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나 확 망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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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astaiji
작품등록일 :
2024.05.08 10:11
최근연재일 :
2025.02.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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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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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끝과 시작 33

DUMMY

*

“야, 이지구. 왜 도둑놈처럼 기웃거려? 왔으면 들어가던가 하지. 죄졌냐?”


“죄는 무슨. 지금 들어가려고 했다.”


유진이 보이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현성이 아는 척 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는 타지 못했다.


“다들 널럴한가 보다? 동창회 할 시간도 있고?”


“바쁜데 참석한 거야. 좋잖아. 이런 핑계로 얼굴도 보고. 고등학교 친구가 끝까지 가는 거다.”


“지랄하네. 끝까지 가기는 뭘 끝까지 가? 난 그럴 생각 전혀 없다.”


“새끼, 까칠하기는. 누가 백수 아니랄까봐.”


그놈의 자격지심이 발동해 비아냥댔다.

솔직히 나를 불러내기 위해 유진을 미끼로 쓴 현성을 줘패고 싶었다.


“넌 회사 잘 다니고 있는 거야?”


“말도 마라. 연구만 할 줄 알고 좋다고 들어갔구만, 그놈의 실적이 뭔지 연구원인 나한테도 약 팔러 다니란다, 회사에서.”


“어떻게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들어간 거야? 전공도 다르잖아?”


“전공대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돼? 그냥저냥 맞춰서 가는 거지. 회사 얘기 그만해. 요즘 같아선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


때려 쳐?

내 앞에서 감히 회사를 그만 둔다는 말을 어찌 그리 해맑게 하는지.

현성이 놈도 주둥이 쓰임새가 참, 좆같았다.


“좀 변한 거 같다?”


“나?”


“제법 비지스맨 스멜이 나. 나랑 백수일 때와는 달라 보여.”


“마, 그때가 언제 적인데? 돈 싸들고 돌아가라 해도 절대 안 간다. 차라리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지. 생각도 하기 싫으니까 말도 꺼내지 마.”


“새끼, 겁나 멋있어졌네.”


“나도 안다. 내가 멋있는 거.”


현성은 많이 변해있었다.

더 이상 학창시절의 찐따가, 나와 함께 2년 가량 백수 생활을 했던 그 모습이 말끔히 증발되고 없었다.


핏감이 살아있는 수트발과 명품 시계, 당당한 말투와 호쾌한 웃음, 무엇보다, 직장인으로서 번듯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부러웠다.

친구에게 질투가 났다.

나도 취업에 성공했다면 현성처럼 되어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자격지심은 발동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할 말이라는 건 뭔데?”


“우선 들어가. 들어가서 인사부터 해.”


그때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가려웠던 내 불알의 신호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유진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난 가뿐히 무시했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지옥을 겪어야 했다.


공항에서 이별을 했던 유진과의 옛 일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그로 인해 좋은 기억으로 간직했던 과거는 전부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유진이 민혁의 여자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일진과 내 첫사랑이 날 지옥행 급행열차로 이끌 저승사자란 걸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난 지옥의 문을 내 손으로 열었다.


하,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

“자, 모두 집중! 의리의 사나이, 이지구 등장이오.”


몹시 뻘줌했다.


현성이 동창들에게 나를 소개했지만, 그들은 본체만체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이에게 집중하느라 바빴다.


“... 박민혁...”


그래, 저 얼굴 저 표정 저 태도의 박민혁.


영락없는 반장 새끼 민혁이었다.


저 눈빛, 나를 꼼짝 못하게 했던 그 살벌한 눈빛, 내가 놈을 살해할 충분한 동기가 되었던 눈빛.


“개새끼. 하나도 안 변했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모른 척해.”


현성과 난 귓속말을 주고받았고, 민혁은 날 위아래로 훑었다.


다른 이들을 깔보는 저 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 습성, 멋대로 사람을 부릴 수 있단 저 오만함, 원하는 것은 가지고 만다는 저 탐욕.


여전했다.


나 또한 여전했다.

얼어붙었고 불알이 가려웠으며, 100m 달리기 출발선에 선 것 마냥 오줌이 마려왔다.

혼자 있을 땐 아무것도 못하는 놈 앞에서.


“... 나 잠깐 화장실 좀.”


변기 칸으로 들어와 팬티를 내렸지만, 오줌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불알만을 긁어댔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흘렀건만, 민혁과 나는 바뀐 것이 없었다.

일진과 왕따의 모습이었다.


“괜히 왔네...”


그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가 곧바로 집으로 가자는 생각이 뒤따랐다.


변기 칸 너머에서 비웃음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준 3만 원으로 새우깡과 소주로 내 트라우마를 달랠 생각이었다.


하지 못했다.

비웃음이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아까 그 새끼 얼굴 봤냐? 완전 똥 씹은 표정이던데?


- 아직도 왕따 습성을 못 버린 것 같더라. 오줌 지릴 것 같아서 내가 다 조마조마하더라니까.


- 해병만 영원한 해병인 줄 알아? 한번 왕따도 영원한 왕따인 거야.


- 그래도 그렇지, 지구 새끼는 존심도 없나?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해? 민혁이한테 그렇게 처맞은 새끼가.


- 지구가 누구야? 아, 부랄탄 이름이 지구였나? 그냥 냅둬라. 맞는 게 그리웠나 보지. 또 누가 아냐? 좆나게 맞는 부랄탄 오랜만에 보게 될지.


낄낄거리는 소리가 내 폐부를 찔렀다.


시작에 불과했다.


- 그 새끼 아직도 백수라며?


- 그런 놈을 누가 뽑아? 너 같으면 뽑겠냐?


- 하긴, 평생을 찐따에다 왕따로 살아온 놈인데, 뭔 일을 하겠어. 나 같아도 안 뽑겠다. 그렇게 보면, 부랄탄 새끼 참 일관성 있어.


- 사람이 쉽게 변하냐? 아름다운 왕따 새끼.


주저앉았다.

내 이름도 모르는 동창 새끼들, 내 뒷담화를 까대는 그때의 방관자들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와 민혁처럼 그들 역시도 그대로인 채였다.


- 민혁이 쟤, 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고 그러지 않았나?


- 유학은 개뿔, 군대 안 갈라고 손쓴 거지.


- 뭔 얘기야? 군대?


- 지네 아버지 빽으로다가 미국으로 토낀 거잖아. 영주권 시민권 다 받아서 군대 완전히 뺐을 걸? 검은 머리 외국인이 바로 민혁이야.


- 민혁이 아버지 뭐하는데?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민혁이 있는 집 자식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들도 함부로 못 대했다.

딱 그 정도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 배경에 놈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제약회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제약회사는 스테디셀러가 여러 개 있어 망하지 않는 회사였다.

새로운 신약 개발로 해외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는 글로벌 컴퍼니였다.


어쩐지 교무실에 불려갈 때마다 담탱이 십새끼 책상에 항상 피로회복제가 쌓여 있더라니.


민혁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국방의 의무도 아무렇지 않게 패스하는 걸 보면, 신의 자식이 분명했다.


짝짝이 불알의 소유자인 나는 잘도 1급 도장을 찍어 주더만.


세 번째는 현성이 다니는 회사가 그 제약회사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동창들의 말처럼 한번 왕따는 영원한 왕따인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꼭 그렇게 민혁이와 관련된 회사를 다녀야 하는가?

그래도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나와는 다른가?


하긴,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지는 않으니까.


- 민혁이 새끼 지 아버지 회사 기획실장으로 있잖아. 곧 물려받는다고 하더라.


- 드라마에서나 나온다는 기획실장이 민혁이었다니, 잘 보여야겠다.


- 금수저에 다이아 박혀서 태어난 거지. 그러니까 부모도 잘 만나야 돼. 그것도 스펙이야.


나는 그들이 밖으로 나간 걸 알면서도 나가질 못했다.

허무함이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민혁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종이었다.

나는 흙수저였고, 나의 부모는 스펙이 되어주지 못했다.

반면에 놈은 선택 받은 자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여태껏 내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은 모두 헛된 짓이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뉜다.

아무리 노력하고 극복하려해도 세상은 될 놈만 되는 곳이다.


착하게 살면 멍청이라 손가락질 받는 것이고, 능력이 없는 것이며 왕따만 당할 뿐이다.

그건 내 30여 년을 통틀어 직접 체득한 것이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시팔...”


변기 칸에서 나와 오랜 시간 거울을 보았다.

그곳엔 지하철에서 만났던 창가의 사내가 있었다.


“이지구,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도 몰라... 병신아, 빨리 집에 가... 나도 그럴 생각이야... 그래, 세상은 될 놈만 되는 거였어... 알아. 내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그렇게 물었고,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상황이 더 비참했다.


나도 모르게 벌게진 눈을 오랫동안 씻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자야지. 아, 편의점에서 소주 한잔 때리고...”


거울 속 사내가 날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

“지구야!”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유진이 있었다.


“안녕, 지구야!”


나를 파괴한 마이 러브, 나를 살게 하고 죽게도 한 마이 엔젤, 나의 러브레터 히로인 마이 본드 걸, 정유진.


“유, 유진아?”


그토록 보고팠던 나의 첫사랑은 여신과 같은 자태와 미모로서, 내 앞에 3년 만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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