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54화. 너 내 동료가 되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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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심사소에 올라온 보고를 들은 초록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눈빛은 싸늘했다.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이유로 왕국에 들어섰군.”
“그렇습니다, 거침없는 바람이시여.”
“의협심이 강한 남자라···.”
“흐음-”
잠시 고민을 하던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재밌겠어, 오슬람에 가까운 국경 입구까지 그들을 친히 배웅해 주거라.”
“거침없는 바람의 뜻을 받습니다.”
명령을 내린 남자의 입가에는 지독하게도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로셀, 네가 선택한 남자가 과연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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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까지 풀린다고?’
워프 게이트 입국 심사원이 돌아와서는 셋을 극진하게 밖으로 안내했고, 거풍(巨風)국 왕실에서 내어준 마차를 태워 국경까지 이동시켜 주었다.
‘크라우스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카인의 판단으로 지금의 상황은 썩 그리 좋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우선 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만다 동생부터 구하고 생각하자.’
“둘 다 잘 들어라, 왕국의 국경에서 나가면 최대한 소음을 내지 않는 것이 좋기에 먼저 말하는 거다.”
리안과 사만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말해도 되는데···?’
“카멜라니아가 오벨론 수도를 이미 점령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렇다면 사만다 동생의 소재는 크게 네 가지 중 하나일 거야. 첫 번째는 카멜라니아 공국의 전면에 있는 병사들에게 잡혀있는 거지, 일반적으로 각국에서 모은 용병부대 아니면 공국내의 제일 강한부대가 선봉에 선다.”
“교수님 생각에는 그곳에 있을 거 같으세요?”
“글쎄··· 현장을 보지 못해서, 확신하기 어렵구나. 두 번째는 수도 내에 남아 있을 오벨론의 레지스탕스 세력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 이야기를 들은 사만다는 기함하며 즉답으로 카인의 이야기를 부정했다.
“겁이 많은 아이에요, 그럴 가능성은 적어요.”
“그럼 마지막 세 번째는 전장을 피해서 계속 도주하고 있는 상태겠지.”
“교수님 제 생각에는 첫 번째와 세 번째가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카인은 그녀의 희망을 꺾고 싶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를 더했다.
“사만다, 마지막으로 기억해라, 동생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현장에서 동생의 죽음을 확인하고 마음이 무너진다면 전쟁지역에서 그녀를 데리고 이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카인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사만다가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야 해.’
살짝, 얼굴에 슬픔이 서린 사만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사만다는 아카데미 수석을 놓고 리안과 경쟁하던 학생이었다, 카인이 무슨 뜻으로 지금과 같은 얘기를 전했는지 분명 영특한 머리로 이해했을 터다.
‘쉽지는 않을 거다. 머리의 이해와 마음의 이해는 완전히 다른 법이니깐···.’
이후로 카인은 더 이상 사만다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홀로 머리에 있는 정보를 마음으로 옮겨 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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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국경에서 떠나는 우리를 친절하게 배웅하던 남자는 왕국에서도 상당히 직책이 높아 보였다.
‘끝까지 거슬리네···.’
분명 뭔가 있는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로셀과는 다르게 크라우스트는 대놓고 활동하지 않았다. 스승인 에시앙의 눈을 피해 항상 수면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한참이 지나 일어난 사건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그가 움직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교수님 어디로 가요?”
마음 급한 사만다가 발길을 동동거리며, 카인에게 길을 물어왔다.
카인의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눈에 담긴 것은 넓게 펼쳐진 완만한 산들과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평야지대.
‘산과 평야 지대라···.’
“평야 지대로 간다.”
카인의 선택에 사만다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말없이 그를 따랐다.
‘전쟁지역으로 들어가는데, 산속에 몸을 숨겨서 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사실 사만다의 분석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맞았다. 다만 시간에 따라 구출 타겟의 생존율이 달라지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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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론의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5일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기에 지칠 만도 했지만, 숨을 크게 헐떡이면서도 사만다는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잠시 대기.”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웠던 예술의 도시는 반파가 되어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굳이 불을 지를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선택의 시간이었다.
도시로 진입하는냐. 아니면 도주로를 예측해 이동하는냐.
‘도시 주변에는 딱히 몸을 숨을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
카인은 지형을 보면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사만다 동생은 운동을 취미로 하거나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제일 높은 가능성은?’
분석은 끝났고 답은 정해졌다.
“지금부터 도시로 들어갈 거야, 둘 다 잘 들어둬. 만약 정규군이라면 그러한 일이 적겠지만, 용병단이 선두에서 수도를 점령했다면, 도시 내의 상황은 생각보다 끔찍할 거야. 미리 각오해.”
“네, 교수님.”
“응, 오빠.”
리안은 사신부대에서 전장을 몇 번이고 경험했으니, 시체에 나름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사만다는 어떨지 모르겠군.’
“이동하자.”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도시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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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도시의 입구 허공에 매달려 있는 시체를 본 사만다가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내색하지 마라, 사만다.’
연신 들려오는 헛구역질 소리에도 카인은 사만다를 향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이 거기 누구야.”
눈앞에 군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인은 검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앞의 남자를 언제든 도륙할 기세로 쳐다보며 말했다.
“x발 너 죽고 싶냐? 딱 봐도 용병이지.”
앞의 남자는 두 손을 가볍게 들며 답했다.
“아-! 아-! 같은 편끼리 너무 기 싸움 하지 말자고, 안 그래도 레지스탕스 놈들 때문에 서로 예민하니깐 말이야. 게다가 네 일행도 속이 영 불편해 보이고 말이지.”
“신경 쓰지 말고 꺼져라.”
용병끼리는 서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철칙이다.
이렇게 다가오는 자?
베어버려도 전혀 상관없다.
군법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용병들끼리는 애초에 군법이라는 개념이 없다.
“왼쪽 길로 가면 식당이니깐, 아침이나 먹으러 가라고!”
남자는 살짝 길을 터준 채 왼쪽 길로 카인을 유도했다.
‘네놈 생각정도야 뻔하지.’
카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길을 막은 남자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제야 남자는 검집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영악한 놈들, 하긴 레지스탕스가 뛰어다니는 도시 안에서 누구든 의심하는 게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생존법이긴 하지.’
카인은 거리를 걸으며 좌우를 살펴봤다,
건물 허공에 매달려 있는 무수히 많은 시체들.
용병단이 도시를 점거하고,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많이 하는 짓이다. 이 행위는 남아있는 시민들에게 강한 공포심을 심어주어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막는 효과도 있다.
‘지독한 놈들···.’
전생에서도 전쟁을 떠도는 거친 용병들은 지역을 점령한 뒤 돈만 받으면 되기에 이후의 일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해당 도시를 복속한 국가는 얼어붙은 시민들을 달래는라 항상 곤욕을 치렀었다.
‘조금 전부터 사만다의 헛구역질 참는 소리가 안 들려오네, 이제 좀 적응하고 있는 건가?’
“사만다, 눈 감고 내 손 잡으면서 걸어.”
“고···마워, 리안아.”
“고맙긴, 난 군인이니깐 이 정도 광경은 지겹게 봐.”
“그래···.”
오로지 전방을 주시하고 경계하며 나아가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뒤의 상황은 전혀 모르는 카인이었다.
‘포로수용소부터 가 봐야 하려나.’
사실 정규군이 아닌 이상 용병들은 포로를 거의 붙잡지는 않을 터다. 그럼 대부분의 시민들은 민가에 그대로 숨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들 모두가 레지스탕스가 될 수 있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용병단이 꾸려놓은 임시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정규군이 아닌 용병집단의 최대 단점은 적아를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군 보급품을 1회용 집단에게 뿌리는 국가는 없겠지.’
군 보급품은 현 세계에서 나름 고급품에 속하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한 자산을 소속이 불명확한 용병에게 지급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미친 짓이다.
‘좀 더 안쪽으로 가 볼까?’
전장에서 흔하지 않은 여성 두 명의 등장이라면, 시선이 집중되기도 하려건만 주변에서는 단 한 명도 카인의 일행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출국하기 전에 망토를 사두기 잘했군.’
용병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사막지역의 전사들이 사용하는 검은 망토 3개를 구매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은 가린 카인의 일행이었다.
“어이!!”
카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려 보이는 소년 한 명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찾았네, 도움병사.’
용병단 내에서도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용병부대에서는 참혹한 전장에서 나이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저비용의 임금을 주며 사용하곤 했다.
“포로수용소 위치가 어디지?”
“어우 잘생긴 용병님, 몇 번이나 사전에 고지해 드렸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에서는 포로를 잡지 말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니까요.”
카인은 짜증난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럼 힘들게 잡은 걸 다 풀어 줘?”
“카멜라니아 공국에서 내려온 지시로는 잡힌 포로는 즉시 죽이랍니다.”
‘빌어먹을, 골치 아프게 됐군, 그래도 이 말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
카인은 굳어있는 표정을 풀고 가볍게 웃으며 소년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선 말을 이었다.
“애기야, 그런 얘기를 들으려고 내가 물은 게 아닌 건 알지?”
용병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고작 공국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봉급 따위를 받으려고 참전하지 않는다, 공국의 묵인 하에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전리품이 그들의 주요 목적이었다.
“캠프 뒤쪽 건물, 오늘 밤 11시입니다요, 용병님. 흐흐-”
소년은 조용히 말하고선, 앞 이빨이 두 개나 빠진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래.”
가볍게 그의 손에 동전 몇 개를 쥐여 주고선, 카인은 일행을 데리고 용병단 캠프와 조금 떨어진 비어진 건물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우-”
카인의 긴 호흡을 듣자, 주변을 살피던 사만다가 카인에게 물었다.
“교수님 뭔가 알아내셨나요?”
“일단 오늘밤 11시까지 여기서 대기한다, 그리고 포로를 사고파는 비밀시장이 열릴 거야.
거기에서 네 동생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네 알겠어요.”
카인의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일 처리를 보자, 리안과 사만다의 마음 한구석에는 조그마한 안정이 찾아왔다.
털썩-
이제야 긴장했던 심신이 조금 풀어졌는지, 사만다는 바닥에 털푸덕- 편히 앉았다.
‘똑똑한 애들이 꼭 전장에 오면 저런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니깐.’
사만다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삼킨 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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