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무너질수록 다가가는 진실

베주니 왕국으로 돌아오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에레그론드 왕국과의 교역로가 그동안 더 보수가 된 것인지 처음 왕국을 떠날 때보다 더 잘 정돈된 도로가 가장 먼저 일행을 환영하고 있었다.
일행이 왕국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이리스가 왕성의 G부대였다.
왕국을 떠나기 전 올리비에에게 들었던 대로 다시 운영을 시작한 것인지 이리저리 건물을 보수하고 있는 인부들과 돌아다니는 생도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이리스가 보였다.
“얘들아! 어서 와!”
훈련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인지 평소 입고 다니던 두꺼운 판금 갑옷과 손에는 투구를 들고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저씨! 어···? 아저씨 눈이···.”
“이리스, 반갑구나. 올리비에는 지금 남쪽에 가 있는 것이니?”
사실은 올리비에를 찾기 위해서 먼저 이리스를 찾아온 만큼 젠은 이리스에게 왼쪽 눈을 잃은 상황의 설명보다 올리비에에 대해서 간단하게 물었다.
“네! 출발한 지 며칠 안 되셨긴 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남부 전선에 도착하셨을 거예요.”
“고맙구나.”
젠에게 향하던 시선을 내려보자, 머리에 반을 붕대로 감고 있는 메이블이 눈에 띄었다.
“너도··· 많이 다친 거야? 머리에 붕대가···.”
메이블의 오른쪽 얼굴을 덮은 붕대를 바라보며 이리스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자 메이블이 양손을 들어 흔들었다.
“괜찮아, 금방··· 나을 수 있을 거래.”
“그것보다 망치는 새로 하나 산 거야?”
푸른 숲에서 잃어버렸다던 망치를 대신하듯 이리스의 허리춤에 달고 있는 처음 보는 망치를 보고 메이블이 검지로 가리켰지만, 이리스는 메이블의 얼굴에 오른손을 뻗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점점 오른손을 메이블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갈수록 이리스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어? 나 정말 괜찮아.”
이리스가 가까워지자 메이블이 뒤로 한 걸음 움직였다.
“너··· 정말 괜찮은···!”
뒷걸음친 메이블을 잡으려는 듯 이리스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이리스의 손가락이 얼굴의 붕대에 닿았다.
짝.
붕대에 닿았던 이리스의 손을 메이블이 제 손을 이용해 아래로 후려치자 작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 메이블?”
이리스는 메이블의 행동에 적잖아 놀랐는지 이리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그대로 나타났다.
“어···?”
당혹감은 이리스만 느낀 것이 아닌지 이리스의 손을 때렸던 오른손과 이리스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메이블의 고개가 다급했다.
“미안해···.”
일단 사과한 메이블의 답변에 이리스는 웃는 얼굴을 보이며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손이 메이블의 붕대에 닿은 순간 유달리 검게 물든 메이블의 오른쪽 눈이 번뜩였다는 걸 떠올리며 이리스의 시선이 레이너와 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그래서 아빠는 왜 찾으시는 거예요?”
“올리비에에게 가면 해결될 수 있으니 그렇단다.”
젠의 모호한 답변에 이리스의 의문이 바로 풀릴 리는 없었지만, 이리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국왕님꼐서는 지금 왕성에 계시니?”
둘 다 왕성에 있을 거라는 이리스의 답변에 젠은 주홍에게 의논할 것이 있다며 왕도의 성으로 떠났다.
대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메이블과 레이너에게는 여기서 기다려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남겼다. 이리스도 마저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할 일이 있기에 곧 발걸음을 옮겼다.
젠이 성으로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나자, 태화가 슈발리에와 함께 G부대로 찾아와 메이블과 레이너을 데리고 성으로 향했다.
“메이블, 몸은 어떻나?”
성에 도착해 호위를 맡은 슈발리에가 저 멀리 그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태화가 물었다.
“··· 전, 괜찮습니다.”
그대로 성안의 복도를 따라 걸으며 일행이 만들어 내는 발걸음 소리로 복도를 가득 메우기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가 입을 열었다.
“그럼 환청이나 환각을 본 적이 있는가?”
움찔, 대답 대신 왼손으로 오른팔을 한번 쓸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 모습을 주황색 눈동자 담은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왕국을 떠난 사이, 난 동쪽을 맡아 엘프들의 수복을 도왔다.”
그리고 크룩과 카인··· 두 장로에게 숲을 공격한 엔트들에게서 검은 마나석이 발견되었다 들었다.
“혹시, 그 마나석 중 검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은 마나석과 접촉한 적이 있는가?”
여전히 태화의 물음에 오른팔을 쓸어내며 조금씩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메이블의 입이 열렸다.
“네··· 마치 홀린 듯 손을 가깝게··· 가져갔는데 그것이 문제였던 겁니까?”
“그러고 ‘지금까지 버텼다’라···. 고생했다 메이블.”
태화의 짧은 말에는 답변과 걱정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너의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동이 트면 바로 남쪽 전선으로 출발할 생각이다. 하지만 너희를 부른 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도 끝의 문 앞에서 멈춘 태화가 몸을 돌려 메이블과 레이너를 바라봤다.
“너희들이 들어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끼익, 태화가 손수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메이블과 레이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자리에 앉아 있는 주홍과 젠이 보였다.
“자리에 앉으면 이야기 해주마.”
&&&
차를 마시고 있던 것인지 메이블과 레이너가 주홍에게 예를 표한 뒤 주홍의 부탁대로 젠의 옆자리에 하나둘 앉자 둘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 그래서 주홍, 태화. 전할 이야기가 뭐지?”
달그락, 젠이 찻잔을 탁자에 놓자 빈 잔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그럼, 두서없이 본론부터 들어갈게.”
“젠 너는··· 4년 전의 [2]왕국과의 모의 전투가 있던 날 생긴 그 일이 어떻게 끝난 거로 생각해?”
뒤로 땋아 올린 연한 빨간색 머리를 가진 주홍의 시선이 메이블과 레이너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메이블과 레이너에게도 함께 하는 질문이야.”
툭- 툭- 툭.
고민하듯 젠이 왼손으로 제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확실히··· 놈들이 그냥 퇴각할 이유가 없긴 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이 묵혀둔 의문을 다시 들춰보는 건···.”
스윽, 젠의 물음을 예상한 듯 젠을 비롯한 이들의 앞에 두께가 좀 되어 보이는 서류가 올려졌다.
“이건··· 그날의 전투 내용을 적어둔 자료군.”
“참고용으로 보면서 들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준비해 봤어.”
“그래··· 이때 나랑 호프가 있는 곳에는 오른팔에 용의 머리를 달고 있는 놈들과 그들의 자잘한 병력이 그리고 본성에 가까운 곳에는 아예 병력이 들이닥쳤었지.”
“맞아, 슈발리에 100명과 소서러 20명으로 구성된··· 제대로 구성된 군세가 에레그론드 왕국을 포함한 우리 왕국 본성에 들이닥쳤지.”
“그렇담, 이런 내용을 지금 되물어본다는 건 메이블의 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가?”
“··· 주홍 넌 뭘 알고 있길래. ”
왼손으로 쥐고 있던 서류를 부드럽게 내려놓은 젠의 좁아진 미간으로 보이는 묘한 궁금증과.
“너··· 저번에 올리비에 앞에서 말한 것도 그렇고, 돌아오면 알려주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길래?”
듣지 못한 소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여전히 왼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는 모습이 초조해 보였다.
“··· 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니까.”
코로 숨을 내쉬며 주홍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놈들이 서쪽 성벽을 전부 부숴놨을 때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거래를 요청했어.”
“··· 승낙하면 네가 있던 쪽의 병력까지 포함해서 전부 퇴각시켜 주겠다고.”
메이블이 문득 푸른 숲에서 아리엘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자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아리엘 님도 그런 제안을 받았었다고···.’
이 사실을 지금 털어놓아야 하는지 메이블이 고민하는 잠깐의 사이 젠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조건은?”
“··· 조건은.”
입안이 바싹 말라버린 것인지 주홍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첫 번째는 바다의 딸이··· 성검을 뽑게 하는 것.”
달그락, 갑자기 생겨난 쇠고랑이 주홍의 오른팔에서 떨어졌다.
“주홍··· 너 무슨 짓을···.”
갑작스러운 상황에 메이블과 레이너가 당황하는 사이 젠은 무언가 눈치챈 것인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바다의 딸을 동쪽 마왕성에 보내는 것. 단 이때 마왕을 죽이지 말 것.”
투둑, 이번에는 주홍의 왼팔에서 쇠고랑이 카펫에 떨어지자 작은 소리가 났다.
“세 번째는··· 예정된 일이 찾아오면··· 메이블이 이번···.”
주홍이 침을 삼키며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메이블에게 옮기자 자신을 바라보는 메이블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메이블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베주니 왕국의 17대 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전할 것.”
철컥, 풀리는 소리와 함께 주홍은 제 목에서 생겨난 쇠고랑을 직접 벗었다.
“··· 이게.”
툭, 제 옆으로 목에서 생겨난 쇠고랑을 떨어뜨리며 주홍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전할 말이야.”
&&&
바닥에는 주홍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보이지 않았던 쇠고랑이 떨어져 있었다.
그 크기만큼 무거워 보이는 쇠고랑만큼 무거운 공기가 주변을 덮어 생긴 침묵을 깨트리지 않으려는 것인지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침묵을 깬 주인이 길을 잃었는지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여주었다.
“제가··· 용사가 아니··· 아닌, 것입니까?”
지금도 제 허리춤에 자리 잡은 성검을 매만지며 메이블이 되물었다.
“하, 하지만 제가 분명 성검을 뽑은··· 뽑지 않았습니까···?”
성검을 뽑은 제가··· 성검에게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면···!
메이블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침묵은 긍정을 뜻한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성검의 칼자루를 매만지는 메이블의 오른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누가 이번의 용사인···!”
“호프.”
훽, 눈앞의 연한 빨간 머리가 아닌 그 옆에서 들린 답변에 메이블의 고개가 검은 머리로 돌아갔다.
“성검이 택한 이번 용사는 네 아버지.”
“호프다.”
뚝, 태화의 답변에 무언가 끊긴 것처럼 메이블의 눈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빠가··· 용사라고요···?”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듯··· 그리고 직접 보셨듯···! 제가 성검을 뽑았잖아요···! 아니··· 뽑은 거 아닙니까?”
자리에서 일어서 제 허리춤의 성검을 가리키며 태화에게 질문하는 메이블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 그래 네 아버지 호프는 그날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날 호프가 성에 찾아왔었다.”
[“딸, 잠시 성에 볼일이 생겨서 다녀올게.”]
“설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메이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예상했듯 그때 호프가 성검을 뽑았었다.”
“하지만··· 아빠는···.”
“··· 호프가 죽어 다시 용사를 찾아야 할 성검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고 대신 호프가 뽑고 성검을 내려놓았던 탁자 위를 지키고 있었지.”
“그럼 아빠가 혹시···.”
“그 가능성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4년간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지만, 그런 사례는 다른 왕국에서도 없던 사례더군.”
털썩, 그대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메이블의 얼굴은 얼굴의 반을 덮은 겹겹의 붕대 때문인지 얼굴이 갈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놈은 주홍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로 ‘맹세의 불꽃’을 이용해 거래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건이 정확한 것을 고려하면 놈은 처음부터 거래를 목적으로··· 찾아온 것 같더군.”
태화가 젠을 바라보며 설명을 덧붙였지만 젠은 충격이라도 받은 것인지 왼쪽 눈을 덮은 안대 위로 하늘색 한기가 일렁거렸다.
“··· 그래, 그런 걸 빌미로 잡혔었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젠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몰려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레이너의 시선이 메이블에게 닿자 온몸을 떨며 작게 움직이고 있는 메이블의 입이 보였다.
“··· 만약 제가 마왕을 죽이면.”
고개를 숙인 채로 목소리를 내는 메이블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전 용사가··· 될 수 있는 거죠?”
“메이블, 이제 굳이 그럴 필요는···.”
탁, 메이블이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 탓에 주홍의 말이 끊겼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성검을 가지고 있잖아요? 제가 아빠를 대신해서··· 할 수 있어요.”
“메이블! 맹세의 불꽃 때문이었지만,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 일은 나랑 태화가 주축으로 나설 테니 너는 그런 위험을 부담할 이유가···.”
“제가··· 죽일 수 있어요.”
고개를 들어 보이는 메이블의 오른쪽 얼굴에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죽일 수··· 죽일 거예요.”
“그리고 아빠를 죽인 그 리자드맨도··· 전부 죽일 거예요.”
허리춤의 성검을 매만지는 메이블은 몸을 떨지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앞을 막는 모든 걸··· 죽여서··· 죽여서라도.”
“그래도 된다고··· 그러라고···.”
말끝을 일부러 흐리는 것인지 메이블의 말이 뚝뚝 끊겼다.
“메이블, 일단···.”
젠과 메이블의 사이에 앉아 있던 레이너가 메이블의 돌발행동을 막으려는 것인지 방패를 꺼내 팔에 연결하며 메이블의 앞으로 다가갔다.
“··· 네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네가 말했잖아. 더는 그러지 않겠···.”
“맞아··· 네 말이 맞아.”
툭- 툭.
왼쪽 검지로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메이블의 오른쪽 입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복수를 잊어선 안 되지··· 그러니까···! 나 복수부터··· 할게.”
“아빠의 복수를··· 막는 것들은 다 죽여도··· 그래도···.”
순간 검게 물든 오른쪽 눈이 본래의 색을 잃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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