브린을 볼때와 또 다른 느낌인데. 아무래도 평범한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
브린은 운좋게 본인의 재능을 발견한 경우였다.
보통은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거나,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어릴때 마법사가 납치해 간다는 소문이 많았다.
브린이 마법을 연습하는 걸 몇번 지켜봐서 대충 어떤 파동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에너지의 파동을 쉽게 알아차리는게 내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할리는 어릴때부터 타고난 감각이 달랐다.
그만큼 예민해서 키우는 이들은 학을 떼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이는 많지 않았다.
그저 할리가 교감하는 동물들의 폭이 유난히 넓다는 것 외에는.
“..마탑 소속이시겠군요.”
도박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어디까지 풀어줄지 기대하는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이지.’
“그렇습니다. 마탑에 대해 잘 아시나요?”
“마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마법사가 아닌 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요.”
다행히 그는 이런 질문들을 꺼리는 것 같지 않았다.
할리는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신중하기로 했다.
너무 깊이 나아갔다가는 쿨란족의 감시원들이 그대로 아버지께 고해 바치리라.
그렇지만 너무 소중한 기회였다.
“마탑은 어떻게 대응중입니까?”
조심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회담에 참석하러 가는 대표로서 이런 것이 궁금한건 당연하지 않은가.
“대응이라면.. 지금 일어나는 기현상을 말씀하시는거겠죠?”
“그렇습니다.”
“..글쎄요. 마법사와 대응이란 단어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군요. 저희는 관찰을 합니다.”
“..관찰?”
“마법사란 자연적이지 않은 현상을 만들어내는 자들. 그런 우리들이 대응을 한다면 그건 멸망이 확실해졌을때겠지요.
세상을 조율한다는 뭐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지만, 원래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그렇습니다.
사실을 파악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한 다음.
결론이 나고. 필요할때만 행동에 나섭니다. 조금 꼰대같죠?”
이정도로까지 대답해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주고 있지 않은가.
<여행의 시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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