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썩진 않았다

관군은 상황을 파악하는가 싶더니 검계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고을 현감이 나타나 선비에게 다가가 안위를 살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현감이 난감한 표정으로 선비에게 사과하자 선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늦기를 잘했습니다. 일찍 오셨더라면 일을 더 크게 그르칠 뻔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몸으로 저 포악한 자들을···”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저기 저분들이 다 해치웠습니다.”
현감은 태건 일행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처음 뵙는 분들인데, 뉘시온지?”
현감의 묻는 말에 김중환이 먼저 나서더니 소개했다.
“제가 무술을 익히며 본보기로 삼았던 분입니다. 마침 여길 지나다 우릴 돕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저분들도 의금부 분들이신지?”
“아니, 그게 아니고···”
김중환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태건이 가까이 오며 말했다.
“저는 태건이라 합니다.”
현감은 태건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벌떡 일어서며 일검과 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로 물었다.
“태건은 육검연과 함께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럼 이 사람들은?”
“네, 맞습니다. 저는 일검이라 합니다. 저분은 삼연의 맏언니 서연이고요.”
일검이 소개를 마치자, 현감은 난감한 표정이 되더니 어사를 바라봤다. 어사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태건과 일검 이분들이 대역죄인으로 지금 추포 명령이 떨어진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 고을을 살린 은인이십니다. 저와 호위무사들 또한 목숨을 빚졌고요. 내가 책임질 테니 오늘은 손님으로 맞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야 뭐, 나리의 명이라면 저야 명대로 따릅지요.”
관군들은 창고를 열어 쌓아둔 약물들을 꺼내 불을 질렀다. 그 밖에도 약을 팔아 모은 재물들을 모두 압수하고 쫓겨났던 여각 주인을 불러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동헌으로 가자는 현감의 권유에도 태건 일행이 움직이지 않자, 어사도 남아 그간의 일들을 전했다.
“사실 선왕의 상장례(喪葬禮)가 끝나자마자 임무를 마치려 했으나 다시 명이 떨어져 평안도에서 함경도 오게 된 것입니다.”
“평안도는 어떻던가요?”
일검의 물음에 어사는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평안도는 여기에 비하면 매우 평온합니다. 사람들 기질도 온순하고 관리들도 비교적 할 일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경도로 넘어서자 아주 달랐습니다.”
“함경도는 야인들이 자주 약탈하러 넘어오는 지역이라 아무래도 드세지요.”
두경이 아는 것을 말하자 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많이 각박하더군요.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으려 하고 기질도 억셉니다. 그리고 오랑캐와 명나라 놈들이 여기 검계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일검은 바우 산채와 삼도천 등은 빼고 여기까지 올라오며 관아와 연관되어 겪은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야인들이 통일을 모색하고 있고 만일 통일이 된다면 나라에 큰 위협이 될 거란 말과 함께 태건과 함께 그걸 와해시키려 한다는 말을 전하자, 어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놀란 듯했다.
“저는 걱정만 하고 있었던 부분인데, 여러분은 벌써 행동에 나섰군요. 사실 저도 서청 장군의 인품을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각각 파를 나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일 때도 장군만큼은 가장 우선이 나라의 안위였던 분이지요. 그런 분을···”
“그나저나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 줬다고 나중에···”
“그것은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궁에 돌아가게 되면 오늘 여러분께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을 추포하지 않았다 죄를 물으면 달게 받겠습니다. 여러분을 막는 것이야말로 백성에 대한 역모입니다.”
일검이 어사와 헤어져 나오며 태건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모두 다 썩진 않았습니다.”
***
태건 일행은 어사와 헤어진 후 만동이 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만동은 씨름을 하기 전에는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였다며 꼭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만동은 집에 들어서자 큰 창고 문을 열고는 완성 직전의 수레를 보여주며 백두에게 말했다.
“이거를 다 만들면 우리도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어. 하기야 말이 너무 비싸 엄두도 못 내겠지만··· 게다가 말이 두 필씩이나 필요할 테니···”
태건이 수레를 자세히 보니 말 두 필을 묶을 수 있게 고안된 수레였다. 태건이 만동에게 수레를 만들게 된 연유를 물었다.
“그야, 우리같이 근수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말을 탈 수 없으니까 수레를 만들어 타면 어떨까 해서 생각해 본 겁니다.”
“이거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은 얼마나 필요한가?”
“혼자 만들면 달포 넘게 걸리지만 누가 도와주면 반으로 줄지요.”
“돕는 사람이 많으면 더 빨리 만들 수도 있겠군. 지금 당장 백두와 함께 수레를 완성해 주게.”
태건은 말을 마치고 두경에게 은자를 내주며 말 두 필을 구해오라 일렀다.
태건의 말이 떨어지자 만동과 백두는 신이 나서 수레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만들어 놓은 것이라 바퀴를 결합하고 말에 맬 고삐를 준비하면 되었다.
수레가 완성되자 태건은 백두를 불러 만동이와 함께 고두산 산채에 가라 일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목수들의 도움을 받고, 바퀴의 바깥쪽으로 쇠로 만든 칼날 돌기를 만들어 붙여놓으라 했다.
“태건님은 이 마차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일검이 묻자, 태건은 생각을 말했다.
“예전에 서책에서 전장을 누비던 전투 수레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런 마차를 타고 긴 창을 휘두르는 백두와 천두 같은 장사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보병술, 궁술, 기마술이 능한 여진과 전투가 시작된다고 하면 이러한 마차 부대가 유용할 듯싶어서요.”
“적이 화살로 말을 쏘아버리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요. 양쪽 바퀴에 긴 칼을 달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휘저을 때 말을 다치지 않게 할 방도 말입니다.”
“···천우형 대장장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나도 그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일단 백두와 만동이를 고두산 산채로 보내 여러 대의 마차를 완성한 후에 천우형 장인을 데려오던지, 아님 그걸 타고 대장장이 마을에 다녀오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면서 백두와 만동이도 이검, 세검님께 창술을 익히게 하려고요.”
일검은 마차를 보자마자 세부적인 계획까지 빠르게 세워둔 태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밖에 또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여진의 특징이 있습니까?”
“뭐, 나야 서책과 첩보를 통해 접한 부분이라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장군님께 들어온 첩보들을 종합해 보자면, 아, 장군께서는 저에게 그 첩보 정리하는 일도 맡기셨습니다.”
태건은 놀란 눈으로 듣고 있는 일검을 보며 정보를 알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여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유목민 생활을 하며 수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민도 많고 특히 선상 전투에도 능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배를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거기에 더해 기병술도 뛰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막을 수 있는 전투 마쳐까지 준비해 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일검은 태건에 대해 늘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두경이 말 두 필을 끌고 와 상황을 말해주었다.
“여기는 말을 사려면 관아에 허락받아야 한답니다. 그래서 관아에 들어갔더니, 현감이 이것저것 물으며 꼬투리를 잡으려는데 어사께서 직접 명을 내려 말 구매를 도와주었습니다. 세상에 살다 살다 내가 높은 사람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서연이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어사, 다른 사람 말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올곧은 사람입니다. 일검님 말대로 모두 다 썩진 않아서 다행입니다. 썩어가는 나무에 새살 같은 인물입니다.”
***
태건은 백두와 만동을 떠나보내며 두경에게 고두산 산채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라 이르고는 일검, 서연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았다.
야인의 침입이 잦아서인지 인심도 각박하고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오랑캐들이 자주 약탈하러 오고 군역에다 환곡에다 살아가는 일이 하루하루 쉽지 않겠습니다. 설상가상 약물 같은 거로 남아 있는 재산 털어가려는 거머리 같은 검계들이 설쳐대니···”
서연의 말에 일검이 깨달은 바가 있는지 태건을 보며 말했다.
“검계들의 본거지는 그냥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잔불만 끈 것이 되는 것이라···”
태건도 동의하며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검계의 본거지를 찾았다. 검계들이 모여 사는 곳은 동리와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잘 지어진 나무집과 허름한 초가 여러 채가 늘어선 곳으로 들어서자 험상궂게 생긴 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자기의 키보다 더 큰 창을 앞세우며 다가선 자가 태건 일행을 향해 위협했다.
“뭐 하는 개뼉다구들인지는 모르지만, 이왕 왔으니 계집은 여기 놓고 호주머니 털고 싹싹 빌면 돌려보내 주꾸마.”
서연이 대답 대신 빠르게 다가갔다. 창을 든 자가 움찔 하는 사이, 앞으로 바짝 다가간 서연은 빙그르 돌며 칼을 빼 움직였다. 창을 든 자가 손 쓸 겨늘 없이 바지의 뒤가 잘려나가 궁둥이가 바깥으로 드러나는가 싶더니 머리 위의 상투까지 잘려나갔다.
위협하던 자는 긴 창을 들고 황망스럽게 앞 뒤를 돌아보다 소리쳤다.
“뭐여, 이게 뭐여. 이놈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야 이놈아, 사람 위협하기 전에 니놈 궁둥이부터 챙겨야지.”
일검이 그자의 궁둥이를 보며 놀려대자, 그제야 궁둥이가 드러난 것을 눈치챈 검계가 손으로 궁둥이를 만지더니 다리를 꼬듯이 좁히며 소리 질렀다.
“야, 씨벌놈들아, 니들 오늘 다 죽었어.”
달려드는 검계를 살짝 피하며 일검이 말했다.
“야 이놈아. 궁둥이만 가리냐? 덜렁거리는 것도 챙겨 넣어라.”
일검은 다시 돌아서는 자의 급소와 인중을 칼등으로 가격했다.
급소를 가격당한 자가 속절 없이 넘어지며 코를 박고 피를 흘리자, 나머지 검계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연과 일검의 적수가 아니었다.
서연과 일검이 나머지 잔당들을 해치우는 사이 태건은 방을 열어젖히며 약에 취한 사람들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옷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부끄러운 내색 없이 헤벌쭉 웃어대는 여인들을 보며 태건은 함께 따라 나온 검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검계들은 태건의 벽조검에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태건은 여인들을 한데 모아두고 이불을 가져다 몸을 가리게 하고는 집안을 뒤져 남아 있던 약을 찾아내 불태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을 가져가지 못하게 매달리던 여인들이 일검이 냉수를 뿌리자 그제야 추위를 느끼는지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두목급으로 보이는 자가 서연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약물에 취해 있는 여인들을 본 서연의 분기탱천(憤氣撐天)한 칼에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베어져 고꾸라지고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태건 일행이 타들어 가는 약물과 가루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함성과 함께 관군들이 들이닥쳤다. 뒤늦게 검계의 소굴을 알아낸 현감이 직접 병졸들을 데리고 급습하러 왔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안면이 있는 사또가 태건 앞으로 오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어사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해 주셨네요. 이런 분들에게 추포 명령이 떨어지다니, 조정에서 아마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수습하러 오신 걸 보니 그래도 마음이 놓입니다. 뒷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훈련도 강화하고 이런 검계들이 설치지 않게 할 참입니다. 혹여 타고 갈 말이 필요하다면 내어드리겠습니다. 다음 역참은 이십 오리 밖에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가시지요.”
현감은 역참에서 말을 빌릴 수 있는 마표를 일검에게 건네주었다. 태건 일행은 두경이 돌아오자, 말을 빌려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