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40

*
“이리로 오란 말이야? 아휘!!!”
말을 듣지 않았다.
닫힐 리 없는 문을 가지고 낑낑대기만 해댔다.
제 나름으로 역할을 하고픈 모양인데,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서둘러 향했다.
그러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벌써 건너 칸으로 넘어온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이대로라면 놈이 먼저 아휘에게 도착할 터였다.
지하철 전체가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우리와 호랑이가 바닥으로 내팽겨질 정도의 거대한 힘이 가해졌다.
“치, 치타?”
객차 밖으로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족히 수십 마리나 될 듯한 침팬지들이 지하철에 일렬로 붙어, 밀고 당기기를 해대는 중이었다.
그 중엔 원숭이와 고릴라도 꽤나 섞여 있었는데, 그 사이를 치타가 바쁘게 오가며 박수를 쳐댔다.
꼭 독려를 해대는 형국이었다.
뭔 조화란 말인가?
실제인가?
치타가 저 많은 유인원들을 데려왔단 말인가?
저들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동물의 왕과 맞선다는 것인가?
소름을 넘어선 기묘한 미스터리였다.
그것 외엔 도무지 설명되는 건 없었다.
더 놀라운 건, 반응속도였다.
넘어졌던 호랑이가 일어서려고 하면, 그 타이밍에 맞춰 지하철을 흔들어댔다.
물론 우리도 계속 넘어졌지만, 놈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막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시간을 벌었다.
호랑이가 허둥지둥 해매는 사이, 나는 바닥을 기어 아휘를 꽉 붙들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비된 것처럼 넋이 빠진 꼬맹이였다.
그 순간, 코코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휙하고 던졌다.
비상 망치였다.
하, 아주 용감무쌍하고 똑똑한 꼬맹이들이라니까!
이미 금이 가있던 유리창은 금세 깨졌다.
얼른 꼬맹이들을 내보내고 나도 빠져 나왔다.
우리가 나온 것을 안 유인원들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 호랑이에게 던져댔다.
수백 개나 되는 돌 미사일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놈은 맛탱이가 돌아버릴 정도로 얻어맞아야 했다.
객차는 밀실과 같아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치타!”
치타가 지하철 끝 객차로 나를 이끌었다.
출입문이 열려있는 걸로 봐선, 호랑이는 이곳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바닥에 있던 스크린 도어를 세워 급히 막았다.
그걸로는 부족해 소방호스를 빼내 칭칭 감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또 쇠 기둥 여러 개를 지지대로 세워, 무너지지 않게 했다.
“어떠냐, 새끼야? 끄떡없을 것이다!”
호랑이가 막힌 출입구를 쳐댔다.
늦었다.
지 딴에도 어이가 없는지, 축 처진 눈꼬리로 입맛만을 다셔댔다.
이로써 놈을 완벽히 가두었고, 나와 치타가 하이파이브로 승리를 자축했다.
“치타, 너 혹시 아까 밥 나눠 준 것 가지고 다시 돌아온 건 아니지? 말이 안 되잖아! 네가 은혜를 알겠어? 의리를 알겠어? 도대체 이런 이쁜 짓을 어떻게 한 거냐고?”
그제야 유인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들 박수를 쳐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떤 침팬지는 아휘를 목마 태워 춤을 춰대기도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무척이나 무서운 광경이었겠으나, 지금만큼은 축제의 한바탕이었다.
“암튼, 네 덕분에 우리 모두 살았다! 믿고 있었다구!”
어떻게 인간과 짐승이 합동으로 맹수를 처단했다는 것인가!
사람만큼이나 똑똑한 유인원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인가!
아니다.
이번 일은 꼭 지능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호랑이에게 당해왔던 것을 이번에 통쾌하게 복수를 한 건 아닐까 싶었다.
훗,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한데,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말이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인들, 누가 뭐라 할 쏘냐.
살았으니 충분한 것을!
“니들 혹시 타잔 알아?”
난 마치 타잔이 된 것 마냥, 아아아! 를 외쳤... 아기 울음이 들려왔다.
아니, 고양이 울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호랑이도 울어 제쳤다.
어떡하든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는데, 곧 까닭을 알게 되었다.
“하, 새끼들이 있었던 거야?”
광고판 뒤쪽 벽 구멍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나왔다.
코코보다 작은 몸집의 아기 호랑이들이었다.
잔뜩 들어찬 겁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오직 호랑이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 돼!”
성격 급한 고릴라들이 공격하려 했다.
두 팔로 막아서자,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치타, 너 내 말 알아듣지? 쟤네들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줘. 새끼들이잖아. 어차피 위험하지도 않아.”
누가 봐도 어미와 자식들이었다.
호랑이와 새끼들은 서로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되었다.
본연의 끌림을 무슨 권리로 막으랴.
“부탁한다, 치타. 저들을 만나게 하는 게 좋겠어.”
치타는 내 말을 알아들었고, 이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었다.
고릴라들이 물러섰다.
내 뜻을 이해한 것이리라.
“고마워, 치타. 다들 고마워. 진심이야.”
길을 터주자, 아기 호랑이들이 아장아장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랑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어디까지나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든 느낌이다.
다시 조우하게 된 호랑이 가족은 지하철 외벽을 사이에 두고 기뻐 날뛰었다.
서로를 만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물씬 풍겼다.
“아휘,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어?”
훗, 기특한 꼬맹이.
아휘와 내가 깨진 창틀로 새끼들을 넣어주었다.
서로가 핥고 빨고 하기 바빴다.
어미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새끼들이 빨았고, 새끼들 이곳저곳을 확인하는 어미였다.
토끼 고기를 던져주었다.
코코가 멍하고 짖긴 했으나, 반대한다는 뜻으론 읽히지 않았다.
“어서 먹어. 체면 차리지 말고.”
어미가 뜯어 입안에서 조물조물 거리다 건네주자, 새끼들이 환장한 듯 달려들어 먹어댔다.
무척이나 굶주렸던 것 같았다.
지금 보니, 코끼리처럼 보이던 호랑이가 왠지 초라해 보였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있는데다, 색이 바란 줄무늬 털이 숭덩숭덩 빠져 있었다.
어미도 한참을 굶주려 있던 것이다.
자식들 배 채우는 것에 자신은 오직 침만 닦아냈다.
망설였다.
아주 솔직히, 갈등이 되었다.
남은 토끼 고기는 두 개뿐이다.
하나를 더 주자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뭔가 좀 가슴이 쎄했다.
“하, 그런 눈으로 보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하나 남은 어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눈 하나를 박살낸 것도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해, 토끼 하나를 또 던져 주었다.
“네가 먹어. 새끼들은 저걸로도 충분해. 어서 먹으라니까.”
고기를 씹는 어미였다.
그것조차 새끼들에게 먹이려 했다.
알게 되었다.
호랑이는 우리를 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그저 먹이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그거지 않냐며 하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우리를 잡아 제 자신이 먹으려 했다면, 한쪽 눈을 잃는 순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끼들을 살려야 했기에, 끝까지 쫓지 않았나 싶었다.
뭉클했다.
모성의 힘이었다.
유인원들도 모두 만족한 모습들이었다.
아, 이 느낌도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긴 하다.
하지만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지 싶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살아가기 위해 버텨야한다는 것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휘, 코코. 가자. 나도 이젠 우리 엄마 좀 만나고 싶다.”
훗, 아까 하려다 만, 아아아! 를 내질렀다.
유인원들이 곧잘 따라했다.
**
역 밖은 이미 환해져 있었다.
어젯밤에 왔는데, 호랑이와의 사투로 꽤나 시간을 지체했다.
아, 나오기 전 지지대로 받쳐두었던 쇠기둥은 치워놨다.
그대로 뒀다간 객차에 갇혀 죽을 호랑이 가족이기에, 빠져나올 틈을 마련했다.
몇 번만 부딪혀댄다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잘 가, 치타. 엄마 아빠 말 잘 들어.”
유인원들은 나무를 타는 특유의 몸놀림으로 무너진 건물을 타고 잔해를 넘어, 사방으로 잽싸게 나아갔다.
치타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모가 재촉해댔다.
자식, 은혜도 알고 의리도 알고 정도 알고 있었다.
“가자, 독산동으로.”
이제 지하철역으로 따지면 세 정거장 밖에 남지 않았으니,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허벅지가 검게 변하고 있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하긴 한데,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찰나에, 정체불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휠체어를 탄 노숙자 꼴로, 부탁을 들어 달라 간청을 해왔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소리도 해댔다.
“자네 다리를 그대로 뒀다간 잘라야 할 거야. 내 부탁을 들어주게. 그럼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해주겠네.”
노인의 부탁은 나를 죽음의 길로 이끄는 거였다.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자를 순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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