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커피숍>

“..와, 이게 현실이야? 마법 같아!”
“......”
호들갑 떠는 희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새로운 것들이 너무 많다.
아담 커피숍이 그렇게 유명하다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저 음료수를 파는 가게일 뿐인데.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이 공간의 모든 것이. 공기조차도.
“인간들의 창의력이란 놀랍구나. 다른 공간일 뿐인데 다른 세계가 된 것 같아.”
“그렇지? 이 곳에 놓인 화분 하나 조차도 그 위치나 색이.. 어휴, 말로 해서 뭐해.”
“..더이상 촌티 내지 말고 일단 음료수를 시켜서 앉는건 어때?”
“좋은 생각. 난 커피를 마셔볼테야.”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 만큼은.
아무 걱정도 없이 그저 매일 바다에서 잠수하며 웃고 떠들며 장난쳤던.
찬란했던 그 시절로.
불과 얼마전인데 까마득한 옛날일인것만 같다.
‘..소중한건 꼭 지나고 나서 알게 되지.’
하지만 그만큼 충분히 그 순간들을 누렸으므로.
후회는 없다.
더 빛나는 순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때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커피에 도전한다.
“..우웩! 써!”
어디선가 읽은걸로 야침차게 커피맛이 가장 잘 우러난다는 아메리카노를 마신 희는 인상을 팍 쓴다.
그정도의 용기가 없었던 랑이는 안전하게 초보자에게 적합하다는 달작지근한 커피를 시켰다.
밤하늘을 담은 듯 새카만 색의 음료라니, 불길해서.
“..난 너무 맛있는걸.”
“아우, 아무래도 안되겠어. 나도 다시 사올게.”
비틀거리며 계산대를 향해 걷는 희의 뒷모습이 측은해보인다.
작게 웃어보인 랑이 다시 음료수로 목을 축인다.
“..맛이 있다고?”
“응. 왜, 할아범도 별로인 것 같아?”
“글쎄. 맛은 모르겠지만 보기에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군.”
“그래도 땅에서 자란 콩으로 만든 음료수라잖아. 좋아해야하는 거 아냐?”
“정령이 필요한건 인간의 음식이 아니지 않은가. 나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단호하기는. 농담 한번 해본거야.”
“......”
“그보다 할아범. 할아범이 보기에는 어때, 우리 일행이?”
“어떤 면에서 말인가.”
“성품이나 그런 것 말야. 믿어도 될 것 같아?”
“난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는다만. 그런걸 묻는게 아니라 내 의견을 물어보는거라면 성품들은 선하다.”
“..할리도?”
사실 내내 궁금했다.
일행을 믿어도 되는지에 대한 여부도 그렇지만 특별히 할리에 대해서.
인간치고 큰 힘을 얻었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악용될 여지가 있을까.
“..그를 주시하는 이유라면 대충 짐작이 가네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악하지는 않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정령의 기준으로 본다면?”
“낯설다.자네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다른 세계와 맞닿은 자여서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친숙함도 느껴.”
“확인받고 싶다면 말해주지. 천계에 거주하는 신수들도 본래는 신수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 것이다.”
“..역시 할아범. 모르는게 없구나.”
“떠보지 말고. 믿고 싶다면 믿어라. 왜 벌써부터 믿음을 주는 것에 인색한게냐.”
“..무서워. 홀로서기를 해야겠지.”
“모두가 겪는 과정이다. 흘러가는대로 두거라.”
“..응. 고마워.”
할아범이라고 계속 불러서인지, 정말로 할아버지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령에게 소환당해 부려지는 정령의 기분은 어떨까.
나는 인간인가, 정령인가.
어머니와의 연결도 끊어진 지금, 지독하게 외로운 내게 란드는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마릴 족과 쿨란 족 전사들은 필요한 물품을 구매중이라고 한다.
우리만 이렇게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몸도 몸이지만 마음의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위함이라는 멋진 변명도 있어서.
즐기기로 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멋진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한 힐링이 되어 주었다.
어쩐지 봄에 늘어진 고양이 두마리 같다.
봄날의 망상처럼 상상을 이어나가기로 한다.
커피. 커피는 우연히 발견된 콩을 볶아 내려 마시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했지.
내려마신다고 하면 물을 통한다는 것인데.
그럼 이 안에도 정령이 있지 않겠나.
“..물의 정령. 갖고 싶다.”
망상이 현실이 된 것일까.
문득 커피 안에서 무언가가 어지러이 보이는 듯 하다.
마치 인어같은 형상의.
“몸이 안좋아지긴 했나보네. 헛 것이 보여.”
나오는대로 지껄이긴 했으나 묘한 데자뷰가 느껴진다.
잡힐듯 말듯 ..
“..할아범. 내 눈에 헛 것이 보이는 것 같아. 혹시 물의 정령은 인어인가?”
“오호.”
..오호?
헛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에는 이름 부터 알아내서 속박하지 말고 차분하게 가보는거다, 랑아.
커피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인어가 맞았다.
자세히 보려고 하니 그 비늘까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인어는 아름다울 것 같았는데, 아름답기 보다는 기묘한 느낌.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을 띄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투명하다.
인간처럼 눈코입이 있지만 얼굴형과 몸이 전반적으로 길쭉한 느낌.
다리가 없고 지느러미가 달렸다.
손에 물갈퀴가 있고 뺨에 아가미가 보인다. 뻐끔 뻐끔.
“..물의 정령이 맞아?”
“저에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얼핏 봐도 신나게 헤엄치던 인어가 경직되어 보인다.
투명한 몸으로 뻥 뚫린 동공이 직시하는 모습은 어쩐지 섬뜩했다.
그나저나 수영하다가 멈추면 보통은 물에 빠지지 않나?
물의 정령이라니 저러다가 익사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란드는 인지하는 순간 만질 수도 있었는데.
격하게 만지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맞는데. 인어인가?”
“인어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라서.
그대는 누구이길래 저를 알아보시는 거죠?”
“나는, 세계수의 분신. 랑이.”
“아! 그래서 이렇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군요. 그런데 인간의 몸을 하시고 있네요?”
물의 정령의 성격을 알겠다.
부드럽고 정중하니 란드같이 무례하게 대했다면 마음을 여는데 힘들었을 것 같다.
“혹시 나랑 계약할 마음이 있어? 그럼 알려줄게.”
“몹시 궁금하긴 합니다. 정령이 인간의 몸이 되다니. 계약이라.. 저희에게도 계약은 드물긴 합니다만.”
잡힐듯 잡히지 않아서 더 애태우게 만든다.
“정령과 계약하는건 처음일 것 같지 않아?”
“..그렇네요, 정말.”
인어는 커피 표면에 엎드려 팔을 턱에 받치고 열심히 고민한다.
느낌상 80% 넘어왔다.
“심심하지 않게 해줄게. 나와 함께 한다면 매일 매일이 두근거릴거야.”
마치 청혼같은 대사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커피숍에서?
너무 낭만적이다.
스스로에게 감동하는 순간 인어가 물속으로 스르륵 사라진다.
“매우 감동적이지만, 하늘이 정해준 인연은 3번은 만난다고 하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귀한 분이시여.”
남자에게 차인 기분이 이러할까?
랑이는 한동안 멍하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귓속에 란드의 위로가 들리는 것 같긴 한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원래 정령과의 계약이 그렇게 쉽지 않아. 그정도면 잘한거라구.
..이봐? 눈 뜨고 자는건 아니지?”
“..할아범. 너무 속상해. 나 차인거야?”
“또 다시 기회가 올거다. 듣지 않았나, 인연이면 다시 만나게 될거고 연이 이어지게 될게다.”
“..그렇겠지?”
반사적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입과는 반대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게 이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그것을 본 란드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츤데레가 맞다, 할아범.
난 괜찮아. 그저 마음을 다하면 통할거라고 믿었던 것 뿐이야.
입을 열면 더 슬퍼질 것 같아서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하지만 말야.
“..무슨 일 있었어?”
눈물이 간신히 멈추고 잠든 희가 깨기 전에 진정하기 위해 애쓰는데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그만 놀라 버렸다.
“..할리? 왜 여기서 나와?”
“나도 유명하다는 커피숍에 한번 왔다가.”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하는데 눈빛이 어째 내가 운걸 알고 있는 느낌이다.
설명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라서 냉큼 화제를 돌려 버렸다.
“정보길드와는?”
“만났다. 그에 대해 대략 얘기를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정보가 많았어?”
“응. 이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현재 실리아 제국에 거주중.
실리아 제국은 황태자 바하가 데뷔 후 길었던 정치 싸움은 막을 내렸지만 아직 재상과의 기싸움이 간혹 있는 모양이고.
중앙 대륙은 이렇다할 수장이 없어서 각 나라는 잘 돌아가고 있지만 힘을 모으지는 못해.
세데아 제국은 강력한 황권으로 다스려왔으나 아무래도 조만간 세상 밖으로 나올 것 같네.
비밀리에 능력자들을 끌어모으고는 있는 것 같지만 말야.
국제 연맹이 창설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어.
회담에서 그 안건이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와. 정말 많았네.”
“우리의 동선은 중앙 대륙을 돌아보고, 가능하면 실리아 제국을 거쳐서 회담 장소로 간다.”
“시간 안에 가능하겠어? 직접 살피는 것이 확실하겠지만 말야.”
“가능하게 해야지.”
“마탑은?”
“마탑은 아직은 추측 뿐이지만 대륙을 거미줄처럼 감싸는 식으로 마법사를 퍼트리고 있다고 해.
가장 의도를 알 수 없는 곳이다. 여전히.”
그 말대로였다.
대륙을 감싸고 있다니. 난의 말처럼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마탑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선한 의도를 가졌기를 바랄 수 밖에.
“..니야. ..아니야! 하지..으..”
잠시 있고 있던 희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약물의 효과가 아직 몸에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떤 부작용인지 모르지만 몸과 맘이 허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정령인 자신과 똑같게 작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깨워야 하나?”
“보통은 깨워 주긴 하지. 이대로 둘건가?”
조심스럽게 희의 몸을 흔들어 깨워본다.
놀라지 않게.
숨을 허억 들이키며 일어난 희는 얼굴 가득이 눈물 범벅이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랑이와 할리를 번갈아 보는걸 지켜 보던 랑이가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토닥 토닥.
“괜찮아. 쉬이.. 꿈이었어.”
“..이게 현실인거지?”
“맞아. 이게 현실이야. 우리가 여전히 함께잖아.”
“랑랑..”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애써 울음을 참는 희를 안아주었다.
밝았던 만큼 마음도 여렸나 보다, 희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모두의 손길안에 자란 아이는 사랑받는 방법은 알았으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심한 장난을 쳐서 관심을 끌고 매사에 웃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엄마가 깨어날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아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건 썩 유쾌하지는 않다.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해도.
<아담 커피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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