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뒤따라온 그림자 (1)

마차가 밟고 가던 길이 흙길에서 진흙 길로 바뀌자 앞서가던 마차부터 시작해 하나둘 멈춰 섰다.
“음? 뭐지?”
마차가 갑자기 멈춰 이리스가 옆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자 더는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공간이 없는 진흙 길과 그 옆의 흙길 위로 소나무가 빼곡하게 자라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끼익, 어느새 먼저 마차에서 내린 태화가 뒤따라오던 마차의 문을 열며 3명을 바라보며 답했다.
질퍽-.
마차에 내려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군화를 집어삼킬 듯 진흙이 소리를 내며 질척이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하는 이들을 뒤로 주변을 둘러보던 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태화, 여기가 원래 이렇게 어두웠나?”
“푸른 숲이 정리되고 저번에 올리비에를 따라 와보니 이렇게 바뀌어 있더군.”
텁, 마차 문이 닫히자 마부는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채찍으로 말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아무래도 푸른 숲이···.”
자신의 뒤에 있을 이리스를 떠올려 태화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다행인지 이리스는 저 멀리 떠나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어 태화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 숲과 오래 교류를 못 한 만큼 숲의 초입부가 못 보던 사이에 바뀌어 있었다.”
남부 전선이 본래 푸른 숲의 남쪽인 만큼 일행은 자연스럽게 푸른 숲의 바깥을 둘러서 이동해야 했다.
“흠··· 전에 아들에게 미리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꽤 으스스한걸?”
진흙 위에서 자라 나와 주변을 덮은 소나무들은 본래의 색보다 더 진한 쪽빛을 보여주며 작고 얇았던 잎들은 마치 가시처럼 나뭇가지에 달려있었다.
“아마 검은 마나석도 발견되었으니 추후엔 가까운 왕국의 교단을 불러서라도 정화작업을 시작해야겠지.”
“해당 사항은 교단에 보고할 생각이긴 하다.”
여전히 숲의 가에서도 느껴지는 검고 어두운 기운을 느끼며 태화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래도 저 너머까지 퍼지지는 않은 것 같군.”
더구나 마치 푸른 숲과의 경계를 알려주려는 듯 오른쪽을 바라보면 진흙 위에서 쪽빛을 내는 소나무가 왼쪽을 바라보면 촉촉한 땅 위에서 푸르른 소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화 님! 돌아갈 때는 걸어가는 건가요?”
뒤를 돌아보자 점점 멀어지고 있는 두 대의 마차를 검지로 가리키는 이리스가 있었다.
“이틀 후에 마차가 다시 이곳으로 올 거다. 올리비에를 만난다고 해도 바로 다음 날 돌아갈 수 있지는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올리비에가 남부로 떠난 지 시간이 좀 됐으니··· 운이 좋으면 돌아갈 때 같이 갈 수도 있겠군.”
태화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이리스는 곧 메이블의 옆으로 다가갔다.
“···.”
여전히 말없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고 있지만,
‘눈 색이··· 좀 돌아왔네.’
마차를 타고 올 때보다 한층 푸른빛을 머금은 오른쪽 눈동자가 보이자 이리스의 입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 상태를 레이너도 확인한 것인지 레이너의 표정도 마차 안에 있을 때보다는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그럼, 더 늦기 전에 출발하자. 태화, 길은 똑같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어가는 젠을 따라 이리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응?”
뒤따라 들리는 발걸음 소리가 없어 고개를 뒤로 돌리자 메이블이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선만큼은 이리스가 걸어가려던 곳을 바라보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메이블은 이리스가 코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작은 변화도 없었다.
“메이블, 괜찮아?”
메이블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고 가볍게 볼도 검지로 찔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 괜찮아진 게 아니었나···?”
“이리스, 잠시 실례하마.”
그 모습을 태화도 확인했는지 이리스의 옆으로 다가온 태화가 자세를 낮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메이블과 시선을 맞췄다.
탁! 태화가 손가락을 튕기자 태화의 손등을 타고 회로가 주황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곧 손바닥에 작은 불꽃이 생겼다.
“메이블, 조금 아플 수 있다.”
손바닥에 생긴 작은 불꽃을 메이블의 오른쪽 어깨에 올리자 치직! 소리와 함께 갑옷을 어깨에 놓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동시에 메이블의 눈동자의 색이 더 푸른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곧 메이블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이리스···? 그리고 태화 님?”
지금 와서야 둘을 본 것처럼 메이블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메이블! 이거 보여?”
다급하게 메이블의 앞에서 손을 위아래로 휘젓는 이리스의 팔을 메이블이 오른팔로 부드럽게 잡았다.
“··· 분명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칼자루만 어루만지던 메이블의 손이 제 팔과 몸 그리고 머리를 어루만지며 자신이 서 있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았다.
“태화 님 이건 어떻게···.”
“녹스의 어둠을 태우는 불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잠시 시간을 버는 게 끝이지.”
“확실히, 아직도··· 제 귓가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요.”
“미안하다, 너의 그걸 제대로 저걸 없앨 수 있는 건 올리비에뿐이다.”
이리스의 질문에 태화가 답하자 곧 메이블의 어깨에 올려진 주황색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확실히 시간이 짧군. 메이블, 걸을 수 있겠나?”
메이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발을 앞으로 뻗었다.
“··· 여전히 머리가 멍해요.”
“계속 이런 진흙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왼발을 들어 앞으로 뻗자 군화가 진흙을 밟고 움푹 들어갔다.
“그래도 계속 길을 찾고 있었어요.”
“··· 그래, 그렇게만 해줘도 훌륭하다.”
“네··· 전 아직 멈출 수 없어요.”
퍽, 앞으로 메이블이 발을 옮길수록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아직은··· 지금 멈추면···.”
이제는 태화와 이리스를 지나쳐 앞서 나가는 메이블의 눈빛이 본래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갔다.
&&&
쾅-!
주황색 불꽃을 휘감은 주먹이 엔트의 안면에 닿자 그대로 얼굴을 뭉개버렸다.
“점화.”
짧은 외침과 반대로 멈추지 않고 엔트의 안면을 꾹 눌러 담는 주먹에 주황색 불꽃이 타올랐다.
투쾅-!
이어진 폭발음과 함께 주먹의 불꽃이 폭발하자 엔트의 얼굴이 그대로 터졌다.
“··· 이제 지나가지.”
손등을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는 태화의 주변에는 모두 안면이 파괴된 엔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푸른 숲의 외곽을 둘러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하나둘 눈앞을 막는 엔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숲 안쪽에 있어야 할 엔트들이 엘프들에 의해서 밀려난 것인지 몇 분만 걸어도 엔트들이 나무 사이에서 스멀스멀 걸어 나왔다.
“메이블 가자.”
이리스가 뒤로 돌아 메이블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걷기 시작하는 메이블의 눈은 아직 본래의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 이리스, 어떻게 한 거야?”
어느새 이리스의 옆으로 다가온 레이너가 작게 속삭였다.
“음··· 태화 님의 불꽃이 도움이 되었어.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은 네가 아는 메이블이 맞을 거야.”
퍼석, 불타버린 엔트를 메이블이 발로 밟자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엔트들의 몸은 쉽게 으스러졌다.
“후···”
군화에 밟혀 으스러진 엔트의 위로 메이블이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할 수 있어.”
오른손을 쥐었다 펴보며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메이블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타버린 엔트의 조각을 집어 들어보는 젠의 미간이 좁혀졌다. 작은 조각에서 느껴지는 그 서늘하고도 섬뜩한 기운은 알고 있던 마나의 기운이 아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 그래, 서두르자.”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태화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 젠의 시야의 저 멀리서 주황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태화! 2시 방향!”
피융-!
젠의 외침과 함께 태화와 젠 사이로 얇고 가는 주황색 선이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쿠콰콰콰쾅-!
곧이어 선이 지나간 자리가 폭발하며 주변이 흙먼지로 뒤덮였다.
콜록- 콜록-!
“다들! 괜찮나!”
선이 폭발하기 전 제 몸을 젠 쪽으로 던진 태화는 바닥에 손을 짚고서 일행을 전부 감싸는 반구의 주황색 보호막을 펼쳤다.
주변 공간을 덮어버린 태화의 보호막 덕분에 안은 멀쩡했다. 보호막의 앞과 뒤에 이어진 기나긴 선이 폭발해 땅이 깊게 파진 흔적을 바라보자 아찔했다.
“저건, 골렘이에요!”
메이블과 만나기 전 남부 광산을 맡았던 기억 속의 골렘의 광선과 같은 빛임을 깨달았는지 이리스가 저 멀리 주황빛이 반짝인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런데 여긴 광산이랑 거리가 먼데··· 불의 골렘이 왜···.”
이리스는 서둘러 투구를 쓰고 망치를 들면서도 의문을 멈추지 않았다.
“··· 그래, 골렘들이 돌발행동을 한다면 두 가지지.”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든 젠은 이리스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하나는 우리가 구역을 침범했거나.”
갑자기 주변을 덮은 잿빛의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저 멀리서 주황빛이 반짝였다.
피융-!
주황색 선이 태화의 보호막 위를 지나갔다.
“··· 누군가가 제작한 골렘이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지.”
쿠콰콰쾅-!
찌지직, 다시 주변을 덮은 굉음에 태화가 만든 보호막의 윗부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태화, 저건 내가 가지.”
“알겠다.”
훅-!
태화가 보호막을 거두자마자 저 멀리에 있을 골렘을 향해 젠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나무 사이에 숨은 골렘까지 못해도 500m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도달한 젠의 검이 한기를 머금고 하늘색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골렘의 눈에 비친 젠의 외눈이 하늘색 빛으로 반짝이자.
콰드득-!
곧 그 검이 골렘의 주황빛을 내는 외눈을 찌르고 들어갔다.
쩌저적, 곧 골렘의 눈을 파고든 검을 기준으로 골렘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몸이 바닥에 얼어버린 골렘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피유우웅.
‘··· 뭔가 이상해. 고작 한 놈만 여기에 있었다고?’
콰직, 골렘의 몸에서 검을 뽑은 후 곧바로 태화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하자 목덜미에서 느껴진 한기에 반사적으로 몸이 돌아갔다.
캉-!
그대로 젠의 검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고드름이 바닥에 떨어졌다.
“··· 쯧, 역시 이런 건 그냥 눈치채나 보네요?”
나무들이 햇빛을 가린 어둠 속에서 검은색 로브를 입은 소서러가 혀를 차며 걸어 나왔다.
“눈을 다시 달 시간은 없었나 봐요?”
하늘색 한기를 내뿜으며 번들거리는 제 왼쪽 눈을 가리킨 소서러는 웃음소리를 내며 젠을 바라보았다.
“흐음··· 그래도 꽤 볼만하네요?”
검은색 로브로 가린 몸과 후드로 가린 얼굴을 가렸지만 목소리와 저 하늘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설석산의 지하에서 만났던 소서러와 같았다.
“뭐 어쨌든! 당신이 예상한 대로···!”
순간 소서러의 오른편에서 다가오는 검날에 소서러의 눈이 비춰 보였다.
텅-!
“··· 너무하시네. 적어도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들어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젠의 검을 막은 소서러의 팔이 위를 덮고 있는 로브의 위로 드러난 회로가 하늘색으로 빛을 내며 위이잉 소리를 냈다.
“목이 날아가면 말이 멈추잖아요.”
“··· 눈만 찌르고 도망간 주제에 입이 길군.”
“이길 수 없으면 도망이라도 쳐야죠?”
탓, 소서러가 뒤로 빠르게 움직이며 거리를 벌렸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왜 당신을 쫓아왔는지?”
콰직-!
소서러의 양쪽을 노린 젠의 분신이 바닥에서 솟아난 고드름에 얼음 알갱이로 부서졌다.
“참··· 급하시네. 이러니 제가 눈만 찌르고 도망갔죠.”
콰직, 이번에는 뒤와 앞을 노린 젠의 분신이 똑같이 바닥에서 솟아난 고드름에 무너져내렸다.
“··· 하아, 당신 같은 분들이 자꾸 이러시면 말이 끊긴다고요.”
“그러니 저도 다른 방법을 써야겠죠?”
쿵- 쿵-.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자신이 쓰러뜨린 골렘과 같은 형태의 골렘 두 마리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뛰어오고 있었다.
“어떠세요?”
“저 정도면 소서러인 저보다 재밌게 놀 수 있겠죠?”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소서러의 주변으로 골렘들이 주황색 외눈을 반짝거리며 젠에게 육중한 몸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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