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골 까마귀

태건 일행이 홍원골 초입에 들어선 것은 중화참이 되어서였다.
서연이 장만회와 오래 독대하고 나눈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태건에게 물었다. 태건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난이 일어나면 구체적인 행동요령이 주된 이야기였고, 의적이라고도 불리는 도적 두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요.”
“장만회도 도적들과의 거래로 재물을 모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고, 교훈을 얻자고 했어요. 의적이라 불리던 그자도 결국 자기 사람을 잘 못 들여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더군요.”
“아, 맞아요··· 그 서림인가하는 모사 이야기를 했군요.”
“네, 그러면서 내가 바우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게 궁금했는데, 태건님은 바우라는 자를 얼마만큼 믿으시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검이 나서며 바우를 두둔했다.
“서연님이 직접 훈련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바우 그자는 믿을만해 보였습니다. 태건님 말대로 도적으로 썩기에는 아까운 자였습니다.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본 태건님이 신기할 정도로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장만회 그자가 태건님을 시험해 보려고는 않던가요? 그자는 장사치라 그런지 쉽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던데.”
“백립과 백철립을 쓰게 된 연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래서요?”
“나를 키워주신 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쓰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의 제안으로 백립을 쓰게 되었고,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내 안위를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은 자를 기리기 위해 백철립을 쓴다 했지요.”
“백운령과 몽치 얘기를 하셨군요. 듣고 나서 뭐라고 하던가요?”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퇴역한 자의 말도 귀하게 듣고, 막장 인생 추노꾼의 의리를 기리는 점이 인상 깊다 했습니다. 뭔가 커다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이런 세상에 쉽게 목숨을 잃는 자가 어디 한 둘인가요? 장만회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죠.”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쉽게 잊으면 사람이 아니지요. 비록 그 신분이 미천하다 할지라도.”
육검연은 진지하게 대답하는 태건을 다시 바라보았다.
***
홍원 마을은 을씨년스러웠다. 큰 나무마다 까마귀가 몰려 앉아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인가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앞서갔던 거식이 돌아오더니 주막 위치를 알려주며 말했다.
“마을이 좀 수상합니다. 여각은 멀리 있다 해서 가까운 주막부터 들렀는데, 주막집 주모의 눈빛도 그렇고 주막에 있던 사람들도 예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을 소문을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는 곳이니 여각보다는 그리로 먼저 갑시다.”
일검이 태건을 보며 제안하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 일행이 주막으로 들어서자, 반기는 기색보다는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방에 있던 자들까지 나와 팔짱을 끼고 태건 일행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데, 주모가 다가와 물었다.
“뭐 탁주에 국밥 가져오면 되우?”
“그럽시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뭐하는 자들이오?”
일검이 묻자, 주모는 큰 소리로 들으라는 듯 툴툴대며 말했다.
“나도 모르우,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구랴. 허구헌날 저기서 저렇게 오는 객들 다 겁먹게 하고 있다우.”
정체모를 자들이 육검연을 자세히 뜯어보는 중에 험상궂게 생긴 자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서 오는 거요?”
가장 가까이 있던 세검이 대답했다.
“정주에서 오는 거요.”
“어디로 가는 거요?”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묻소? 기찰이라도 하려는 거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바쁘지 않으면 여기 용한 무당이 있으니까 앞날이나 보고 가라고. 보아하니 가는 길이 순탄치 않겠어.”
“이사람이···”
세검이 일어서려는 걸 태건이 주저앉히고는 대신 말했다.
“우선 시장하니 식사부터 하고 한 번 만나 봅시다. 얼마나 용한 무당인지.”
험상궂게 생긴 자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그럼. 배부터 채워야지. 맛있게 드시우.”
태건 일행이 국밥을 비우고 일어서자, 주위에서 서성이던 자들이 앞질러가며 길을 안내했다. 천천히 말을 타고 그들을 뒤따라가던 세연이 서연을 보고 속삭였다.
“저들 허리춤에 비수와 표창이 있어. 조심해요 언니.”
“나도 보고 있었어. 가거든 물도 마시지 말고 미혼산도 조심하고.”
산 중턱까지 천천히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은 모두 초점을 잃고 있었고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태건 일행을 보고도 무표정으로 지나쳤다. 이번에는 일검이 일행에게 말했다.
“모두 무엇에 홀린 사람들 같소.”
암자처럼 보이는 장소에 이르자, 한 명이 뒤돌아서더니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여기서부터는 말은 못 가오. 여기다 매어두고 올라가시오.”
“말에 짐 보따리가 있는데, 그냥 두고 갈 순 없소.”
이검이 난색을 표하자, 그자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두고 가라면 두고 가지 뭔 말이 그리 많아. 우리 신주님이 벌써 노해서 까마귀 몰려오는 거 안 보여?”
그자의 말처럼 까마귀 떼가 신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광경만으로도 보통 사람 같으면 기가 눌릴 만 했지만, 태건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으며 말했다.
“말은 여기에 두고 여러분은 여길 지키세요. 나와 일검님, 서연님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태건이 앞장서서 안내하는 자를 따라 무당이 있는 신당으로 들어서자, 온갖 신의 형상을 한 조각들이 주위를 메우고 있는 중에 가운데 앉아 있는 한 늙은 여인이 보였다.
일검과 서연이 태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문이 닫히더니 여인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이 귀신을 달고 왔구나.”
무당의 집 안은 무슨 장치를 한 것인지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치듯이 들려오며 공포감을 자아냈다. 그런데도 태건이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본 무당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대들보에 사뿐히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네 이놈들, 어서 꿇지 않고 뭘하느냐? 너희의 몸뚱아리에 붙어서 하는 일마다 막고 있는 귀신이 너희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태건이 그대로 선 채로 물었다.
“내 눈에는 안 보이니 여기까지 왔지 않소. 그럼 이 귀신들을 물리치려면 어찌해야 하오?”
“그야, 너희들 정성에 달렸지. 너희들 가진 것을 다 바치고 목숨을 구하겠느냐, 아니면 그놈들 달고 다니며 귀신 먹잇감이 되겠느냐?”
“그런데 궁금한 게 있소이다. 어떻게 그 대들보까지 올라간 것이오?”
무당은 당황한 듯 했다. 보통 이 정도에서는 기함하며 엎드려 덜덜 떠는 것이 보통인데, 태건과 일행은 뻣뻣이 서서 엉뚱한 것을 묻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모시는 신령님이 니들 귀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이리 올리신 것이다.”
“다시 내려오시오. 내 시키는 대로 하리다.”
태건의 말이 떨어지자, 무당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일검과 서연은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태건은 동요하지 않았다.
“내, 당신을 아직 믿지 못하겠으니 다른 능력이 있으면 보여 주시오.”
“···이런, 이런··· 경을 칠 놈을 보았나. 너는 벌써 신령님이 노하셔서 이제는 죽은 목숨이다.”
무당의 말과 동시에 신당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떼의 까마귀가 새까맣게 몰려들어와 대들보에 앉았다.
“이제 신령님의 말 한마디면 너희들은 저 까마귀밥이 된다.”
“당신이 정말 까마귀를 부리는 능력이 있는 거요?”
“이놈이, 귀구멍이 막혔나, 내가 아니라 신령님이 행하는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럼 어디 한 번 나를 까마귀밥이 되게 해보시오.”
늙은 무당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주문을 외우더니 까마귀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저놈들 눈깔을 다 파먹고 장님으로 만들어라.”
무당의 일성에 까마귀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일검과 서연이 칼을 빼어들고 막아내려는 그때 태건의 힘 있는 목소리가 까마귀 떼를 향해 터져 나왔다.
“여기서 나가거라.”
까마귀 떼는 태건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몇 번 공중을 맴돌다 그대로 몰려 나가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무당이었다. 무당이 급하게 손짓을 하자, 다시 몸이 공중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태건이 빠르게 달려 나가 해심도로 무당의 머리 위쪽을 베어내었다. 무당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며 코를 박고 말았다.
무당은 이빨이 부러지고 코피를 흘리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발산아, 개세야. 어서 와서 이자들을 죽여라.”
무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뒷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그림자 둘이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태건도 이번에는 놀란 듯 했다. 실로 엄청난 몸집이었다.
“마당으로 나갑시다. 여긴 너무 좁소.”
태건의 말에 일검과 서연도 마당으로 내려섰다. 말이 있는 곳에 있던 사검연은 벌써 괴한들과 결투 중이었다.
뒤따라 거한 둘도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주변에 세워 놓은 커다란 통나무를 집어 들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장정 둘이 들기도 버거울만한 통나무를 한 손에 들고는 바람이 일도록 돌려대니 일검과 셔연도 기가 질리는 듯 뒷걸음질했다. 태건 만이 피하지 않고 다가오는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한은 태건에게 다가서자마자 힘껏 통나무를 내리쳤다. 그러나 태건은 살짝 발걸음을 옮기며 피하고는 벽조검 칼집으로 손목을 내리쳤다.
손목이 부러질 만한 힘이었으나 거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털더니 다시 태건을 향해 통나무를 내리쳤다. 태건은 큰 동작 없이 살짝 피하고는 거한을 향해 말했다.
“아까운 힘이구나. 이제 니가 모시는 무당은 없다. 그만하고 내 말을 들어보거라.”
태건이 말을 해도 거한 둘은 힘을 합쳐 태건을 잡으려고 통나무를 휘둘렀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태건을 맞추지는 못했다. 일검과 서연은 멀찍이 떨어져서 거한들에게 활을 겨눴다.
“태건님, 언제든 말만 하세요.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쏘지 마세요. 곧 끝나갑니다.”
반시진이나 거한 둘과 태건은 휘두르고 피하고 내리치고 피하며 마당을 돌고 있었다. 통나무가 점차 둔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거한 둘이 약속이나 한 듯 통나무를 땅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태건은 그들 앞에 다가갔다. 둘이 똑같이 닮은 것으로 보아 쌍둥이가 분명했다. 태건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 엄청난 힘을 왜 저런 협잡꾼 무당을 위해 쓰고 있느냐?”
“···우리 신령님을 욕하지 마라. 신령님은 협잡꾼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이 줄을 당겨 무당을 대들보 위에 올리는 걸 봤다. 그게 남을 속이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냐?”
“···그건 우리가 신령님을 도운 것이다.”
“이빨이 부러지고 코피 나는 신령님을 본 적이 있느냐?”
“···우리 신령님은 날짐승도 마음대로 부린다.”
태건은 쌍둥이 거한에게서 순진함을 보고 있었다.
“그건 아마 까마귀 몇 마리를 새끼 때부터 길들인 것일 게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날짐승을 부리면 신령님이 되는 거냐?”
“사람은 날짐승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한다. 그건 신령님이나 할 수 있다.”
태건은 거한의 말을 듣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나 태건의 머리 위에서 맴도는 수리매가 보였다.
“그럼, 내가 저기 하늘에 있는 수리매를 이리로 부르면 나도 신령님이니 내 말을 따르겠느냐?”
거한 한 명이 수리매를 올려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어디 한 번 해봐라. 니가 정말 그러면 내가 신령님으로 모신다.”
태건이 하늘을 향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손짓을 하자, 수리매는 곧바로 태건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오더니 어깨 위에 살포시 올라 앉았다. 태건이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저기 까마귀 떼를 몰아내라.”
태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리매는 맹렬한 기세로 까마귀들에게 돌진했다. 까마귀들은 혼비백산 뿔뿔이 날아올랐다. 쌍둥이 거한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통나무를 살며시 밀어놓고 태건 눈치를 살폈다.
“너희들 이름은 무엇이고 왜 여기에 살게 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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