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경기

태우는 저번과는 다르게 마음을 굳게 잡고 나왔다.
저번에는 갑작스러웠던 감독의 교체 소식 때문에 흔들렸으나, 오늘은 마음이 진정된 후였으니 흔들 일 일이 없었다.
마운드 위에 선 태우는 처음부터 삼진을 잡아냈다.
오늘은 달랐다.
특별한 제구력으로 5회까지 0 대 0으로 막아냈다.
5회까지 오는 동안 상대 팀 투수 이재우의 빈틈을 찾았다. 하지만 좀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팀 동료들의 빈틈이 눈에 들어왔다.
팔 각도가 아래로 향해, 공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주는 투구 방법을 사용하는 언더핸드 투수였던 재우의 공은 드래곤스 선수들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았고, 하나같이 투수의 수를 못 읽고 헛스윙을 남발했다.
낮게 들어오는 줄 알고 멀뚱멀뚱 서있다 보면 공이 타석 끝에서 방향을 바꾸고 살짝 올라와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고, 끝에 올라올 거라고 예상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면 선수를 놀리기라도 하듯 땅에 낮게 깔려 투수의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재우는 몇 안 되는 선발이면서 언더핸드 투수였다. 구위가 워낙 좋아 공략해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상대 팀에서도 1 선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선수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태무의 눈에 들어왔다.
속도를 1초 가량 선수들에 따라 조절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김수천이 불었다.
“형 왜 그래요?”
“어? 아니, 왜 저러나 해서.”
“뭐가요?”
“속도를 일부러 선수에 따라서 줄이는 것 같아서.”
재우의 수를 읽어도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 드래곤스 선수들이 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타이밍의 규칙을 알아내려고 해도 규칙이 규칙적이지 않아 고민이었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규칙으로 누구에게 속도를 늦추는지 몰랐던 태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을 턱에 올린 뒤 재우가 던지는 공을 바라봤다.
반면에 그의 옆에 아무 생각 없이 서있던 김수천이 입을 열었다.
“어? 그런데 최진수 선배, 배트 언제 바꿨어요?”
엉뚱한 소리였다. 태무는 진수가 들고 있던 방망이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배트의 끝이 진한 색을 이루고 있던 배트로 바뀐 게 보였다.
요즘 방망이가 손에 잘 잡히지 않고 불편하다고 하더니 바꾼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휘이잉
퍽!
이번에도 역시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수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속도가 1초 정도 늦었다.
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뭔가 번뜩 스쳤다.
“아! 그거다!”
그거였다. 퐁당퐁당도 아니고 퐁퐁당당도 아니었다. 그저 배트의 색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타자들의 배트를 바라봤다.
진한 색의 배트를 가지고 있던 타자들은 조금 느리게 해서 타이밍을 빼앗았고, 연한 색의 배트를 가지고 있던 타자들은 공을 빠르게 던져 타이밍을 빼앗았던 것이다.
타자들이 익숙해지지 않게, 그리고 규칙을 알아차리고 예상하지 못하게.
그는 대단한 것을 알아낸 사람처럼 입술 끝을 올리고 옆에 있던 수천을 안았다.
수천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고맙다!”
그는 수천의 등을 두드렸다.
“네? 왜 이래요?”
수천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를 밀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수천에게서 떨어져서 해맑게 웃어 보였다.
5회의 공격과 수비가 모두 끝나고 경기를 지켜보던 태무가 더그아웃 앞에서 모든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답은 배트야.”
태무는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나 누가 들을까 고개까지 숙이고 말했다.
“뭐?”
정은호가 알 수 없다는 듯 태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트 색이 진하면 1초 정도 늦게 배트를 돌려요.”
“무슨 소리야 그게?”
다들 그런 게 통할 것 같냐는 표정이었다.
태무는 다들 제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다.
“내가 아닌 말 하는 거 봤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했던 말대로 해서 지금 하위권에서 그래도 6위까지 올라온 게 사실이니까.
“상대팀 5위에요. 오늘 이긴다고 5위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간격은 줄어들으니까 꼭 이겨야 해요. 나는 오늘 꼭 이길 생각이고.”
“그래 해보자!”
그의 말에 윤석이 손을 모으며 소리를 질렀다. 윤석이 손을 모으자 다들 하나둘씩 가운데로 손을 모았고 주장 은호가 말했다.
"파이팅 하고 가자.”
모두 손을 모였고, 파이팅 소리와 함께 손을 위로 올렸다. 손을 모아 파이팅을 한 선수들은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손예준이 타석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요즘 수비에서 실수가 잦던 2루수였다. 그래도 볼을 영리하게 치는 선수니까 태무의 말을 잘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난간에 매달려 두 손을 모으고 예준이 서 있는 타석을 바라봤다.
재우는 자세를 잡았고, 허리를 굽히더니 팔을 쭉 빼서 공을 던졌다. 공은 아름다운 평행선을 그리다가 끝에 와서 곡선을 그리며 올라왔다.
역시나, 빨랐다.
예준은 배트의 색이 연했으니까.
예준은 평소보다 빠르게 배트를 휘둘렀다.
탕!
경쾌한 타격 음과 함께 공이 중견수 쪽으로 날아갔고, 안타였다. 예준은 뛰어 안전하게 1루로 들어갔다.
안전하게 1루로 들어간 예준은 주먹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타자들에게 태무의 말이 맞다고 말을 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타자는 3루수 배창수였다.
장타를 잘 치는 선수였기에 기대해 볼 만했다. 타석에 들어선 창수는 입을 중얼거렸다.
“진하면 빠르게, 진하면 빠르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저 혼자 기억하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쩐지 이상했다.
배트의 색이 진하면 1초 정도 느리게 타이밍을 가지고 가라고 분명 태무가 말해줬음에도 그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재우가 자세를 잡았고, 낮게 깔려오던 공은 끝에서 떠올랐다.
휘익!
휘이이잉
퍼억!
배창수는 맞추지 못했다. 공이 미트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배트를 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창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더그아웃에 있다가 흠칫 놀란 태무는 창수의 배트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창수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하.. 저 바보!”
아무것도 모르는 창수는 아쉬움에 입술 안쪽 살을 꾹 물었다.
그는 창수를 보며 누가 알아차릴까 봐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계속 흔들었지만, 창수는 태무를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배창수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타석에서 터덜터덜 내려왔다.
1 아웃이었다.
다음 타자는 마중구다. 그는 중구가 나가기 전 배창수가 한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물었다.
“선배 진하면 1초”
“느리게.”
중구는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 태무가 말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
타석에 들어선 중구는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작은 체구의 중구는 배트를 눈앞에 두고 몸을 건들건들 움직였다.
그러자 투수가 자세를 잡았고, 팔을 아래로 내리더니 공을 던졌다.
공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고 중구는 그 순간 공이 보였고, 치고 싶은 타이밍이었으나 그 타이밍에서 1초를 셌다.
“일.”
그 후 방망이를 세게 휘둘렀다.
휘익!
탕!
맞았다!
재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느라 몸을 돌렸고, 공은 방망이에 맞고 2루수 머리를 지나 뻗어나갔다.
중구는 빠르게 달렸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말인가? 할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와!!!!!”
어깨가 좋은 중견수 때문에 아직 점수를 내지는 못했지만, 중구는 뛰어서 2루까지 갔고, 1루에 있던 예준은 죽어라 뛰어 3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다. 요즘 폼이 떨어진 선수 오재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윤석이 한숨이 쉬며 말했다.
“하... 점수 낼 수 있을까?”
“내야지.”
이제 겨우 아웃 하나인 상태였다. 적어도 한 점은 내야 했다.
그가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순간 3루에 있던 예준이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관중들은 소리를 질렀고, 모두들 눈가 입이 크게 벌어졌다.
로진을 만지려 허리를 굽혔던 재우는 뒤늦게 공을 홈에 던져봤지만, 이미 예준은 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점수는 난 후였다.
홈 스틸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감독을 바라봤다.
사실 감독은 하위권으로 처진 이후에 이렇다 할 작전을 쓰지 않았다. 아니 선수들이 나가야 작전도 쓰고 하는 것인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까?
마지막 경기에서 한을 풀 듯 상대 팀의 허를 찌르는 홈 스틸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투수의 동작이 제법 느리긴 했기 때문에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태무가 감독이었다면 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태무는 웃으며 박수를 쳤고, 그를 따라 다들 신이 나서 웃으며 박수를 쳤다.
1점을 냈다.
들어온 예준의 머리를 때리며 방방 뛰는 선수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결국 1점만 내고 공격은 끝났지만, 그래도 앞서가는 점수를 내며 9회까지 이끌어 갈 수 있었다.
태우는 오늘 그 누구보다 잘 던졌다. 점수를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막았으니 말이다.
중간 계투도 잘 던졌고, 이제 오늘 마무리로 나온 장서원만 잘 던지면 되는 일이었다.
서원은 아파서 그동안 나오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1군에 올라온 선수였다.
다치기 전까지 막아줘야 할 때 잘 막아주곤 했는데, 1점 차이가 나는 상황을 잘 막아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마지막 수비를 올라가기 전 공격에서 그의 옆에 있던 윤석이 말했다.
“아... 어렵겠는데? 9회에는 김동욱도 있고.”
컨디션 때문에 오늘 안 나온다고 했던 상대팀 스타 선수이자 대표 팀에 꼭 뽑히던 김동욱이 9회에는 나올 것 같으니, 윤석은 걱정이 많았다.
김동욱은 나오면 꼭 안타를 만들어내곤 했기에 하는 걱정이었다.
그건 태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무는 더 크게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쳤냐? 절대 안 져!”
그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윤석은 태무의 큰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깜짝 놀라 태무에게 고개를 돌려 조용히 타박했다.
“누가 진다고 했냐?”
“어렵다며?”
“그거야 객관적으로 어려워 보이니까.”
“절대 안 져!”
“누군 지고 싶냐? 그리고 이기는 게 말처럼 쉬워?”
“투수가 서원 선배인데 지겠냐?”
태무는 더 크게 목소리를 냈다. 서원이 뒤에서 듣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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