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무것도 (1)

점심을 먹고 나자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몸이 나른한 시간.
“안녕, 레이너?”
레이너는 복도 반대편에서 자신에게 걸어와 말을 거는 아이의 앞에서 멈췄다.
목 주변에서 나풀나풀하는 사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그녀의 등 뒤의 방패를 보았을 때 일전에 메이블의 소꿉친구라고 들었던 아이인 것 같았다.
“이름이··· 연화?”
“오? 기억하고 있구나.”
레이너는 연화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메이블이 자신을 찾기라도 한다는 건지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메이블은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그럼 이유가 뭐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좁아진 미간과 함께 레이너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오···.”
뭐지? 대뜸 입을 동그랗게 뜨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에 더 의문이 가해지는 찰나 연화의 입술이 움직였다.
“오늘도 운동장에 갈 거지?”
“음···? 그렇지.”
“그럼, 나랑 대련해 줘.”
그제야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레이너는 그대로 학교 앞의 운동장에 있는 공간에 자리 잡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하는 거 어때?”
“내기···? 어떤 거?”
“지는 사람이··· 아니다.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풋, 연화의 직설적인 비소에 레이너가 씨익 웃었다.
“자신 있나 봐?”
상대의 자신감에 자신감으로 받아친 레이너가 나무로 된 검을 집어 들었다.
“훗, 내가 비장의 수가 있거든. 그러니 아무래도 내기까지 하는 건 좀 안 맞을 것 같은데?”
어느새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연화는 나무 방패와 목검을 들고서 자세를 잡았다.
“살살 긁지 말고 조건이나 걸어봐.”
“··· 소원. 물론 곤란한 건 당연히 안 되고.”
“마침 친구가 새로 나온 과자가 맛있다고 추천해 줬는데, 잘됐네.”
“풋! 하아··· 그럼 슬슬 시작할까?”
연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닷! 먼저 발을 움직인 것은 연화. 그에 반응해서 한 걸음 늦게 발을 움직인 레이너가 중간에 다다르기 전 서로 가깝게 붙었다.
레이너가 짧게 팔을 움직여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취하자 연화가 곧바로 방패를 앞세워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을 노린 레이너는 오히려 대각선 앞으로 몸을 굴려 연화의 뒤편으로 이동해 발을 걸었다.
“윽!”
중심을 놓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연화는 그대로 옆으로 굴러 방패로 레이너의 목검을 막았다.
퍽-!
“이래도 내가 질 것 같아?”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힘을 주고 내리는 레이너의 목검이 불편한 자세로 검을 막아내는 연화의 방패를 조금씩 밑으로 밀어냈다.
“아직, 안 끝났거든?”
지잉, 목검을 박고 있는 연화의 방패가 불꽃을 머금으며 하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야! 잠깐! 마법은···.”
“걱정하지 마, 순식간에 끝날 거야.”
팟-!
연화의 방패에 뿜어진 섬광이 주변을 덮어버리자 시야가 차단한 레이너가 눈을 질끈 감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퍽-! 연화가 발로 레이너의 복부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으, 으윽···.”
점점 다시 초점이 맞춰지는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방패의 무게와 자신의 심장에 닿아 있는 목검의 검 끝.
“어때? 끝난 것 같은데?”
자신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반월을 그리는 연화의 입 모양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흐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화를 바라보는 레이너의 눈이 가늘었다.
“왜? 규칙으로 마법을 쓰지 말자고는 안 했잖아?”
“··· 하아, 그래 네가 이겼다.”
스윽, 목을 누르던 방패가 치워지자 한결 숨을 쉬기 편해졌다.
“그래서··· 뭘 부탁할 거야?”
“간단해.”
연화가 목검을 밑에 두고서 레이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처럼 매일 대련해 줘.”
“기한은···?”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그럼··· 시간은 오늘처럼 점심에?”
레이너가 손을 잡자 연화가 생각보다 힘을 많이 넣은 것인지 그대로 레이너의 몸이 연화 쪽으로 쏠렸다.
사라락.
비슷한 키 덕분에 그대로 연화의 몸에 붙인 레이너의 얼굴이 왼쪽 어깨 위로 들어가자 새빨간 머리카락이 쓸렸다.
“오늘처럼 점심에.”
연화의 속삭임이 레이너의 왼쪽 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어때?”
“그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만족한지 레이너를 품에서 놓아준 연화는 그대로 방긋 웃었다.
“그럼 레이너! 내일 또 봐.”
바닥에 떨어진 방패와 목검을 주섬주섬 주운 연화는 떠나기 전 레이너를 한 번 더 바라보며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이너의 눈은 연화의 등에 놓인 방패에 그려진 나비 문양을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눈꺼풀을 들어보자 보이는 천막의 천장. 고개만 옆으로 돌리자 주변에 다른 병상들은 보였지만 누워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몸을 덮고 있는 솜이불과 병상의 형태는 낯익은 형태라는 걸 알아본 레이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윽, 손등을 목에 가져가자 만져지는 붕대의 촉감과 내려간 이불로 보이는 몸을 두르고 있는 붕대들.
“음···.”
목소리는 다시 나오네.
일부러 내보낸 목소리마저 잦아들자 자신이 있는 공간이 너무 고요했다.
차라락.
천막의 입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들어오는 등불의 불꽃.
“올리비에 님···.”
“깨어났구나. 일어설 필요는 없으니 편하게 있으렴.”
레이너의 병상으로 다가온 올리비에가 등불을 근처 선반에 두고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일단, 손 좀 줘보겠니?”
등불로 비춰 보이는 올리비에의 금발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일단 좋아졌구나. 처음 봤을 때 척추는 빠져있고 무엇보다 출혈이 심해서 걱정했단다.”
“이제 몸에 마나만 더 보충해주면 내일부터 다시 움직여도 괜찮겠구나.”
올리비에가 부드럽게 레이너의 손을 놓아주자 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거라도 있니?”
“··· 절 발견하셨을 때부터 순서대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
천천히 운을 떼며 올리비에가 선반의 첫 번째 함을 열어 마나포션을 꺼냈다.
“널 발견한 건 10일 전이란다. 숲속에서 몸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긴 우리 딸 다음에 발견했지.”
“그리고 몇 분 수색하다 보니 쓰러져 있는 태화와···.”
올리비에가 왼손으로 이마를 한번 쓸어 넘기자 이마에 작게 생긴 주름이 보였다.
“··· 태화를 발견하고 나서 가까운 숲속에서 지천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쓰러지는 걸 봤단다.”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올리비에는 레이너에게 마나포션을 내밀었다.
“서둘러 그곳으로 가보니···.”
올리비에는 그곳에서 땅에 검 끝을 박아 넣고서 간신히 서 있는 젠을 발견했다고 답했다.
“··· 그 주변에 가득한 슈발리에들의 시체를 보면 혼자서 거의 마흔에 가까운 적을 상대한 것 같은데.”
“네 아빠는··· 젠이 버티고 서 있는 곳의 앞에는 누군가의 팔 한 짝과 호프의 검 한 자루가 떨어져 있더구나.”
하아, 올리비에의 입에서 떨어진 한숨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젠까지 옮긴 다음 그 주변에서 쓰러진 적군들의 시체도 다시 전부 하나하나 확인해 봤지만 살아 있는 놈은 없더구나.”
혹시 모르니 요정들에게 부탁해서 살아있는 놈이 있다면 알려달라 했지만, 없는 것 같더구나.
“··· 그리고 남은 시간은 전선 방어와 치료를 주로 수행하다 보니 네가 마지막으로 깨어났단다.”
레이너의 시선이 자신이 양손으로 꼭 잡은 마나포션으로 향했다.
“앞서 말했듯 먼저 깨어난 태화와 우리 딸에게서 대략적인 상황은 들었단다. 다행인지 젠도 방금 깨어났단다.”
“아빠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그래··· 솔직히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지.”
처음 젠을 발견했을 때 그곳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낼 정도로 차디찬 그곳에서 간신히 몸을 세우고 있는 젠의 눈가에는 흐르는 눈물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젠이 그렇게 눈을 깔아가면서까지 싸울 정도면··· 상대가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란 뜻일 테지···.”
작게 중얼거리는 올리비에의 혼잣말이 들렸는지 레이너의 손이 조금 떨렸다.
“··· 격이 달랐어요.”
스윽, 레이너의 고개가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푸른 불꽃에, 대검을 사용하는 슈발리에였어요. 메이블이 그놈 어깨에 들쳐메어져 있었는데. 검을 뽑자마자 당했어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레이너의 모습에 올리비에가 천천히 코로 숨을 내쉬었다.
“더··· 궁금한 건 없니?”
“··· 메이블이 납치됐어요.”
뽕, 포션의 마개를 열자 은은한 향이 코로 맡아졌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태화 님께서 적군의 배틀 메이지의 무기를 보고 동부의 방식이라고 했고 슈발리에는 외곽 출신이 아닌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잖아요.
“게다가 대륙은 너무 넓어요. 아무리 온 대륙이 녹스로 점점 갉아 먹히고 가고 있다고 해도··· 너무 넓어요.”
손안에 든 포션을 바라보던 레이너의 시선이 다시 올리비에게 향했다.
어디부터 뒤져봐야 할지 감이···.
적들이 이쪽으론 어떻게 들어온 건지···.
그리고 왜 메이블을 데려가려 한 건지···.
“다시 부딪힌다면 이길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병을 따기만 하고 가만히 두고 있는 레이너의 손을 한 번 바라본 후 올리비에가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레이너,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왕국에 오셨을 때 주홍에게 전해야 할 내용이 있다고 하셨단다.”
본래는 같이 왕국으로 돌아가서 말해주려 했던 내용을 꺼내며 운을 떼었다.
“본론부터 말하면 곧 [4]왕국과 그 옆의 엘프 숲 엘란도 숲 사이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지. 그 [4]왕국이 중앙과 애매하게 걸쳐 있긴 했지만, 엘프 숲과 관련이 있다 보니 우리 그레이스 가문에서 조사했다고 하시더구나.”
“그리고 주홍에게서 푸른 숲과의 이번 일을 듣고 나서···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는 왕국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올리비에를 바라보는 레이너의 고개가 끄덕였다.
“그리고··· 나들이가 하고 싶다면서 내가 남부 전선으로 향할 때 잠시 따라오셨다가 다음날 혼자서 돌아가셨지.”
스윽, 올리비에가 품속에서 조금 두꺼운 잎사귀를 꺼냈다.
잎사귀는 얇은 식물의 줄기 같은 것으로 꽁꽁 감싸져 있었고 무엇보다 마법으로 처리된 것인지 녹색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 요정들이 나에게 찾아와 건넸단다.”
[“라마빌의 의뢰를 완료했다. 대리자 올리비에가 아님, 네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해 의뢰자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편지의 유효시간은 3일이니 기한을 주의하도록.”]
올리비에의 말을 들은 레이너의 눈에 힘이 들어갔는지 동그랗게 떠졌다.
“··· 자리를 내 동생에게 넘겨주었다고 해도 내 아버지는 여전히 그레이스이시다. 그런 분께서 오래 머무르신다는 것도 좀 궁금했고 이곳으로 올 때도 뜬금없었던 행동들을 보여주신 걸 보면···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께서 뭔가를 예상하신 것 같구나.”
“일단 태화와 이리스에게도 말해뒀단다. 되도록 우리 아버지를 빨리 찾아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리고···.”
올리비에가 레이너에게 보여준 잎사귀를 다시 안쪽에 넣었다.
“아마 왕국에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메이블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얻었더라고 병력을 움직이기는 어려울 거란다.”
“··· 마왕 때문인가요?”
“그래··· 일단 왕국의 남쪽은 얼추 전선을 복구했고 동쪽은 검은 숲과 붉은 숲 엘프들 덕분에 당장은 별일이 없겠지만···.”
올리비에가 숨을 작게 내쉬며 짓는 표정이 덤덤했다.
“하지만··· 한 명을 구한다고 군이 움직이는 일은, 누구라도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내용이란다.”
“···.”
“젠이나 태화가··· 같이 따라가 준다면 충분하겠지만 둘 다 몸을 무리했다 보니··· 레이너, 젠의 상태가 어떤지는 혹시 알고 있니?”
“네··· 영혼의 반을 대가로 뭔가를 하셨다고.”
“··· 그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일어서 의자를 옮긴 올리비에는 선반에 놓은 등불을 들었다.
“너도 깨어났으니 되도록 서두르기 위해서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정했단다. 너도 함께 가는 건 전달해 둘 테니 마저 쉬고 있으렴.”
저벅- 저벅-.
등불을 들고 걸어 나가는 올리비에가 사라질 때까지 레이너는 멍하니 등불을 바라보았다.
“···.”
마나 포션의 마개를 닫고 팔을 밑으로 뻗어 방패를 집어 든 레이너는 방패의 앞면을 바라보았다.
위쪽 끝이 조금 깨졌지만, 여전히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하얀 나비 문양은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 아직도 생생한 불길 속에서 주저앉은 자신이 보였다.
주변의 빨간 불꽃이 들어오는 걸 막아주던 하얀 불꽃 안에서 하얀 나비를 끌어안고 울고 있던 자신이.
“··· 때문에 검을 놓지 않았지만.”
기억 속의 불타는 들판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적이었던 것은 이미 하얀 불꽃의 장작으로 몸을 내어주었고 자신의 주변에는 함께 있던 친구들도 지원으로 온 어른들은 진작에 새까맣게 타버렸으니까.
“··· 전부 다 타버려서 나에겐 복수의 목표도 없었지.”
다시 눈을 뜨면 여전히 나비 문양이 눈앞에 보였다.
“··· 그날 난 널 살릴려고 했었어.”
그래서 내 모든 걸 그 순간에 걸어서 시간을 벌려고 했었어.
텁, 다시 마나 포션을 잡은 레이너는 마개를 열고서 입구를 입에 가까이 가져갔다.
“분명 나도 눈앞에는 아지랑이처럼 너 나아갈 수 있다는 게 보이는데···.”
그러니 네가 그날 우화(羽化)했듯.
나 또한 이제라도 개화(開花)를 이뤄야겠지?
꿀꺽.
텅빈 공간을 목으로 물 넘어가는 소리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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