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44

*
“오,”
안경잡이가 돌린 탄창 구멍과 내가 다시 돌린 탄창 구멍은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뭔가, 공교로웠다.
“사,”
다른 점이라면, 총알 구멍에 스크래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즉, 안경잡이 구멍엔 스크래치가 있었고, 내 것엔 없었다.
그것 하나로 총알의 유무를 판단할 순 없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삼,”
두 구멍엔 애초부터 총알이 없었을 수도, 또는 안경잡이 구멍엔 없었는데, 내가 돌린 구멍에 있을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이,”
이쯤 되니 괜한 짓거리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시험 정답을 찍을 때, 처음 생각한 것이 맞는데 괜히 바꿨다가 틀린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시부랄,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정말 괜히 바꿨나?
“일!”
순전히 감이었다.
안경잡이 구멍을 바꿔야 한다는 감이 문득 들었을 뿐이다.
난 오줌을 살짝 지린 후, 당겼다.
철컥!!!
그래서, 그러므로, 그렇기에, 난 살았다.
83%의 죽을 확률을 뚫고 세 번 연속으로 살았다니!
대박 운수대통!
다른 말이 필요치 않았다.
내 고추의 지린내가 향기 같았다.
이렇듯 살아있다는 건, 참으로 향기로운 기적이었다.
“이제 옥상 문을 열지 그래?”
외찾사는 내가 무덤에서 나왔던 때보다 더 놀라 있었다.
경외감!!!
그 속엔 충격과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내 목숨 줄이 길지는 몰랐을 것이다.
“가죠.”
“잠깐...”
탕!!!!!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천장 벽을 뚫고 들어갔다.
조금 전 안경잡이가 돌린 탄창 구멍에서 발사된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총알이 들어있었군... 미친 새끼들.”
하, 내 감을 믿고 바로 직전 바꾼 것이 신의 한수였다!
**
옥상으로 오르니 꽤 많은 사람들이 한데 뭉쳐 있었다.
주문 같은 것을 읊조리고 있었는데, 뭔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피켓과 현수막엔, ‘우리를 구해주소서!’ ‘당신의 별로 데려가 주세요!’ ‘나는 외계인이다!’ 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저 짓을 밤낮없이 한다는 것인가?
“저런 식으로 부르면 외계인이 와준다는 거요?”
“오지 않는다는 법 있습니까?”
“말을 말지. 하니는 어딨어요?”
“테스트를 통과하십시오.”
허리가 젖혀지도록 웃었다.
욕조차 뱉지 못할 정도였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데다 꾸역꾸역 50층까지 올라왔는데, 그놈의 테스트를 또 받으라는 것이다.
“하니 어딨어? 엄마 아빠 어딨냐고?”
“테스트를 통과하면 알려드리죠.”
“지금 재밌지? 스릴 만점이라 아주 재밌어 죽겠지? 이 지랄들을 떨면서 당신들이 대체 얻는 게 뭐야? 선택을 받았다는 증명? 그걸 누가 확신하는데? 외계인이라도 직접 만난 거야? 그놈들이 사람 목숨 갖고 놀라고 했어?”
“목숨 갖고 노는 게 아닙니다. 우린 단지 선택받은 자를 가려낼 뿐이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니들이 가려내는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만 묻자. 여기 대충 100명 정도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 전부 테스트를 통과한 거야? 죽지 않고 선택받았다고, 그래서 외계인한테 살려달라고 비는 거야? 말이 안 된다는 걸 왜 몰라? 이럴 시간에 바다로 가야 할 거 아냐!”
나와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적정선이라는 게 있을진데, 외찾사는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어쩌면 나의 오지랖일 수 있었다.
한번 박혀진 신념을 내가 무슨 수로 허물어뜨리겠는가!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제일이겠지.
그러나 인류를 멸망시키는 놈들에게 희망을 가진다는 건, 틀린 것이다.
그 틀린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이들은 알아야 한다.
외찾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단 말인가?
왕따 지옥에서, 취업 지옥에서 살아온 나보다 더 못한 삶이던가?
그렇기에 지금 지옥을 만든 놈들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
인간을 죽이는 놈들은 희망이 돼서는 안 된다.
“이번이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하, 끝까지 가겠다고... 안 한다면?”
내 얼굴로 총구가 겨눠졌다.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들은 외계인에게 악성으로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내가 죽어야 이 지랄들을 끝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뭐야?”
옥상 끝으로 향했다.
줄다리기에 쓰일 법한 밧줄 두 개가 난간 기둥에 묶여 있었다.
“하나를 선택한 후, 뛰어내리면 됩니다.”
“번, 번지점프?”
“당신이 선택된 자라면 살 것이고 아니라면,”
“나는 산산조각 나겠지.”
“선택하세요.”
밧줄은 빨강과 파랑으로 구별만 될 뿐, 두께와 길이는 똑같았다.
다만, 중간이 끊어진 하나가 있을 뿐이다.
확률로는 50%,
말 그대로, 죽거나 혹은 살기!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하고 까마득해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들개들과 놀고 있는 아휘와 코코가 섭섭했다.
난 죽을 것 같은데 희희낙락 뒹굴고 있다니.
옥상을 주시하는 노인을 죽이고 싶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빌어먹을 노친네. 테스트를 알고 있던 거였어. 그러니까 저렇게 놀라 있겠지. 내가 여기까지 올 거란 걸 예상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도 하니를 데려와 달라고 해?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딱 기다려. 멀쩡히 내려가서 아구창을 날려줄 테니까.”
“선택했습니까?”
안경잡이가 공이를 잡아당겼다.
망설이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빨강과 파랑... 파란 것과 빨간 것... 매트릭스의 네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나보다는 좀 편했을 것이다.
그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요받지만, 난 죽음을 강요받는 것과 같으니.
그래, 선택하자.
어느 것을 잡을까, 알아 맞춰보세요, 삐빠뽕!
50층은 몇 미터지? 63빌딩이 250미터쯤 되니까... 그보다 13층 낮으니까... 대충 200미터쯤 되려나?
시팔, 이게 뭔 필욘가?
200미터든 2미터든 간에, 내가 선택한 파랑 밧줄이 끊어진 거라면, 높이 따윈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산산조각이 날 테니!
“마지막이라고 했다.”
“네.”
“하니는 이곳에 있는 거지?”
“네.”
“저...”
“또 뭡니까?”
“줄을 바꿔도 되나? 아무래도 빨간 줄이 계속 땡기는데?”
“뛰세요.”
“거참 매정하게시리...”
이내 난간에 오르자 바람이 휘돌았다.
부들부들 다리가 떨렸다.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을 찾았다.
심지어 외계인한테도 빌었다.
내가 선택을 받은 자라면 날 살려라, 개새끼들아!
“줄 꽉 묶은 거 맞지? 중간에 풀리는 거 아니지?”
“셋 셀 동안 안 뛰어내리면, 죽습니다. 셋,”
뛰었다.
부릅떴다.
마지막일 수 있으니, 세상을 눈에 담았다.
내 비명이 천지를 돌고 도는 사이, 독산동 시장거리가 보였다.
내 쪽으로 돌아보는 이가 어머니였으면 했... 아니었으면 좋겠다.
자식이 죽는 광경을 보여서는 안 된다.
중간쯤 떨어졌나?
날아가던 까마귀 떼를 가로질렀다.
땅과 하늘이 자꾸 자리를 바꿨고, 아휘와 코코가 박수를 쳐댔다.
돌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떨어지는 거야???”
밧줄 길이가 200미터 넘는 것인가?
이쯤 떨어지면 턱! 걸리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하염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돌바닥이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 안 돼!!!"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
순간, 위로 솟구쳤다.
돌바닥에 내 손이 닿을락 말락할 때였다.
건물 외벽에 부딪혀 창들을 우수수 깨뜨렸다.
햇빛에 반사된 빛들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오로라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한 빛들을 마중삼아 밑으로 미끄러졌다.
그래서 그런가?
산 것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철퍼덕!
어느 순간 뚝 떨어졌다.
몸에 묶인 줄을 내 스스로 푼 것이다.
파란 줄은, 생명줄이었다.
제정신이 안 돌아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저 까마득한 곳에서 떨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풋, 웃음을 뱉었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멀쩡한 것인가!
어찌 이리 감격스러운 것인가!
어찌 이리... 어찌 이리 눈물이 나는 것인가.
“엄마... 아들 살았어...”
그러나저러나 저 빌어먹을 50층을 또 올라야 하니, 암담하기만 했다.
이제껏 잠잠하던 허벅지가 아파오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것들이 아프다며 괴성을 질러댔다.
뭐 어쩌겠는가.
하니를 데려와야지.
그때였다.
안경잡이를 비롯한 외찾사 모두가 건물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엔 하니도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하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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