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나 확 망해버려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완결

astaiji
작품등록일 :
2024.05.08 10:11
최근연재일 :
2025.02.24 09:00
연재수 :
157 회
조회수 :
13,414
추천수 :
288
글자수 :
647,337

작성
24.06.06 09:30
조회
76
추천
2
글자
9쪽

끝과 시작 31

DUMMY

*

“모두... 모든 아이들이, 죽었어...”


10대 아이들의 시체는 지금껏 봐온 것보다 수십 배의 끔찍함이었다.

갓 피어난 꽃들의 가지를 댕강 부러뜨린 것과 같았다.


유례가 없는 침공의 폐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이었다.


희망이 없는 현실을 어떡하든 살아내기 위해 전쟁과 같은 고단함을 매 순간 견뎌왔을 어린 생명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무참히 학살됐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 못 할 충격과 참담함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죽어야 하는 거야? 얘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대체 누가 뭣 때문에 이런 끔찍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이 죄를 어찌 씻어내려 하는가?


이 불쌍하고 슬픈 영혼들이 품고 있을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다독일 수 있을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채리는 떨리는 입술 끝으로 계속 그렇게만 주절거렸다.

곧 바스러질 것 같은 두 다리를 간신히,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어린 소녀를 삼키려 했다.


“채리야...”


말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이들 시신을 수습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채리를 위한 일이라 믿는다.


한 구... 두 구... 세 구... 아휘도 곧 나오겠지.


목울대에 걸려 있던 울음이 그제야 턱하고 터졌다.

곧 나올 아휘 시체에 담담해지려 했던 각오는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다섯 살 꼬마는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갔을 것이고, 우리의 우연은 아픈 인연으로 매듭짓게 되었다.


차라리, 차라리 무시했어야 했다.


나는 나대로 아휘는 아휘대로 제 갈 길을 갔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아픔은 좀 덜하지 않았을까... 못된 마음이었다.


아휘가 죽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못된 마음이었다.


난 아휘를 책임져야 했다.


하수도에서 꺼내 살린 책임을 끝까지 완수해야 했다.


최소한, 최소한 이런 식으로 보내면 안 되었다.


아휘야, 어딨니?


열한 구... 열네 구... 열다섯 구... 아이들의 시체는 끝도 없이 나왔다.


주차장 비탈길에 죽어 있었고, 잔해물 사이에 끼어 있었다.

도망치거나 숨어 있다 죽은 것이다.


도망칠 새도 없이, 숨어 있을 새도 없이 총탄에 맞은 거겠지.


어떤 이에겐 자신의 이름표가 들려있었고, 또 어떤 이에겐 가족사진이 들려 있었다.

살고자 했던 아이들의 본능은 처참히 뭉개진 것이다.


스물 한 구... 스물 두 구... 스물 세 구의 어린 시체들.


아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 모리야!


채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식량 창고로 쓰인 곳으로 가니, 울부짖고 있는 채리였고, 놀랍게도 살아, 숨이 턱밑까지 차있는 모리를 붙들고 있었다.


“누나... 민혁 형아가...”


모리 몸엔 여러 발의 총상 자국이 선명했다.


핏물을 뒤집어 쓴 몰골은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안 쉬느니 못한 호흡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죽음이었다.


모리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지막 빛이겠지.


“민혁이 형이... 다 죽였어...”


“말 하지 마. 아무 말 하지 마, 모리야.”


생명의 끈을 힘겹게 잡고 있는 모리였지만, 학살에 대해서는 제법 또렷이 말을 이었다.

누나를 만나면 말해줄 것을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탱크부대가... 다 죽였어...”


“탱크부대?”


탱크부대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나와 채리가 약품을 구하기 위해 어제 아침에 나가자, 빡빡이는 학도군 아이들을 겁박해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는 거였다.


그것에 저항을 하자, 빡빡이는 탱크부대를 끌어들여 이 사태를 벌였고, 탱크부대는 나머지 아이들을 모조리 잡아갔다는 거였다.


“빡빡이 새끼가? 그 새끼가 대체 왜?”


한 가지쯤은 추리할 수 있었다.


놈은 오랫동안 계획 하에 움직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 채리가 없는 틈을 타 이 사단을 벌였다는 것은, 다른 것으론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놈은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일진스러움을 호되게 발산한 것이고, 그것은 용서라는 틀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만큼은 분명했다.


죽일 놈의 새끼.


“미안해, 누나... 누나 없을 땐 내가 대장인데... 지키지 못했어.”


“아휘는? 아휘도 끌려 간 거야? 혹시, 죽은 거니?”


고개를 젓는 모리였다.

혹시나 싶은 심정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화가 치솟아 돌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이런 짓을 벌이는 인간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누나가 미안해... 누나가 잘못했어...”


채리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동생 몸이 뭉개질 것 같아 함부로 안을 수도 없거니와, 죽어가는 것에 손 놓고 있다는 울분이었다.


잔인하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지만 채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모리야?”


이내 슬픈 비명이 들려왔다.

죽음을 부정하는 체리의 외침이었으나, 동생 모리는 눈이 감겨 있었다.

그럼으로써 피붙이의 생명은 끝나 버렸다.


“눈 떠봐! 눈 떠봐, 모리야! 모리야 제발... 누나 여기 있잖아... 모리야 눈 좀 떠봐...”


채리의 쇳소리가 공명되어 주차장을 채우고 되돌아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동생과 함께 바다로 갈 거라는 희망은 절망이 되어 내리 찍고 있었다.

더 이상 함께 할 모리는 없었고, 아이들도 없었다.


미래씨가 죽은 후 삶의 의지가 없었진 움막의 츄바카처럼, 채리도 그렇게 될까 걱정되었다.


난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이란 걸, 잘 알았다.


암흑이었다.

빛이 없는 암흑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니까.


“모리야, 눈 좀 떠봐... 죽으면 안 돼, 죽지 마. 모리야... 제발 죽지 마...”


모리는 채리가 올 때까지 견디며 꺼져가는 생명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 하나 남은 핏줄을 보자 눈을 감을 수 있었겠지.


누나 품에 안긴 기억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받아들였겠지.


아프고 슬펐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기억은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로 남겨질 뿐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라니... 모리야, 안녕.


나는 채리를 안아들고 빌었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나의 온기였고, 신이었다.


모리의 꺼져가는 온기를 내 것으로 채울 순 없었다.

채리의 고독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기를 바랄 뿐이었다.


신에게 간청했다.


채리가 나와 함께 바다에 갈 수 있기를, 그 의지가 꺾이지 말기를, 고독을 이길 수 있기를.


“너? 너희들?”


아휘와 코코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

귀신인가 싶었다.


“이놈들아,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휘가 저 만치 떨어진 자동차를 가리켰다.

하수도에 숨었던 것처럼 자동차 밑에 숨어있었다는 뜻이었다.


다행이고 기뻐 코끝이 찡하고 떨렸다.


아휘는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날 향해 웃었고, 코코는 혓바닥을 내밀고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것으로 멀쩡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살아있는 꼬맹이들이 참 예뻤다.


따지고 보면 아무 관계도 아닌 이들이 너무나 귀하기만 했다.


이 작디작은 꼬맹이들은 내게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뜨겁게 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가 있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은데 설명을 못하겠다.

대신, 결심 하나를 해야겠다.


이 꼬맹이들과 함께 바다에 꼭 가겠다고!

내가, 나 이지구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아휘, 코코.


***

마지막 돌을 올리자, 아휘가 나무와 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십자가를 돌 틈에 끼웠다.


그렇게 모리는 돌무덤에 묻혔다.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한데 모아 모리의 돌무덤처럼 만들어 묻었다.

이로써 학도군은 완전히 사라졌다.


채리는 아직 동생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쳐 쓰러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싶었다.


아휘와 코코도 시무룩했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보채지 않았다.


슬픔의 깊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리라.


“채리야, 독산동으로 가자. 우린 바다로 가야 해.”


대답은 없었지만, 채리는 살아나고 있었다.

좀 전에 없던 활기가 불타고 있었고,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바다로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빡빡이를 죽이겠다는 무서운 기운이었다.


“난 놈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안 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네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상관 말아요. 내 일이니까.”


챡!!! 나는 채리의 뺨을 올려 붙였다.


채리는 나에게 총구를 겨눴다.

진짜 총이었다.


“물러서요.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해봐.


죽일 수 있다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지구나 확 망해버려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7 남은 자들 157 25.02.24 34 0 11쪽
156 남은 자들 156 25.02.21 12 0 11쪽
155 남은 자들 155 25.02.20 16 0 10쪽
154 남은 자들 154 25.02.19 15 0 9쪽
153 남은 자들 153 25.02.18 13 0 9쪽
152 남은 자들 152 25.02.17 14 0 9쪽
151 지구의 길 151 25.01.24 22 0 10쪽
150 지구의 길 150 25.01.23 16 0 9쪽
149 지구의 길 149 25.01.21 18 1 10쪽
148 지구의 길 148 25.01.20 18 1 9쪽
147 지구의 길 147 25.01.17 18 1 9쪽
146 지구의 길 146 25.01.16 17 1 9쪽
145 지구의 길 145 25.01.15 20 1 9쪽
144 지구의 길 144 25.01.14 19 1 9쪽
143 지구의 길 143 25.01.13 19 1 9쪽
142 지구의 길 142 25.01.10 20 1 9쪽
141 지구의 길 141 25.01.09 18 1 9쪽
140 지구의 길 140 25.01.08 19 1 9쪽
139 지구의 길 139 25.01.07 21 1 9쪽
138 지구의 길 138 25.01.06 18 1 9쪽
137 지구의 길 137 25.01.03 19 1 9쪽
136 지구의 길 136 25.01.02 19 1 9쪽
135 지구의 길 135 25.01.01 18 1 9쪽
134 지구의 길 134 24.12.31 19 1 9쪽
133 지구의 길 133 24.12.30 23 1 10쪽
132 선의 증명 132 24.12.04 31 1 9쪽
131 선의 증명 131 24.12.03 21 1 9쪽
130 선의 증명 130 24.12.02 22 1 9쪽
129 선의 증명 129 24.11.29 25 1 9쪽
128 선의 증명 128 24.11.28 20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