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

“와아, 마법사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르네요?”
할리는 겉과 속이 투명한 희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부추겨주고 있지 않은가.
객관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이긴 했다.
뇌물의 의미인지 잽싸게 음식을 가져다준 희를 보고 난이 환하게 웃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마법사들이 전부 그렇게 조심스러운 건 또 아니랍니다.
마탑이라는 장치를 두어 그런이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에 가깝지요.
그냥 풀어두기엔 위험한 자들 아니겠습니까.”
본인도 마법사면서 마치 남 얘기를 하듯 대답해주며 눈을 찡긋 한다.
브린은 마법사면서 마탑에 소속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미등록 마법사인 셈이다.
왠지 저자가 흘리는 미끼를 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어쩔수가 없다.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니.
“그래서. 마탑에서는 기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해결방법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인 시선이 등뒤로 꽂힌다.
의아한건 예상했던 숫자보다 많았다는 것.
어쨌건 이번에도 과연 그는 대답해줄 것인가.
“하하. 이거 점점 밥값이 비싸지는군요. 디저트까지 주신다면 답해드리지요.”
아까부터 들썩이며 듣고 있던 희가 발빠르게 간신히 구색을 맞춘 각종 과일을 공손히 내민다.
“감사합니다.”
그는 적지 않은 인원을 앞에 두고도 여유있게 받은 과일을 음미해본다.
전직 음유시인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한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모습이 기가 막히도록 잘 어울렸다.
“역시. 정글이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열대 과일이라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 군요.”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선뜻 재촉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를 읽어내면서도 그는 충분히 과일을 음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모두와 한번씩 깊게 눈을 맞춘 후였다.
“귀한 음식을 대접받았으니 약속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결방법이라는것이 이 현상을 무로 돌리는 것이라면,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확실한건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무언가로부터 이 세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하려는 거라구요?”
내내 조용히 지켜보던 랑이가 가장 먼저 물었다.
“네. 마탑은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조사중입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잠정적인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습니다.”
기이한 내용이었다.
모두에게 상태창이 보이고, 던전이 생기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이 모든게 이 세계를 구하려고 벌어지는 일이라니.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사실 방금 발언한 부분도 나름대로 극비여서요.
비밀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미소지은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 하는 그의 얼굴은 묘했다.
무언가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상반된 감정들이 읽혀진다.
할리에게 있어 난과 랑이는 정확히 판단하기 힘든 상대였고, 그것은 할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새로 얻게 된 지식과는 별개로.
희의 절절한 부탁에 난은 하룻밤을 일행과 함께하고 떠나기로 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정글을 벗어난 곳이라지만 충분히 인접한 곳으로 안전하지는 않은 장소여서 설득력이 있었다.
흔쾌히 수락한 난은 전직 음유시인 답게 자신의 잠자리를 척척 준비했다.
“입고 계신 옷은 혹시 전통의상이라거나 그런거에요?”
준비를 마치자마자 다시 접근한 희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하늘하늘한 천을 여러개 덧대어 만든 옷을 입고 있는 난은 바람이 불때마다 그 모든 것이 제각각 휘날리어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전통의상은 아닙니다. 추위에도 더위에도 강한 옷이라서..
이상한가요?”
“아뇨, 멋있어서요! ..그럼 설마 직접 만드신거에요?”
“감사합니다. 네, 부끄럽지만 제가 직접 만든게 맞습니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서 친절히 꼬박꼬박 대답해주고 있다.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는 이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 감이 예민한 할리는 잠에서 깨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랑이와 난이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이유는 알수 없지만 주변을 돌아보며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지금은 내가 리더나 다름없잖아?’
급조한 변명이긴 했지만 더 나은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두 인영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이상 가까이 가지 않고 지켜보는데, 랑이가 눈물을 흘리는게 보인다.
난이 부드럽게 웃으며 무언가 위로를 하는 줄 알았는데,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분명히 이제 더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럴리가 없는데도 마치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반응도.
마치 랑이는 난을 기억하고 난은 이제서야 그녀를 알아본 것 같지 않은가.
마치 봐서는 안될 장면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야영지로 돌아왔다.
신경끄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난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희는 눈에 띄게 우울해했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썩 밝지 않았다.
랑이만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을텐데. 회담이 열리는 곳은 한참을 가야한다구.”
정글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지도를 구하기로 했었다.
마릴족이나 쿨란 족 모두 대륙의 최근 지리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이 떠난 건 아쉬웠으나, 여행길의 시작이 예사롭지 않아 앞으로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할리는 약속대로 애쉬를 일행에 포함시켰다.
늘 소극적이던 애쉬가 그런 눈동자로 부탁해왔던 것을 외면할수는 없었다.
부탁했던 당시의 모습과는 달리 정글을 떠나오고 부터 다시 평소처럼 존재감 없이 일행을 겉돌고 있다.
애쉬가 스스로 나선 것은 단 한번.
모두 잠이 들 무렵 난에게 다가서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우연이었는지 의도적이었는지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적어도 할리가 느끼기에는 그 혼자 였다.
둘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후로 뭔가 안정된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다.
‘그런 분위기를 가진 존재이긴 했다, 난은.’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보통 사람과 다른 것 같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받아들여줄 것 같은 느낌을 주던.
모르는 이들은 정보길드 수장이 이종족이 아니냐고들 하지만, 진짜로 이종족이 존재한다면 그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화려한 사람은 처음 보았으니까.
‘다시 만날 날이 오면 좋겠다.’
할리가 누군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보길드의 총력을 다해 그의 존재에 대해 알아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컸다.
어떻게 할지는 회담 성사 후에 정하는걸로 보류했다.
어느덧 이들이 일차적으로 목표했던 실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할리가 그렇게 주의를 주어야 할 정도로 일행은 어색해보였다.
쿨란족이나 마릴족 모두 격리되어 살았던 탓인지 오랜 세월을 변화 없이 살아온데 비해 대륙은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겪었다.
크지 않은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작은 도시라고 불러야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세블럭 정도 되는 거리에 빼곡하게 늘어선 상점들과 음식점.
오가는 이들의 옷차림이 일행과 무척 비교가 되었다.
정글을 벗어나자마자 나름대로 옷을 맞춰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뭐야, 마치 우리 촌뜨기가 된 것 같잖아.”
대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희가 잔뜩 실망했다.
“촌뜨기까지는 아니고.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 꾸미러 가자고!”
사실은 내심 랑이도 쇼핑이란걸 해보고 싶고 꾸며보고도 싶었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서 라는 구실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난과의 만남 후로 우울해졌던 마음을 풀어낼 필요가 있었다.
천족의 피가 흐르는 그가 스스로의 결심을 깨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랑이를 위해.
인간이 된 랑이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마탑의 수장으로서 언제고 랑이가 필요할때, 혹은 세상이 필요로 할때 기꺼이 나서주겠다고.
이 여정을 함께 했으면 했지만, 그는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직도 엘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거겠지.
엘은 그에게 축복이자 저주가 되어 버렸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굳이 따지자면 난이나 랑이나 정해진 성별이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난은 스스로 남성형을 택했고, 랑이 스스로는 엘의 영향을 받아 여성형에 가까워졌다.
랑이와 희는 취미가 진주모으기였기 때문에 고급진주는 셀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여행에 필요한 만큼만 챙겨왔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한 여행 자금이 될 것이다.
‘흥정이란 걸 꼭 해보고 싶었어.’
자신있는 걸음으로 보석상의 문을 열었다.
일행의 옷차림을 스캔한 직원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슨 도와드릴 일이라도?”
“진주를 좀 팔려고 하는데. 감정사를 불러줘.”
“..잠시 기다리시죠.”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로 뒤로 들어간 직원은 한참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던 일행도 뭔가가 이상한 것을 깨달아 갈때, 보석상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따르릉-.
문에 달린 벨이 소리를 작게 내자마자 직원이 부리나케 달려 나온다.
“어머,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어휴, 아니에요. 레이디가 당연히 먼저죠! 이리 오세요.”
분명해졌다.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보다 못한 희가 나서려는 순간, 랑이가 조용히 옷깃을 잡아 당겨 말리고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떨어트린 진주한알이 대리석 바닥을 구르며 그들을 향해 굴러갔다.
“..이건.”
보석에 대해 잘 아는 이라면 한눈에 알아 볼수 있을 정도의 최상급 진주알이다.
“어.머. 떨어져 버렸네. 좀 주워주시겠어요, 그.쪽.분?”
직원을 콕 찝어 부탁하는 랑이는 마치 여왕님같은 기세를 풍겼다.
진주의 퀄리티에 놀라, 그리고 랑이의 기세에 눌려 진주를 조심스레 주워서 잽싸게 랑이에게로 걸어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고객님들? 저희 감정사가 좀 일이 많아서. 곧 나오시라고 재촉하겠습니다!”
“그럴것 없고, 이 주변에 다른 보석상이 있나? 여기에는 팔고 싶지 않아졌는데.”
“..어머! 저희 보석상이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곳이랍니다. 다른 곳에 가져가셔도 제대로 가격을 쳐주지 않을거에요.”
직원의 급변한 태도에 모두가 기가 막히다는 헛웃음을 지어보인다.
이번만큼은 할리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채 팔짱을 끼고 랑이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엄연하게 할리와 희, 그리고 랑이가 그들의 리더다.
몇 명은 화를 참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헤어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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