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38

*
“얘들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자.”
엎어진 김에 쉬어 가기로 했다.
많이 걸었고 생사도 오간 탓에 무척이나 노곤했다.
보름달을 의지해 철로만 따라간다면, 금세 도착할 수는 있었다.
1호선 라인이니, 터널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 해당되는 얘기다.
꼬맹이들에게는 어둠 자체가 위험이었다.
“좋지? 배부르니까? 늘 이런 날이면 얼마나 좋겠냐.”
우린 발라당 자빠져 빵빵한 배를 어루만졌다.
양껏 먹은 만족감이 상당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치타와도 장난을 쳐대며 금세 친해졌다.
무리에서 떨어졌거나, 혼자 살아남아 여태 버티고 있는 듯 했다.
겁을 내고 무서워할 법도 한데, 정이 그리웠나보다.
그나저나 채리를 어떡하든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자꾸 들었다.
머리끄덩이라도 잡았어야 했나?
함께 바다로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여전히 복수로 불타고 있을까?
빡빡이를 죽였을까?
아니면, 죽었나?
몸은 피곤한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미안함과 아쉬움 때문이리라.
“뭐야?”
그렇게 뒤척이다 서서히 눈이 감겼... 다... 벌떡 떠졌다.
난데없이 으르렁이 울렸다.
나만 들은 것이 아니다.
코까지 골던 치타가 잽싸게 일어나 뚫려있는 천장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왜 그래, 코코? 네가 듣기에도 심상찮은 거야?”
내 품으로 파고드는 코코였다.
달달 떨었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서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유리문을 열고 신중히 역사를 살폈다.
박쥐만 간혹 날아다녔다.
그때 다시 으르렁이 들렸다.
동물의 왕국에서 보고 들었던 맹수의 소리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역을 나가기로 했다.
혹여나 근처에 있는 거라면, 우린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아휘 코코.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해. 최대한 조용히, 찍소리도 내면 안 돼.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자, 모두 숨 한번 크게 쉬어.”
눈치 빠른 꼬맹이들이라 내게서 뿜어지는 긴장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역무원실을 나왔다.
정면의 출입구까지는 8미터밖에 되지 않았, 윽!!! 까치발로 걷다 유리파편을 밟았다.
미세한 소음이 거대한 천둥소리처럼 되돌아왔다.
죽은 듯이 숨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역 바닥으로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헉!!!!!
비명이 나오려는 내 입을 잽싸게 틀어막았다.
출입구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짐승이 달을 등지고 있었다
“시부랄, 사자가 있을 줄이야...”
그림자는 딱 봐도 사자였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갈기였고, 날카로운 발톱과 더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림자로써 과시하고 있었다.
으르렁을 듣는 순간, 치타와 코코는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치타 새끼는 의리 없게 혼자 도망친 것이고.
최악이었다.
“코코, 너부터 움직여. 어디든 가서 숨어있어.”
점점 안으로 들어오던 그림자가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자신의 코앞에 먹잇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아휘를 안아들고, 뛸 준비를 했다.
“아휘, 아저씨 꽉 잡아. 절대로 놓쳐선 안 돼.”
출입구하고는 7m, 역무원실까지는 1m의 거리차가 있었다.
놈보다 빨리 뛰어 역무원실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하나... 둘... 셋! 파바박!!! 뛰었다.
발라당 나자빠졌다.
밟고 있던 유리파편에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놈이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나를 덮쳐왔다.
“아휘, 코코. 도망쳐!!!”
순간적으로 밀어내자, 아휘는 바닥을 타고 미끄러져 갔다.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이었다.
이렇게 나는 사자에게 먹히겠지만, 꼬맹이들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을 행하고 죽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지만, 솔직히 좆나 짜증났다.
고양이가 내 볼을 핥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긴장이 쑥 빠져나갔다.
그림자는 우습게도 고양이였다.
관리 안 된 털이 사방으로 뻗쳐, 꼭 사자의 갈기와 같았다.
이빨과 발톱도 제법 날카로웠으나, 그래봤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야옹이에 불과했다.
헛웃음을 뱉었다.
그림자만 보고 사자라 단정한 내가 몹시도 어이없었다.
“니들 또? 그런 식으로 날 보지 말랬지? 안 그래도 쪽팔리니까, 눈깔 깔아라.”
쿵! 쿵!! 쿵!!!
의문의 발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훅! 끼쳐오는 공기의 질감부터가 달랐다.
쉭쉭 뱉어내는 호흡이 주변을 얼어붙게 했다.
어둠 끝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튀어!!!”
어흥!!!!!
대포와 같은 울부짖음으로 드디어 모습을 내보이는 놈이었다.
시부랄, 호랑이!!!!!
어마어마한 진짜!!! 호랑이가 곧장 달려왔다.
“이, 이게 말이 되, 되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와 가슴의 모든 세포가 빨리 도망가라 하거늘,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본능이고 뭐고, 이성이고 뭐고 간에 모두 고장나버렸다.
그야말로 호랑이의 엄청난 포스에 짓눌려버렸다.
악!!!
넋 빠진 날 깨운 건, 아휘가 던진 캔 콜라였다.
이마에 맞는 순간, 쫙 벌어진 호랑이의 아가리가 내 얼굴 앞에 와있는 걸 깨달았다.
몸을 굴렸다.
구르고 또 굴렸다.
정신없이 굴러 자판기에 퍽! 부딪쳤다.
그 순간 냅다 일어나 달렸다.
**
아휘를 안아들고 승강장 계단을 내려갔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저 감으로 발을 딛고는 무작정 뛰었다.
슉!!! 호랑이가 날아들더니, 챡!!! 계단참에 안착했다.
놈은 오로지 점프로만 좁혀왔다.
눈앞에 먹잇감이 있으니,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강인한 집중력이었다.
달리 말해, 암만 뛰어도 우린 놈 사정권에 있다는 말이었다.
화장실이 보이기에 우선은 들어갔다.
변기 칸이 죄다 잠겨있어 가장 끝 물품실로 들어왔다.
어흥!!!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입구가 좁아 들어오지 못할 거라 여겼던 내 판단 미스였다.
놈은 틈을 주지 않고 미쳐 날뛰었다.
차례차례 문을 부수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코코, 넌 몸집이 작아서 구석으로만 가면 돼. 뭐해? 빨리 밑으로 나가라니까.”
콰쾅!!!
물품실 문의 반쪽이 휙 날아갔다.
놈의 한방이었다.
변기로 올라 아휘를 옆 칸으로 던지고, 마대를 집어 놈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말이 공격이지, 애들 장난 수준에도 못 미치는 찌르기였다.
“코코! 밑으로!!!”
코코가 잽싸게 옆 칸으로 달렸고,
호랑이가 문을 부셨고, 쑥 들어가며 물컹하는 뭔가가 느껴진 건, 거의 동시였다.
부러져 날카롭게 잘린 마대 끝 쪽이 놈 오른쪽 눈에 박혀 있었다.
윽, 의도한 건 아닌데 치명타를 날렸다.
놈의 울부짖음이 쩌렁쩌렁하게 터졌다.
내 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어마 무시한 괴성이었다.
옆 칸으로 넘어갔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앞발이 내 엉덩이에 닿을락 말락한 찰나였다.
“아휘!!!”
웅크리고 있는 아휘를 안고, 화장실 밖으로 달렸다.
피범벅이 된 호랑이가 방향을 못 잡는 틈이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었다.
잠시뿐이었다.
놈은 금세 나와 우릴 다시 쫓기 시작했다.
딱 봐도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내지르는 포효가 니들 잡히면 다 죽었어, 였다.
***
2호선 라인의 승강장까지 내려왔다.
지하철이 있었다.
운행을 하다 폭격을 받았는지, 무너진 터널 벽돌에 깔려 있었다.
저곳으로 들어간다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힘 좋은 놈이라 해도 지하철의 강철 외벽을 뚫지는 못할 것이다.
미적거림 없이 하늘을 날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닥을 박차고 허공을 가로질러 깨져있는 유리창틀로 몸을 집어넣었다.
쿵!!!!!
지하철 전체가 흔들렸다.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박아버린 호랑이의 힘이었다.
놈은 객차에 있는 우릴 향해 아가리부터 들이밀었다.
마대가 꽂혀있어, 괴수를 보는 듯했다.
그 마대를 잡고 버텼다.
놈이 세차게 고개를 털어대 나는 이리 박히고 저리 박혀댔다.
그러다 팽하고 나가떨어졌다.
마대가 빠진 것이다.
괴기스런 비명이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대가 빠지며 오른쪽 눈깔도 같이 딸려왔기 때문이었다.
하, 거짓말 조금 보태 내 얼굴만 한 눈깔이었다.
“아휘, 괜찮아? 다친데 없어?”
별 탈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가 찜찜했다.
화장실 갔다 밑 안 닦은 기분이다.
대체 뭣 때문이지?
“나 있고, 아휘 있고, 가방 있고, 토끼 있고, 코코 없고... 코코? 아휘야, 코코 어딨어? 코코?”
호랑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강장 구석 의자 밑, 발발 떨고 있는 코코가 목적지였다.
“코코!!! 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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