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31화. 통일 시슬라 제국의 마지막 핏줄(2)

- 산클루즈 공국 수도
카마수트라 공국과 오벨론 공국은 수 세기 동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때는 우호적인 동맹국이었지만 근래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역과 외교에서의 갈등이 점차 누적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서서히 악화일로를 걸었다.
산클루즈 수도의 워프 게이트에 도착한 카인은 엄격한(?) 입국심사를 받고 도시에 들어섰다. 고위 작위를 가진 귀족은 쉽게 입국 시킬만한데도, 인접국가의 사람에게 만큼은 유난히 까다롭다.
입국해서 어떠한 정치활동이나 군사적 활동을 못하게 막기 위해서라나?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거나 기밀을 빼내가는 스파이들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었고 오벨론 공국으로서는 자국의 안위를 위해 타국인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나드는 워프게이트에는 이들에 대한 검문검색이 대폭 강화되었고, 외국인의 정치, 군사적 활동에는 무거운 제재가 가해졌다.
만약 카마수트라 공국 4대 가문 중 하나인 게오르그 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며칠은 더 입국 심사소에 발이 묶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군.
“여기인가?”
카마수트라 공국보다 더 발전한 도시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나름 이곳만이 가진 건물의 특색이 있었다. 높지는 않지만 건물들 하나하나의 지붕이 모두 뾰족하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바로는 산클루즈 공국은 건국 초기부터 몬스터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당시 공국의 왕은 태화국의 여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덕분에 공국은 큰 위기를 모면했고, 이후 태화국의 상징인 태양을 기리고자 건물들의 지붕을 뾰족하게 지었다고 한다. 물론 태화국 입장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사탕하나 물려주었을 정도의 도움이었지만 말이다.
“장시간 움직였더니 옆구리가 쑤시네.”
카인은 눈을 찡그리며 정복 안으로 붕대가 감겨져 있는 갈비뼈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붕대를 새로 교체할 정도는 아니겠지?”
죄인 비스마르크 혈족의 압송 하루 전이었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주요한 일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휴- 그냥 버티자. 체내에 극소량 남아있는 혈의 인자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카인은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도시 정중앙을 가르는 대로변에 있는 전망 좋은 숙소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뭐··· 산클루즈 공국의 왕실감옥을 뚫고 들어가 만나볼 수는 없으니깐, 우선 얼굴이라도 한 번 봐 볼까?”
내일이면 창문으로 보이는 대로를 통해 압송이 진행될 것이고, 많은 공국의 백성들이 현장을 보기 위해 거리에 나올 것이다. 카인은 숙소 2층의 창가에서 죄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후에 기회가 있으면 틈을 노려 만남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음? 이건?’
익숙한 마나의 잔향이 살짝 카인의 코끝에서 맴돌고선 사라졌다.
“응? 그럴 리가 없겠지.”
“도련님-”
“도련님-”
“헛- 또 왔어?”
카인의 정복 앞주머니에 달린 것(?)들로 그의 높은 신분을 확인한 숙소 여사장은 과도하고도 불편한 친절(?)을 연신 베풀었다. 이로 인해 카인은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일찍 잠들기로 했다. 이후로도 문밖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매혹적인(?) 음성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
.
.
이튿날 오후 카인의 예상대로 죄인의 압송과정을 지켜보고자 많은 시민들이 대로에 나와 거리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뿌아앙- 뿌아앙-
경쾌한 팡파르를 울리며 북적북적한 대로를 뚫고 지나가는 수십의 병사들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죄인을 실은 철창마차가 천천히 호송되고 있었다.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비스마르크 후손아.”
철창 안의 죄인은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카인이 아는 누군가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헝클어진 흰머리, 남루한 옷차림···
“저 남자, 광인 할배 아냐?”
물론 정확치는 않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이기에 기억 속의 모습이 왜곡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느낌만은 완전 비슷한데 말이야.”
카인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숙소에서 급히 나와 철창마차의 동선을 쫓아 빠르게 움직였다.
‘저 할배가 왜 여기에···.’
겨우 근접해서 철창 사이로 본 모습은 이전 산속에서 3년을 같이 생활한 광인 할배가 맞았다.
미쳤네.
원수의 후손이 코앞에 있었는데도 몰랐다. 아직 복수의 대상으로 확정 짓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살 때 이름이라도 물어보는 건데···.’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카인은 빠르게 근처 서점으로 이동해 관광지도(?)를 구매했다.
관광지도가 아닌 정밀한 지도는 국가에서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인은 관광지도를 이용하여 대략적으로 철창마차의 호송 동선을 가늠하여 계획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마차로 태화국까지 최단 거리로 계산하면 총 이동기간은 대략 10일 정도, 만약 태화국의 병사가 마중 나온다고 가정하면 5일안에 마차에 접근해야 한다.’
태화국의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은 카인이었다.
‘5일이라··· 저들의 휴식지점은 대략 두 곳 정도로 예측되긴 하는데···.’
관광지도로 가늠했을 때 마차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은 대략 두 군데로 좁혀졌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천천히 계획을 짜고 다시 나오자.’
카인은 이동하는 철창마차를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어머- 도련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숙소 여사장의 목소리였다.
“아··· 시내 구경 좀 하는 라고요, 저···저녁 안 먹습니다.”
여사장은 지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카인은 빠르게 손절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이성적으로 다가오는 적극적인 여성들은 불편한 카인이었다.
“후우-”
숙소에 도착한 카인은 관광지도를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몇 번이고 계획을 세웠다가 수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 이 방법밖에는 없어.’
카인의 책상 위에 놓인 관광지도에는 두 장소가 빨갛게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늦은 밤 어둠을 틈타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도시를 빠르게 벗어나 사라졌고, 곧 뒤이어 또 하나의 인형이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움직였다.
.
.
.
3일 뒤 빛 한 점 없는 평야 지대에는 그림자 하나가 어둠을 틈타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한 평야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이!! 다들 여기서 쉬지. 어차피 이쪽 지역은 시야가 중간에 걸리는 거 없이 뻥하니 뚫려서 접근하는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잘 보여.”
철창마차를 두고 맞은편에 있는 남자가 대답했다.
“그럴까? 삼일 밤을 셌더니 개피곤 하네.”
“그러게 이게 뭔 개고생이야, 이제 와서 멸망한 제국 황제의 혈족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며칠 안 남았으니, 다들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곧 수십의 남자들은 한곳에 모였고, 철창 마차 옆에서 근처 마른 풀들을 모아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군.’
검은 그림자가 잠시 멈춰 서 그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이한 지역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하늘은 짙은 구름에 가려 별빛과 달빛을 집어삼켜 칠흑에 가까운 어둠이 깔려 있었다. 드넓은 평야 지대에서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저들이 지펴놓은 불이 다였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불을 쓰며 인근은 밝아질지 모르지만 주변은 더 어두워지기 마련이지.’
어둠 속에서 남자는 씨익- 웃더니 이내 기척을 숨기고 사라졌다.
.
.
.
철창마차의 오른쪽에는 수십의 병사들이 모여서 떠들며 잡담을 하고 있었고, 불빛에 가린 왼쪽에는 어둠에 몸을 숨긴 남자의 말처럼 더욱 짙은 어둠에 가려져 눈앞의 돌부리조차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후우우우우우-”
숨을 참고 달려온 남자가 마차의 하단 부분에 붙어서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산속에서 그의 행적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할배다.
지금 내가 마차 옆에 붙어 있는 것을 과연 모를까?
‘알고 있겠지.’
마차와 거의 근접했을 때부터 카인이 오는 방향으로 등을 돌려 철창에 기대어 앉아 긴 그림자를 만들어 준 할배였다.
“왜 온 거냐?”
메마르고 갈라졌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카인의 귀에 들려왔다.
역시나 할배는 자신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소도 3년이나 키우면 정들어서 쉽게 못 잡아먹어, 하물면 인간인데 가는 길 마지막 인사정도는 괜찮잖아?”
막상 할배를 옆에 두니 고운 말이 안 나가는 카인이었다. 직접 보지는 않아도 미소를 띤 할배의 얼굴이 그려졌다.
“봤으니깐 이제 가거라.”
‘참, 정 없는 인간, 산에서 떠날 때도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더니만···.’
“할배가 비스마르크 혈족이 맞아?”
자조적인 목소리로 할배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차피 죽음을 앞에 둔 노인네가 숨길 건 없겠지, 맞다.”
카인은 이전부터 이해가 안 가는 부분부터 거침없이 질문을 했다.
“태화국은 어떻게 할배가 혈족이라고 확신한 거지?”
“10년 전에 제국의 황제가 지나가는 길을 노린 한 암살자가 있었지, 그게 바로 나다.
그때 몽타주가 그려졌었지.”
‘어휴 노인네 젊기도 해라. 10년 전이라 해도 나이가 많았을 텐데, 그런 위험한 강수를 두셨구만. 욕심도 많아.’
“이유가 뭐야?”
“지나가는 똥개조차 아는 이유를 뭣 하러 묻는 게냐.”
짜증 섞인 할배의 대답을 무시한 채 카인은 질문을 이어갔다.
“일반적인 이유 말고 진짜 이유 말이야,
그저 선조의 복수를 하려고 뛰어들지는 않았을 거 아냐.”
“후······.”
긴 숨을 내쉰 할배는 담담한 어투로 천천히 대답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지, 우리 시슬라 가문은 단 한 번도 백성들을 핍박한 적이 없다. 이렇게 1000년 이상을 세상의 이목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하는 가문이 아니란 뜻이다.”
‘뭐 그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가 죽은 뒤의 일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
“잘못된 역사라면, 혹시 선대에게 따로 가르침이 있었어?”
“아니, 가문 대대로 물려오는 역사서에 적혀 있었다, 선조 황제의 마지막 유언까지도 함께 말이야.”
“그럼 역사서는?”
“다 외워 버리고 불태웠다.”
“쯧-”
카인은 조그맣게 혀를 찼다.
‘치밀한 노인네 같으니···.’
그래도 하나만큼은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카인은 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할배, 선조 황제의 마지막 유언이 뭐야?”
“이제 돌아가라, 마지막 말동무가 되어 주어서 고맙구나.”
10년 전에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다. 죽음을 앞두고 숨길 것은 없다더니, 정작 중요한 것은 듣지 못했다.
망할 광인 할배!!
‘대략적으로 시기를 계산해보면 황제 암살 시도를 실패하고, 바로 숨어든 산속에서 나를 만난 거 아냐?
지겨운 인연이군, 안 그러냐 비스마르크?’
카인은 할배의 굽어진 등을 보며 잠시 비스마르크를 떠올렸다.
놈의 혈족이라니.
만약 녀석이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었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전생의 제국 황실을 떠날 때 황제의 나이는 80세였지만, 고강한 무위를 연마해서 그런지 얼굴은 그리 늙지 않았었다.
운동 한번 하지 않은 본인 역시 마나의 힘으로 128세까지 살지 않았던가.
‘뭐, 난 쭈그렁탱이 노인네였겠지만, 그건 그렇고.’
“할배, 죄 없는 가문이 멸족했어, 계속 산속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도대체 거긴 왜 간 거야?”
“······.”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갑자기 반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대화는 불가했다.
“이틀 뒤 밤에 오지.”
할배의 등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를 따라 카인은 어둠 속에 사라졌다.
“썩을 놈.”
등 뒤에서 나지막한 할배의 정겨운 욕이 들려왔다.
망할 노인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