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시작된 걸음 (1)

“그럼, 난 올리비에와 왕성을 갔다 오겠다.”
올리비에의 집 앞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바라보는 태화의 얼굴이 핼쑥했다.
“일이 생기면 연락할게.”
검은 머리카락만큼 짙어진 눈가를 보여주는 태화에게 젠이 답하자 끼익하고 마차 문이 닫히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젠이 올리비에에게 받은 잎사귀를 꺼내 보자 녹색 빛에 반짝거렸다.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젠에게 상황을 들은 라마빌이 찻잔을 내리며 답했다.
“그리고···.”
젠이 안쪽에서 꺼낸 잎사귀를 꺼내 라마빌에게 내밀자 그의 손이 잎사귀를 받아 손가락을 튕겼다.
탓!
잎사귀의 녹색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편지를 넘기듯 라마빌의 손이 잎사귀를 한 장 넘겼다.
생각보다 잎사귀가 여러 장인지 계속해서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라마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흠···.”
이윽고 모든 잎사귀를 확인하자 추가적인 마법이 씌워져 있던 것인지 라마빌의 손에 있던 잎사귀가 바스러졌다.
“일단 본론부터 말하자면··· 당장 너희들을 공격한 놈들이 뭘 하려 하는지는 알겠구나.”
흠칫, 젠을 비롯해 레이너와 이리스도 라마빌의 대답에 몸을 조금 떨었다.
“어르신,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 젠, 자네는 이제 막 듣는 내용이겠지만 지금 대륙이 전반적으로 전조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네.”
라마빌이 잎사귀가 바스러져 생긴 가루를 탁자 한구석에 내려놓은 뒤 고개를 들었다.
“대륙의 북동쪽의 최전선은 다행히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지만, 다른 외곽은 점차 전선이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수두룩하지.”
“내가 있던 중앙은 내전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외곽에 지원할 병력을 차츰 왕국 단위, 혹은 더 안으로 들어가 귀족 단위로 축소하고 또 제한하고 있네.”
“그렇게 외곽은 밀려드는 괴물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중앙은 왕국 간의 혹은 가문 간의 쌓인 불만이나 욕심 등으로 생긴 내전이 하나둘 일어나고 있지.”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 중 젠의 입이 먼저 열렸다.
“딱 뭔가 일이 떠진다면··· 적절한 시기라 볼 수 있겠군요.”
“맞네. 따라서 요즘 이런 난리 통에 활동하는 별의별 세력이 구축되고 있다 들었고··· 아마도 너희가 만난 놈들도 그런 쪽이겠지.”
“그렇담 놈들이 하려는 일을 무엇인 것 같습니까?”
“운이 좋게도 내가 하는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 예측이 아닌 사실일 걸세.”
라마빌은 탁자 위에 놓은 쿠키를 집어 들었다.
“일단 골론도 왕국과 엘란도 숲의 관계가 파국이라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골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 중앙의 귀족들은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엘프들과 연이 깊은 우리 가문의 의견은 다르네. 놈들은 서로 원하는 게 분명하고 단지 그것을 위해서 명분으로써 갈등을 끌어 올렸다고 생각했네.”
“왕국은 정령 나무의 과실을 엘란도 숲은 더는 자원을 얻기 위해서 숲을 협박하지 말라는 것과 지속된 영토 확장을 멈춰 달라는 것이, 오래된 둘 사이의 갈등이었지.”
와작, 라마빌이 쿠키를 입안에 넣으며 반대편에 앉은 일행의 반응을 살폈다.
“할아버지 말씀은 그런 갈등을 이용해서 일이 일어날 거란 이야기인가요?”
“··· 아니면 원하는 게 현재는 달라졌단 뜻입니까?”
이리스와 레이너가 한 마디씩 차례로 답변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요.”
“그래, 모두의 의견이 맞네.”
만족했는지 마지막으로 답한 젠의 답변이 끝나자 라마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강하게 원하는 것이 서로 생겼고 그것을 서로 가지고 있다는 게 요점이지. 그리고 이번에 요정들에게 의뢰한 내용 덕분에 그 일에 너희를 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다는 건 파악할 수 있었지.”
“요 몇 년간 골론도 왕국에서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있는 방어용 골렘과 여기 남쪽 숲에서 발견된 골렘의 파편에서 감지되는 마법식의 결이 같았단다. 일반적인 소서러의 눈은 속일지라도 요정같이 순수한 마나에 관련된 이들의 눈은 못 속이니 정확할 거다.”
따라서 요약하자면 골론도 왕국과 그 근처에 있는 엘란도 숲 사이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고 그곳과 이곳 남쪽에서 발견된 골렘의 마법식이 같으니 놈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에 골론도 왕국과 엘란도 숲 사이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놈들이 골렘을 끌고 올 거라 예상했고 더구나 요정에게 의뢰를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여기서 일어난 푸른 숲의 일과 같은 일들이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지.”
골론도 왕국과 엘란도 숲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근거도 5년 전 엘란도 숲이 갑자기 문을 닫아 버린 다음 아직도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과 아리엘이 벌인 일과 같은 일이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더구나 12년 전 죽었다고 생각했던 내 아들이 살아있었다는 것도 모자라 들려오는 소식과 이곳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내가 직접 내려온 것도 있지.”
그리고 교단이 먼저 도착하면, 다 태워버릴 게 분명하니 그런 이유도 있고.
달그락, 라마빌이 찻잔을 잡고 받침대와 함께 들어 올리자 찻잔이 작게 소리를 내었다.
“어떤가? 내가 말한 내용이 도움이 될 것 같은가?”
“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근거로 쓰인 내용이 사실에 기반하였으니 적어도 누군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으로썬 충분합니다.”
젠의 답변에 라마빌이 차를 홀짝였다.
“··· 마음 같아선 내 사병을 써서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이럴 땐 직을 내려놓았다는 게 거슬리는구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올리비에와 태화가 오면 움직여 볼 수 있도록 서둘러 상황을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바깥은 바깥대로 그렇다 해도··· 지금 이곳의 상황도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구나. 젠 너를 비롯한 이들이 왕국에서 발을 뗄 수 있는지도 어려워 보이던데.”
“적어도 저랑 올리비에 혹은 태화 중 한 명이라도 된다면 어느 정도는 문제 될 것은···.”
“그 슈발리에가 푸른 불꽃의 소유자라고 했지?”
“맞습니다.”
“혹시 그자의 검이 푸른 불꽃을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는 형태였는가?”
탁, 마지막 질문에 젠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마빌이 빈 찻잔을 탁자에 놓았다.
“흠··· 그렇담 말이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가늘어진 라마빌의 눈이 몇 번 좌우로 움직이더니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 자네를 비롯한 근 4년간 중앙과 연결이 단절된 여기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3년 전 동쪽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동쪽의 왕국 중 한 곳인 엘론(Ellon)왕국이 쑥대밭이 된 적이 있었다네.”
“그 사건의 범인은 ‘르노 드 엘론(Renaud de Ellon)’으로 엘론 왕국의 최연소 단장이라네. 비록 나도 알고만 있는 내용이지만 야밤에 단신으로 제 고국의 주군과 그의 가신들의 심장을 터트리고서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네.”
톡- 톡-.
젠이 왼손으로 허벅지를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적어도 자네가 말한 나이대와 검의 형태를 고려하면 아마도 그자가 엘론의 르노일 확률이 높겠군.”
“··· 감사합니다.”
젠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왼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알려줄 내용은 다 알려준 것 같군. 젠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단 올리비에와 태화가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 사실을 알려준 다음 주홍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럼···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는가? 우리 손녀랑 할 이야기도 있고. 혹여나 아들이 돌아오면 내 직접 전처럼 연락하지.”
젠과 레이너가 동시에 일어나 라마빌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자리를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할아버지 하실 이야기라는 게···.”
“아까부터 우리 손녀가 하고 싶던 말이 있던 거지?”
자리에 앉을 때부터 이리스가 중간중간 어두운 표정을 보였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 그놈들 중 소서러 그것도 배틀 메이지가 있었어요.”
“근데 그놈이 엄마가 아빠를 그렇게 만든 놈이라고 직접 밝혔어요.”
이리스의 말을 들은 라마빌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올리비에에게 이야기했을 때와 차이 없는 표정을 보여주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감정에 휘둘러져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어도 막상 그런 긴박한 상황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성이 뚝, 끊기는 거 있죠?”
“게다가 그 슈발리에가 메이블을 데려가려고 할 때 제가 그만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못 했고 메이블이 대신 놈의 공격을 맞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때도 또 끊겼어요.”
“··· 차라리 그러고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으니까요.”
이리스가 접시 위에 올려진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음··· 할아버지가 생각하시기에는 제가 르노라는 그 슈발리에를 이길 수 있을까요?”
꽈악, 이리스의 양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당장은 물론 어렵겠지만··· 너무 제가 느긋하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더는 이렇게 또 맥없이 당하기 싫거든요.”
와작, 이리스의 말이 끝나자 라마빌이 천천히 쿠키를 베어 물었다.
“물론 우리 이리스가 외곽에서 슈발리에 작위를 받고 4년간 활동했던 걸 고려하면 당장 중앙에 가면 실력자로 쳐주긴 할 거란다. 중앙이 치안이 좋고 안전한 만큼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임무나 적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실력을 쌓으려는 이들은 전부 외곽으로 발령을 기다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
“그리고 중앙은 나름대로 슈발리에든 소서러든 기준을 잡아서 등급을 나누기는 했단다. 막 직을 받아 슈발리에 혹은 소서러가 된 이들, 푸리에가 가능한 이들 마지막으로 라플라스가 가능한 이들로 크게 3가지로 나누었지. 그렇다면 손녀는 아직 첫 번째에 머무는 수준이니··· 멀었다고 할 수 있지.”
라마빌이 손수건으로 쿠키를 잡은 손에 묻은 가루를 닦았다. 조금 곁눈질로 이리스를 바라보자 자신의 말에 고개 숙이고 서로 맞잡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 손녀가 망치의 슈발리에라 할머니와 아들에게 익히 들었다.”
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둔기술이나 갑주술도 배웠고?”
“네, 예전에 편지에 쓴 내용대로 배워뒀었어요.”
“그래, 그리고 우리 이리스가 아직 푸리에의 수준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것도 들었지.”
“네···.”
변명할 말이 없는 만큼 이리스가 고개를 떨구자 그 모습에 라마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마나를 다루는 건 후에 올리비에가 도와줄 것이니 이 할아버지에겐 망치질을 더 배워보는 건 어떻겠느냐?”
네? 질문에 놀랐는지 고개를 든 이리스의 얼굴에 동그래진 두 눈이 보였다.
“이 할애비도 슈발리에였던 건 들었었지?”
“그런데 나도 망치를 들었다는 건 못 들은 모양이구나.”
금시초문이었는지 벌어진 이리스의 입이 벌어졌다.
“아마 당장 네가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그사이에 내가 알고 있는 걸 꽉꽉 눌러 담아주마.”
“우와! 할아버지 무기가 망치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할애비가 망치질 하나로 우리 그레이스 가문을 백작에서 공작으로 만들었단다.”
라마빌이 허공에 손바닥을 펼치자 녹색 빛의 기운이 모이더니 곧 망치의 형상을 띄었다.
“어떻니? 지금부터 당장 해보겠니? 마침 네 망치도 왕국에 도착했단다.”
어느덧 마나로 만들어진 망치를 쥐고서 부드럽게 위로 던졌다 내렸다 하는 라마빌의 동작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웠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