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뺨에 작렬하는 파성(破聲)과 소녀의 비명에 중인들의 가슴 또한 동시에 철렁했다.
아픈 마음이 칼이 되었는지 장소광이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서더니 광무 도령을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대경실색한 호위무사 대 여섯이 동시에 검을 뻗어 제지했다.
“멈춰라!”
앞길을 막아서자 그의 살기가 깃든 주먹이 무사들을 향해 매섭게 뻗었다.
쇄도하는 주먹에 좌측 무사는 신형을 우측으로 신속히 이동시키며 검을 위, 아래로 동강 낼 듯 잘라 들자 즉시 몸을 빼 후진한 장소광, 이내 우측 발을 전광석화처럼 휘돌려 찼다.
"호(好)!"
강한 경기의 여파가 얼굴을 스치며 지나치자 무사는 흠칫 놀라며 뒤로 연신 후퇴했다.
“저! 저놈이!”
이를 지켜보던 광무는 장소광의 동작이 마구잡이 동작이 아닌 놀라운 상승 무공임을 간파하고 황급히 장세로 뛰어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 그의 전면까지 짓쳐 든 그는 즉시 우장을 옆구리 경문혈을 향해 쭉 뻗었다.
경문혈은 갈비뼈 사이 급소로 정확히 맞으면 항거불능의 상태로 빠진다.
무사를 쫓던 장소광은 엄청난 힘의 기파를 감지하고 즉시 몸을 꺾어 짓쳐드는 장을 빗겨 쳤다.
쾅!
하지만 어느새 도령의 좌장이 열린 소광의 가슴을 강타,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붕 떠 날아갔다.
부서지고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중인들 귀에 파고들어 산란 된 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각 주춧돌에, 부딪치고 퉁겨 땅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장소광은 가는 신음성과 함께 몸을 조금씩, 꿈틀꿈틀 움직였다.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의 입 언저리에선 붉은 피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리고 옷은 장풍의 경기에 휘말려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놀란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엄청난 무공과 신위를 처음 목격한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였다.
"표, 장! 즉시 이자를 감옥에 가두어라!"
표씨와 장씨 성을 가진 무사는 복창과 함께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장소광을 들쳐, 업고 외전 창고 감옥으로 사라졌다.
오라버니에게 뺨을 맞아 퉁퉁 부어오른 볼을 잡고 서 있던 영화는 충격에 망연자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별빛 같은 눈물, 모두는 말 문을 잊지 못한 채 두 사람만 주시했다.
"도··· 도련님!"
이때 장씨가 비틀비틀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그의 면 전 앞까지 엉금엉금 기어왔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도련님! 제발 저 불쌍한 소광이 녀석, 살려 주십시오!"
그를 보는 도령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새삼 보는 그의 얼굴, 6척의 당당한 체구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의 얼굴 그 어디에도 잔인한 성품은 엿보이지 않았다.
다만 강한 눈빛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얇은 입술이 상당한 야망을 품고 있는 사내라는 걸 증명해 주는 듯 보였다.
"장씨!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상처 치료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빌던 장씨는 걱정하지 말라는 도령의 말이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달려와 의식 잃고 쓰러진 장씨를 업고 현장에서 물러갔다.
물러서는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광무, 천천히 동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영화야! 이리 오거라!"
동생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후회, 그렇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제껏 동생을 향해 단 한 번도 손찌검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하찮다고 여겼던 정신없는 놈 때문에 무심결에 때리게 되었으니. 동생 곁에 다가간 그는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웃는 듯 엄한 표정이 복잡하게 혼재된 그의 얼굴은 흔들리는 눈동자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넌··· 아버님이 정한 정혼자가 있지 않으냐! 어찌 저런 자와 그렇고 그렇다는 뜬소문에 휩쓸려 있는 것이냐?"
무표정한 얼굴로 외면하던 그녀의 시선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섰다.
무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소리냐는 듯. 맑고 깨끗한 눈동자, 티 없이 맑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도령 광무는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착잡했다.
한편 그녀 역시 오라버니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 자신, 한 번도 그를 남자로 여긴 적도 없고 단지 직접 구해 준 인연과 돌아오지 않은 정신에 고통받는 모습이 가여워 보호해주고 싶어 그랬는데 오라버니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라버니 정말 저를 몰라도 그렇게 모르세요! 저는 단지 그 사람이 불쌍해서 그런 거지 다른···."
"애써 변명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까지는 혹시 그래 왔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그리 하지 않으면 된다. 세상 소문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다. 처신에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일면 엄한 듯 보였지만 뭔가 쫓기는 듯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말. 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오라버니가 간 뒤 그녀는 홀로 고민에 잠겼다.
'혹, 내 마음속, 저 사람에 대한 그림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설레설레) 아니야, 그런 일은 저 사람에게도 내게도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될 뿐이야, 정신 차려!···.'
삼면이 돌로 싸인 벽, 그중 바깥 한 면에 굵은 쇠창살이 박혀 있는 작은 감옥 안, 높이 1장에 1평 남짓한 크기의 감옥에 6척 거구의 사내가 찬 바닥에 움츠린 자세로 누워 있다.
너덜너덜한 옷에 가슴 중앙 커다란 장인이 선명하게 나 있는 사내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연신 울다가 웃다가 또는 입을 벌려 맛을 다시고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원평! 원평아! 가지마!"
꿈속에서 자신과 놀던 친구가 갑자기 잰걸음으로 멀리 가더니 잘 있으라,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팽욱은 가지 말라 목 터지게 외쳤지만, 녀석은 웃음만 짓고는 희미한 점이 되어 멀어져 갔다.
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소리 지르는 순간 번쩍 눈을 뜬 소광, 전혀 생소한 곳에 자신이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찢어진 옷과 반들반들 깎여진 괴이한 몰골에 경악했다.
“머리··· 머리가 그리고 이 이것은···.”
모든 일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짰다.
꿈결 같았던 다정한 여인이 이 집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라는 것과 현재 자신의 처지로는 도저히 짝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의 사실이 그를 충격의 격랑에 빠트렸다.
욱!!
놀라 벌떡 일어선 그, 찢어질 듯 엄한 통증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령 광무에게 맞은 일장이 그대로 남아 뼈를 가르는 통증을 골수까지 뻗치게 했다.
고통이 더해지자 문득 떠오른 그리운 이들.
'아! 아버지, 어머니, 친구들,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날 기다리다 혹, 병이라도 얻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흘렀지? 아저씨와 아가씨는 괜찮을까?'
생생하게 떠오르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모습, 이번엔 현실적인 고통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기억, 아무리 지우려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 우선 가슴 장상(掌傷)부터 치료하고 생각하자.”
치료를 떠올리는 순간 마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잊었던 신공 구결이 머릿속에 선연히 떠오르며 자연스레 정기신, 몰아 일체가 되었다.
단전의 기를 순환시키자 회음혈에서 헛바람처럼 샜던 기가 어찌 된 일인지 막힘없이 휘돌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 위 백회혈에서 김 같은 기의 기운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가 다시 코로 빨려 들어가며 혈색이 화사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기의 일주천이 촌각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전신 혈도를 타고 격랑처럼 막힘없이 흘러갔다.
그러자 가슴 위에 선명히 남았던 청색 장지(掌指) 자국이 맑은 붉은 피부 빛으로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그렇게 한 식경, 몸이 가쁜 하고 상쾌한 것이 언제 충격의 내상을 입었던가 싶었다.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가슴 가득 흡입한 숨을 길게 내뿜고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정광 넘치는 밝은 빛이 별빛처럼 쏟아졌다.
전보다 한층 맑고 깊어진 눈망울이 어둠 속에 이채롭게 빛났다.
그러나 가슴의 멍 자국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마치 훈장처럼 다섯 장인을 선명히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노력해도 샛길로 샜던 내력이···”
신기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고 땅을 짚어 몸을 세워봤다.
헉, 놀라 터진 탄성. 마치 고무풍선처럼 몸이 가볍게 들렸다.
팽욱이 기공 수련을 시작한 지 5년. 그는 자신이 일주천의 단계를 극복, 주기의 단축 과정에 들어선 것임을 방금전 확인했다.
"그때 원평이가 성취했던 수준이 이거였지.···”
기쁘면서도 아쉬운 뒤늦은 성취, 하지만 그가 깨닫지 못한 한가지. 노도사는 왜 이토록 긴 시간의 수련을 거쳐야 얻을 수 있도록 안배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단천문 무공의 기본은 은근과 끈기라고 했다.
헛바람처럼 샜다고 여겼던 내력은 은근히 축기되며 응축되었다가 때가 이르길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그가 가한 일격이 도화선이 되어 일통이 되었던 것. 고통이 배가되고 수련이 축약될수록 성취의 도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그의 말, 증명된 듯하다.
멍하니 전면을 주시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돌고 돌아 늦었지만 생각해 보니 정상으로 돌아왔고 소소하지만, 진심 어린 따뜻한 이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그토록 숙원하던 무공 역시 풀리는 겹경사(?)를 맞았다.
맞다. 수많은 시련은 그를 나이보다 성숙하게, 야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쇠창살로 막힌 차가운 철문을 그러쥐며 촉촉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영화··· 그래, 영화 소저라 했지, 항상 내 꿈에서 밝고 화사한 미소를 던지며 위로 해주고 걱정해주던 소저···."
화사한 미소를 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편의 영상처럼 떠올랐다.
'미천한 내가 이런 귀한 집 여인을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자 또 다른 내면의 그가 반박했다.
'네가 어때서 너 그만하면 훌륭해, 너무 자신을 비하하지 마!'
난 내 자신 너무 잘 알아, 나는 평민에 이민족의 자식이고 그녀는 한족에 대가 집 여식이야 관계가 제대로 성립될 거라 생각해?
'물론이지! 사랑에는 국경도 반상도 없다 했잖아!'
그런데 그녀도 날 좋아한다고 했나?
'그거야···. 하지만 널 대하는 눈빛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어. 2년 동안 한결 같았잖아!'
그건 너무 자의적인 내 편한 대로 해석한 모습 아닐까?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네가 해 보기나 했어! 너도 책에서 읽은 것이 다 아니야?
'이 세상 모든 일을 다 해봐야 알 수 있다는 건 억지 아니야!'
물론 그, 그건··· 아니지···.
이런저런 상상에 머리가 아파 오자 팽욱은 잡생각을 지우고 앞으로 어찌 처신해야 할지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철커덕! 광문의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그 소리는 마치 천둥치는 소리처럼 크게 귓전을 울렸다.
'누굴까?'
자신도 모르게 치솟는 긴장감에 사지가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들키지 않으려 그는 즉시 구석으로 가 누웠다.
삐걱! 조심스레 문을 밀치며 들어서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광 바닥에 흩어진 지푸라기들의 비명소리가 창고를 휘저었다.
사뿐사뿐 가벼운 두개의 발걸음. 한 명이 아닌 두 명에 걸음이 가벼운 것으로 미루어 여인임이 분명했다.
초롱불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틀림없다.
'누굴까? 혹시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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