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나라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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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얘기해 봐요. 회사 놀이가 뭐예요?”
주변엔 온통 회사 사무실에서 쓰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즉, 회사 놀이하며 혼자 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넥타이부터 고쳐 매는 거였어요.”
“회사원답게?”
“네, 회사원답게요.”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고,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누구 것인지 모르는 백팩까지 주워 매니, 난 영락없는 회사원으로 바뀌었다.
훗, 그토록 바라던 그 모습을 지구가 망해가는 시점에서야 이룬 것이다.
시발, 오늘 하루도 파이팅이다!
9시.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이미 출근해있던 나와 똑같이 생긴 지구들이 담소를 나누다 나를 맞이한다.
“똑같이 생긴 지구들?”
“이 사람아, 왜 이리 이해를 못해? 혼자 고스톱 치는 것 마냥 자리 옮겨 다니며 혼자 놀았다는 거잖아. 내 말이 맞지?”
“네. 대리도 됐다가 팀장도 됐다가 남자도 됐다가 여자도 됐다가, 저 혼자 쇼를 한 거죠.”
“혼자? 바빴겠네?”
“시간은 잘 가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엔 뭐 했어?”
“출근하자마자 바로 업무 모드로 돌입했죠.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평소에 꿈꾸던 삶이었으니 허투루 보낼 순 없더라고요.”
난 3개월 전부터 추진하고 있던 일을 확인한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기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 대리, 미국 센트럴 컴퍼니에서 온 거 있지요? 그것 좀 볼까요?”
“몇 가지만 보충해서 그쪽과 협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 대리라고 불린 또 다른 내가 업무보고를 한다.
나는 국제 정세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시장의 변화, 물가변동률과 각국의 정치상황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몇 가지 의견을 보탠다.
아, 고생한 정 대리의 어깨를 쳐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수고했어요. 이거 확인하느라 데이트도 못 했겠어요?”
“저 장가 못 가면 팀장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사무실의 모든 지구들이 웃는다.
가벼운 농담으로 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참고로 난 회사 내 핵심 부서인 국제교섭 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
입사 7년차에 팀장까지 승진한 것은, 아직 대리 딱지를 떼지 못한 7명의 입사동기들보다 확연히 빠른 것이다.
10시 30분.
회의실에서는 여자 지구가 각 자리마다 커피를 놓는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말아요. 회사에 일하러 왔지, 커피 타러 온 거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각자가 마실 것은 각자가 준비하는 걸로 합시다.”
그동안 막내이자 여직원이 으레 했던 회의실 음료세팅은 구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며, 팀원들의 의식을 환기시킨다.
내가 겪어온 꼰대들과는 다른 차별성으로, 팀원들을 부하가 아닌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역시 우리 팀장님이셔!”
회의는 모든 팀원들이 서로간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며, 내용 있는 회의가 되게끔 이끈다.
‘나만 믿고 따라와!’ 보다 ‘우리 함께 해볼까!’ 라는 것이 내가 세운 팀플의 모토다.
그 출발은 동료들의 얘기를 듣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좋은 의견이군요. 구체적인 수치를 첨부하면 더 좋겠네요. 피피티는 내가 준비하죠.”
12시
점심시간이다.
오전 회의는 이쯤에서 중단한다.
잘 쉬고 잘 먹어야 업무 능력도 향상되는 법!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최소한 밥만큼은 거르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또 뭐 먹죠?”
“저쪽에 파스타 집 새로 오픈했던데 거기 가볼까요?”
“간단하게 김치찌개나 먹으러 가죠.”
“만날 김치찌개 아니면 된장찌개, 지겹지도 않으세요?”
“그럼 뭐 먹어요?”
“전 그냥 아무거나.”
“그래, 아무거나가 정답이다.”
“우리 같은 회사원들, 매일 점심때만 되면 똑같아요. 이런 고민 좀 안 하고 살면 안 되나?”
“내 말이.”
매일 먹는 점심은 그 메뉴를 정하는 것도 꽤나 수고스럽다.
행복한 고민!
메뉴를 정하고 싶어도 못하는 전국의 수많은 백수들에겐 꿈같은 일이다.
14시.
팀에서 추진했던 일이 매우 흡족한 결과로 이어진다.
모든 지구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서로를 격려한다.
그동안의 고생에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러분들이 모두 고생해준 덕분입니다.”
“팀장님 또 그러신다. 이게 다 팀장님께서 저희들을 잘 이끌어주신 덕분이죠.”
16시.
회장이 직접 방문해 결과에 대한 치하와 포상금을 준다.
“팀장님, 미리미리 축하드립니다. 부장 승진!”
“이 사람들이.”
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웃지만, 사실 부장 승진 일순위로 올라선다.
안주하진 않는다.
이 사회는 정글과 같다.
내가 먹히지 않으려면 부단히도 노력해야하는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기에, 퇴근 후에도 나를 업그레이드할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18시.
“자, 모두 퇴근들 합시다.”
“전 좀 일이 남아서요. 먼저들 가세요.”
“우리 팀 야근 없는 거 몰라요? 팀장님 방침이잖아요. 퇴근 시간은 칼같이, 6시 이후는 노터치. 그쵸, 팀장님.”
“저 먼저 갑니다.”
내가 먼저 퇴근을 한다.
팀원들에게 괜한 눈치를 줄 필요는 없다.
이로써 나인투식스의 회사원 일과는 마무리된다.
아, 퇴근 후 자기 개발을 위한 운동과 최신 트렌드를 공부한다.
“회사놀이가 그런 거였군요?”
“네. 전 제 상상 속에 있는 제 모습에 도취되었어요. 딱 맞는 옷을 입은 양 그럴 듯 했으니까요. 그런데 곧 현타가 왔어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미치지 않기 위해 한 건데, 결국 전 미치게 됐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퇴근하는 모습으로 사무실을 나가던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었던 팀원 지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거죠. 현타의 시간이 시작된 겁니다.”
능력 있는 회사원의 모습은 침공당한 사무실을 보고는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그러니까 나란 놈은 상상이 아니면 절대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기가 찼다.
시간을 보내기 위한 회사 놀이는 그 뼈저린 현실을 일깨워 줄 뿐,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혼자 고스톱 치는 것처럼 혼자 하는 회사 놀이, 뭔가 좀 외롭고 쓸쓸하네요.”
“고독이 느껴지는군.”
“고독뿐이겠어? 절망감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힘내요, 지구씨. 좋은 날 금방 와요.”
“그래요. 계속 노력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기회가 올 겁니다.”
“자, 우리 지구씨를 위해 박수 칩시다.”
지들끼리 주고받고 지들끼리 맞다며 웃어대는 치료실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른다.
힘내라고?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이런 말들을 내가 죽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개소리 지껄이네.
난 동정 따윈 필요치 않아.
난 그때 미래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좋은 날 올 거라며 힘내라는 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댔다.
남의 심정도 모른 채.
**
“사실 나 백수예요.”
회사 놀이를 끝낸 다음 날 미래씨에게 고백을 했다.
그때 미래씨는 치유실 사람들처럼 힘내라고 했다.
“나는 한 번도 회사라는 곳에 다녀본 적이 없어요. 못 다녀봤죠. 기회가 아예 없었거든요... 미래씨는 지구가 침공 당하기 전에 뭐했어요?”
- 회사원이었어요.
“군인이죠?”
- 직업 군인이에요. 회사원이랑 똑같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했겠네요. 나인투식스? 주 5일 근무?”
- 뭐 대부분은.
“휴가는 어디로 갔어요?”
- 바다.
“바다... 바다는 정말 넓은 가요?”
- 안 가봤나요?
“난 한 번도 휴가라는 걸 가본 적이 없거든요... 난요, 사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어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런 삶... 평범하게 사는 거.”
- 평범함이 꿈인가요?
“꿈이 돼버렸죠, 평범함이... 미래씨처럼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거예요. 휴가 때면 바다로 놀러 가서, 내 아내와 그 아내를 닮은 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걷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근데요, 그게 가장 힘들다는 걸 알게 됐어요. 취직부터 해야 할 수 있는 건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다 되는데, 나한테는 가장 힘든 일이 돼버렸어요.”
- 힘을 내요, 지구씨. 다시 기회가 있을 거예요.
나는 피식 웃었고, 그와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그 전에도 수없이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그 후 난 이성을 완전히 잃었고, 그녀와의 유일한 소통도구였던 무전기를 박살내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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