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47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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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수트라 공국 왕실
“그동안 잘 지냈나? 카인공작.”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입 발린 소리를 하는 카인을 보며 아린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성격과 너무 다른 그의 언행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태화국 피의 축제에 자네를 보낼까 하네.”
‘설마 내가 아는 그 피의 축제?’
“보통 왕실 사람을 축하사절단으로 보내는 데, 이번만큼은 대신들이 불꽃휘장을 받은 카인공작을 보내는 게 좋다고들 하더군.”
“제가 감히 왕실의 인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
“짐의 생각 역시 그대가 가주었으면 한다.”
“대령 카인, 폐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래, 약혼한 아린 게오르그양과 함께 태화국으로 가서 카마수트라 공국을 빛내고 오거라.”
“넵 폐하.”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바라던 상황이 스스로 굴러들어 왔다.
‘내 생각과는 다른 방식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태화왕국으로 가게 됐군.’
고개를 숙인 카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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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국의 수도 워프 게이트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4공국(?)에서 각각 보낸 사신들을 맞이하는 태화국의 병사들이 보안과 입국심사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소문만 무성하시던 분을 실제로 보니 영광입니다, 카인 공작님.”
“소문은 항상 과장된 법이지.”
“약혼녀 분도 엄청 아름다우십니다.”
카인은 살포시 자신의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실에서 직접 하사한 하얀색 미니 드레스는 아린의 고운 어깨선을 드러내고 있었고, 가운데에 있는 큰 리본이 그녀의 얇은 허리를 잡아주어 마치 얼음나라의 빛나는 은발을 가진 여신이 인간계에 잠시 놀러 온 거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가 여자 복은 조금 있나 보군, 허허허-”
“아무렴요. 안쪽에는 태화국 왕실에서 미리 준비한 마차가 있으니 타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그러지.”
카인 게오르그와 아린 게오르그는 엄중한 워프 게이트의 심사를 가볍게 통과해 불꽃이 그려진 마차에 탑승했다.
마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다양한 가지각색의 화려한 불꽃모양이 각인된 거리가, 이동하는 마차를 축복하는 듯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번에 뭔가 할 거야?”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 한마디 없이 조용했던 아린이 갑자기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내가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생각해 둔 계획이 있다는 뜻이네.”
“응···.”
“알았어.”
내가 계획을 미리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계획은 수시로 바뀌는 법.
머릿속에 정해진 계획이 딱딱하게 굳게 되면 상황이 변했을 때 유동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아! 맞다!! 너는 모르겠지만, 과거 이곳에서 너를 본 적이 있었다.”
“알고 있어. 나를 뒤쫓아 왔었잖아.”
무표정한 아린의 편안한 대답을 들은 카인은 동공이 커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응?! 그걸 어떻게?”
“아마 골목길에서 놓쳤을걸.”
“맞아, 그랬었지. 따라가는 걸 눈치 챘던 거야?”
“그렇게 무식하게 대놓고 쫓아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카인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서 황당함을 담기 시작했고, 의문이 가득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그 골목길에서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아린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내 머리 위?”
“응 골목길에 있는 건물 난간을 붙잡고 올라간 뒤 위에서 너를 쳐다보고 있었지.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남자는 누굴까 해서 말이야.”
“그래서 감상은?”
“비밀, 이번 일정에 좋은 일이 생기면 알려줄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궁금한 척 해줘야겠지···?’
아린의 기대에 부응해주기 위해 카인은 입에 침을 바른 후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꼭 노력해보지.”
화려한 거리를 걷던 마차는 왕실에서 마련한 숙소에 곧 도착했고, 이른 저녁이었지만 둘은 바로 객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잘 수 있을 때 잔다.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전장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사신부대만의 독특한 생존 방식이었다.
이튿날 아침.
“후암- 푹 잤다.”
침대 옆 바닥(?)에서 일어난 카인은 침대 위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응? 어디 갔나?’
주변을 둘러보자 아린은 화장대 앞에서 본인을 치장하는라 정신이 없었다.
“언제 일어났냐?”
“여자가 준비시간이 남자랑 똑같은 줄 아냐?”
희망찬(?) 아침부터 비아냥거리는 아린이었다.
“눼이눼이- 저는 그럼 천천히 준비하겠습니다.”
갈수록 닮아가는 전생의 유일한 이성(?)친구이자 짝사랑했던, 통일 제국의 왕비 사일리 시슬라가 떠올라서 그랬던 것일까?
유독 아린 앞에서는 장난스런 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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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공국의 사신들은 태화왕국의 여왕을 순서대로 만나기 위해 긴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앞 순서인 키메스 공국의 사신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카인과 아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키메스 공국 사신양반, 여기는 중립지역이야, 그만 좀 노려보지?’
마음속의 말을 담아 카인이 더 강한 눈빛으로 사신을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휙 하니 돌렸다.
‘씁!! 별것도 아닌 게!!’
입 밖으로 말 한마디 내지 않은 채 나름 승리(?)를 거둔 카인이었다.
잠시 후 카마수트라 공국의 순서가 왔고, 입장하기 전 카인이 이상한 행동을 취했다.
“뭐 하는 거야?”
작은 목소리로 아린이 카인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흐흐- 그런 게 있어.”
태화국 왕실이 공국의 사신들을 맞이한 장소는 굉장히 화려했다. 주변은 모두 붉은색으로 가득했고 전에 맡아보았던 은은한 장미향은 물론 장소 곳곳에 오색빛깔의 불꽃이 오묘한 분위기를 내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태화국의 찬란한 불꽃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외형은 거의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로셀 에틀렌타.’
“카마수트라 공국에서 왔다지?”
“네 맞습니다.”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여왕은 말을 이었다.
“그대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강한 검사라고?”
“찬란한 불꽃 앞에서는 작은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그저 작은 기연을 얻어 강해졌을 뿐입니다.”
카인의 대답에 여왕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실렸다.
“음? 기연이라? 그게 무엇이더냐.”
“혈이라고 글자가 쓰인 동굴의 벽을 보았었습니다.”
“별일이 다 있구나.”
태화국의 여왕은 잠깐 한 곳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짐이 피곤하니 만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태화국의 피의 축제를 편히 즐기다 가거라.”
“찬란한 불꽃의 뜻을 받습니다.”
태화국 여왕의 알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아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카인에게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뗀 거야?”
카인의 손에는 불꽃휘장이 들려 있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서 확인은 했고?”
“응.”
카인은 손에 든 불꽃휘장을 오른쪽 앞주머니에 다시 착장했다.
“오늘 밤은 조금 바빠질지도 모르겠어.”
마차 안에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카인이었다.
***
카인이 나간 후 공국의 사신들을 맞이한 장소 근처에서 한 앳된 목소리를 가진 여성과 남성의 대화가 이어졌다.
“호오- 재밌는 얘기를 들었어.”
옆에 있던 붉은 망토를 걸친 중후하고 근엄하게 생긴 남자가 대답했다.
“알아볼까요?”
“그럴 필요까지 없다, 이미 내 새장으로 날아온 새 아니더냐. 오늘 밤 왕실로 부르거라.”
“찬란한 불꽃의 뜻을 받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
카마수트라 공국 사신의 배정된 숙소.
“뭐라고!!”
아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카인에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두 번 말해 줘? 그 늙다리 불꽃여왕은 가짜라고.”
“근거는?”
“나와 여왕은 구면이야, 하지만 불꽃 휘장을 뗀 나를 전혀 몰라봤지.”
“그거야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깐,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눈동자 색이 검었어. 화 속성이 10성 극에 오른 불꽃 여왕의 눈은 붉었었지.”
“흐음-”
“그리고 마지막, 그녀 옆을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던 남자가 안 보였어. 만약 진짜 로셀이었다면 절대 그 놈을 멀리 두지 않았을 거다.”
“그럼 진짜 불꽃 여왕은 어디 있는 거야?”
“아마 우리가 있던 장소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카인은 진짜 로셀이 흥미를 가질 내용을 그녀의 욕심 많은 마음속에 살포시 던져 주고 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라면 혈이라는 단어와 동굴 이 두 가지 단어에서 떠오르는 게 하나 있겠지.’
에시앙 에드워니아가 죽음을 맞이했던 동굴,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혈이라고 표지에 쓰여 있던, 현재 피의 세습을 얻게 된 마법서의 초안.
‘사실 약간 위험을 동반한 방법이긴 했지.’
하지만 카인은 알고 있었다.
욕심 많은 로셀이라면 절대로 그 내용을 다른 제자들과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남은 자신의 유산을 얻기 위해 빠르게 접근해 올 것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축제 전에 피의 세습은 이미 끝냈어, 하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피의 세습을 진행할 리가 없겠지.’
피의 세습은 굉장히 세심한 작업이 필요한 고위급 마법이었다.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마지막으로 피를 교환하는 순간 세습이 끝나는데, 그 행위를 왕국의 국민들과 공국의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한다?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피의 축제, 바로 이전에 세습을 완료한다.’
카인의 분석대로라면, 피의 세습은 더 이른 시기에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셀과 육체를 바꿔 여왕의 권한을 가지게 된 자가 피의 축제 이전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여왕의 권한과 세습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피의 축제 하루 이틀 전이 완벽한 시기일 터.
‘그렇다면 지금이 녀석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건데.’
세습이 이뤄지면 육체가 바뀌고, 가진 마나와 기억을 모두 전이한다. 하지만 그 육체에 적응하려면 최소 1년 정도가 필요할 거라고 해당 마법을 창조할 때 카인은 판단했고, 그 내용을 혈 마법 초안서에 적어두었다.
‘세습 이후 육체가 적응되기도 전에 억지로 힘을 끌어내 쓴다면, 기껏 교체한 육체가 버텨내질 못하겠지, 그렇게 되면 기껏 진행한 피의 세습을 다시 해야 하는 거다. 로셀’
앞으로 100년을 가지고 살아갈 육체를 고르는 일이다.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며 결정을 진 세습자인데, 그것을 버리고 새로 구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완벽한 분석과 이해를 바라는 마법사라면 말이지.’
카인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카인- 카인-”
“응?”
“혼자 생각에 빠지더니, 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냐.”
“뭐 결론은 진짜 로셀을 찾아서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걸 어떻게 찾아? 취임식이나 돼서야 나타날 텐데.”
“아니 곧 알아서 나타날 거야.”
“똑똑-”
“카인공작님.”
말하기가 무섭게 카인이 기다리던 손님이 예상대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찬란한 불꽃께서 카인공작과 약혼녀 분을 오늘밤 왕실로 초대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편안하게 쉬십시오.”
“헐!!”
문을 닫고 왕실에서 온 사람이 나가자,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젓는 아린을 뒤로한 채 카인은 미리 구매했던 태화국의 관광지도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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