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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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보고 자빠진 거야? 도망치라니까!”
수치스러웠다.
보통의 날이라면 경범죄나 공연음란죄 정도는 될 것이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니 잡혀갈 일은 없지만, 차라리 잡혀가기를 바랄 정도로, 수치, 수치, 수치스러웠다.
황당함을 넘어 욕설을 내뱉는 듯한 채리의 눈빛도 이해가 갔다.
나조차도 내가 황당해 미치겠는데, 17세 소녀는 오죽하겠는가.
난 해적단의 시선을 끌만한 것을 해야 했고, 성공했다.
채리는 놈들 눈을 피해 병원을 나왔다.
고추 흔들기 대작전은 여지없이 들어맞은 것이다.
또 다행인 것은 해적단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는 거였다.
물론, 나를 향해 총탄들이 쏟아지긴 했다.
죽이겠다는 의도보다, 재수 없으니 어서 꺼져, 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날 정신돌아이 새끼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침공된 지구에서 홱까닥 맛 간 그런 정신돌아이 새끼.
아무튼 수치스럽게 수고했다, 내 불알.
“부랄탄, 지루해. 파뤼 타임 고고!”
고백하건데, 내 지랄부랄쇼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불알을 짝짝이로 만든 반장 새끼는 나를 교탁 위로 올렸다.
그리고 팬티를 내리라 윽박질렀다.
자율학습 시간이 지루하다는 이유였다.
그때도 난, 날 좀 봐달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했다.
그럼 교실 안 모든 눈들과 휴대폰 카메라들이 나를 찍기에 바빴고, 난 팬들 성화에 맞춰 더욱 더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나는야 부랄탄 사나이라네...”
만약 응하지 않을 시엔, 옆 동네 여고 교문에 옷을 홀딱 벗기고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는 협박이 뒤따랐다.
그게 무서워 내가 팬티를 내렸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응하지 않거나 반항을 하면, 놈들은 늘 최후의 수단으로 내 어머니를 들먹였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내가 일진들의 폭력을 그토록 묵묵히 견뎌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놈들은 나의 아킬레스건이 어머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했으며, 그 효과는 대단히도 만족스러운 거였다.
“니네 엄마 골로 보내버린다.”
“제발, 우리 엄마는 건들지 말아줘.”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못하거나 하지 않거나, 도망치거나 숨거나 하면, 일진들은 어머니를 당장 해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장 선짓국 가게에 불을 질러버리겠다거나, 어머니 배에 칼침을 놓아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식이었다.
그럴 때면 난 놈들이 시키는 짓은 무조건 따랐다.
일진들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훔치거나, 괜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얻어터진 후 합의금을 받아내었다.
심지어 본드를 흡입하고 남의 차를 훔쳐 사고를 낸 적도 있었다.
교탁 위 지랄부랄쇼 역시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해야만 했다.
왜 당하고만 있었냐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맞서야 했다고?
안 해봤겠는가?
학교에 알리고 경찰에도 신고해 봤다.
변하지 않았다.
담탱이 십새끼는 고자질 한다며 나를 더욱 팼고, 경찰들은 친구들끼리 장난 한번 친 것 가지고 뭘 그러냐며, 내 말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배경엔 일진들의 부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나 경찰쯤은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주무르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어느 때인가 반장 새끼의 변호사라는 놈이 날 찾아와서는,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가 내뱉은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니,’ 나보고 그냥 잠자코 있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 가게를 문 닫게 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알겠는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난 빠져나가지 못할 미로에 갇힌 것이었고, 덫에 걸린 쥐새끼일 뿐이었다.
쥐구멍에 볕 뜰 날 온다고?
개소리다.
절대 뜨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를 잃을 수 없었다.
세상 유일 나만의 편을 잃는다는 것은, 내 생명이 끊기는 것과 같았다.
그냥 한번 하고 말자란 심정으로 놈들 요구에 따랐던 것이다.
내가 적응이라 말하는 것은 일진들의 폭력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나를 둘러싼 환경까지도 날 억지로 적응시켰다는 말이다.
니기미 시팔, 옛날 생각하니 열 뻗치네!
“잊어, 잊어. 다 지난 일이잖아.”
“그때가 좋았어. 뭔 걱정이 있었냐고!”
“이 나이쯤 되면 추억으로 사는 거지.”
고통스런 일, 나를 괴롭게 한 사람들, 죽고 싶던 기억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을 그땐 그랬지, 라며 추억이라는 말로 흔히들 바꿔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난 추억이 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싶다.
“개뿔, 추억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난 악몽인데, 어떻게 그게 추억이 될 수 있냐?”
추억이란 가해자의 언어다.
그래서 함부로 쓰면 안 되고, 허락 없이 들쳐 내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지난 일’이라 취급하며 잊거나 무시한다.
난 아직 아픈데 말이다.
서로가 좋아야 추억이지, 나는 여전히 고통을 받는데 얻다 대고 추억이라 하는가?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만 죽어가는 것을 가해자들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알려하지 않는다.
시팔! 시팔!! 개시팔!!!
지랄부랄쇼는 오늘로써 두 번째가 되었다.
채리가 무사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수고했다.
내 불알.
**
언덕 아래서 기다리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눈을 내리까는 채리였다.
우린 그저 불편한 침묵과 어색한 눈빛들을 서로 뒤엉키게 주고받고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잠시 쉴 시간이 있었는데, 채리는 딱 세 마디만 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다 봤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못 봤는데 굳이 못 봤다고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 차라리 말을 말지.
“근데 부랄탄 사나이가 뭐예요?”
“아무것도 못 봤다며?”
“못 봤다니까요. 근데 그게 뭔데요?”
“입 닥쳐. 쌰랍해!”
꽤 많이 걸었음에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바다가 주는 효과였다.
우린 서로가 뻘쭘해 아무 말 않다가 바다 얘기에 다시 조잘댔고, 많은 것을 공유했다.
소식을 듣고 기뻐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없던 힘도 절로 나올 판이었다.
비록 수치스런 중간과정이 있었지만, 바다에 대한 것만 생각하기로 나와 채리 사이엔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벤트요?”
“응.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나는 몰래카메라를 할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서프라이즈 할 수 있게 감동과 놀라움을 주자고 하니, 채리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몇 개의 아이디어를 주고받다, 영화 러브액츄얼리 스케치북 고백 장면처럼 하자고 합의를 봤다.
때마침 아휘의 공책이 있었고, 그곳에 쓸 문구는 채리에게 생각해보라고 했다.
채리는 영화를 보지 않아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잘 몰랐지만, 감동과 놀라움을 주는데 있어 그것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건 없다는 내 말에, 본인이 고백을 받는 냥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너 얼굴 빨갛다!”
난 그것을 가지고 놀려댔으며, 채리는 그만하라며 내 어깨를 때려댔다.
이 영락없는 17세 소녀 같으니.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고, 우리는 바다로 갈 수 없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사태가 학도군에서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
“아저씨, 잠깐만요.”
쇼핑몰을 100m쯤 남겨두고 채리가 갑자기 잔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덩달아 나도 숨고는 왜 그러냐며 다그쳤다.
“감시조가 없어요.”
“감시조?”
학도군은 불침번처럼 두 명씩 조를 짜, 2시간씩 번갈아 가며 24시간 쇼핑몰 주위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했다.
혹여나 있을 다른 부대의 공격을 막기 위한 그들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마땅히 보여야 할 감시조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어디 갔겠지. 오줌 싸러 갔거나.”
“아니에요.”
채리 말대로라면 감시조는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역을 나눠 서로가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비상시 서로의 말을 전하고 들을 수 있는 거리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식량을 찾는 아이들이 으레 보일 법도 하거늘, 적막만이 깔려있었다.
불길함이 엄습해왔다.
학도군에 어떤 사고가 발생했다는 시그널이었다.
지하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왜 다 죽어있는 건데? 아휘야?”
학살의 현장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른 부대의 습격과 아휘의 죽음이었다.
제법 정리되어있던 주차장이 마치 야반도주를 한 모양새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는 피바다였고, 수십 구에 달하는 아이들의 시체가 처참히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총탄에 맞은 흔적이 뚜렷했으나, 간혹 칼에 찔려 죽은 이들도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왜 아이들이 모두 죽어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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