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목을 가다듬은 두현은 금세 평정심을 찾고 속내를 떠보려 턱을 살짝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크음, 뭘 확인하려 왔다는 거야?”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산처럼 올라간 눈썹이 두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태무는 한동안 말하지 않고 자신보다 키가 작은 두현을 내려다봤다.
이 새끼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
꽉 다문 입안에서 혀만 좌우로 움직이며 고민했다.
이 미친 새끼가 어떻게 해야 죽도록 괴로워할까?
마음부터 천천히 무너뜨려 몸까지 모두 무너뜨리고 싶었다. 아예 야구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해주고 싶었다. 야구 같은 신성한 운동에 이 더러운 자식이 발을 걸치고 있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태무는 이내 미소를 머금고 눈썹을 추켜들었다.
“누군가 날 죽이려 했다고 해서요.”
“뭐?!”
두현의 눈 밑 살이 꿈틀거렸다.
“마음 씨 좋은 여성분이 알게 된 비밀을 알려준다고 하시더라고요?”
“여성분? 누구?”
두현의 눈이 몰라보게 커졌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태무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
당황해 벌겋게 된 얼굴의 두현은 마른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뺐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왜 궁금하냐고요. 혹시, 아니죠?”
그는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두현이 두 손을 좌우로 흔들며 크게 목소리를 키웠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니야!”
과민반응이었다. 두현의 과민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장난한 건데?”
코웃음을 친 태무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튼 저는 먼저 가볼게요.”
그가 두현을 지나가려고 하자, 두현이 태무의 팔목을 잡았다.
“어디 가는데?”
“알 필요 없잖아요?”
그는 두현의 손을 뿌리치고 복도를 지나 보란 듯이 자신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현은 분명 그가 들어간 병실이 태무의 몸이 누워 있던 병실이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현과 세림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동안 야구 하느라 바빠서 하지 못했다.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
태무는 두현이 나쁜 짓을 자신에게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둘 사이를 벌려 놔야 두 사람이 서로 악연이 될 것이고 죄가 밝혀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림이 놀라서 일어났다.
“어? 여기 어쩐 일로?”
“아! 잠깐 일이 있어서요.”
분명 두현이 몰래 엿듣고 있을 것이다.
궁금할 테니까.
태무는 세림의 귓가에 입술을 가깝게 가져다 댔다. 일상적인 대화였으나, 두현이 듣지 못해 궁금해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
비록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도 세림을 챙겨주는 말을 친절하게 내뱉었다.
“잘 지냈어요?”
“네. 은한 씨는 아무 일 없었죠?”
세림은 다 알고 있음에도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태무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네?”
“저 많이 생각했거든요. 사실 이 병실에서 이야기할 건 아니지만...”
“네?”
태무의 말에 세림은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꾸 생각이 나서.”
‘그래, 널 죽여버리고 싶어서 자꾸 생각이 났어.’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던 세림은 심장이 뛰었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게다가 이제 야구도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까지 많은 도은한.
그는 갑작스럽게 그녀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알고 있어요... 두현 형.. 이랑 그런 사이인 거.”
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런데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거 더 이상 못 보겠어요.”
태무는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고 세림을 꽉 안았다.
세림의 놀라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는 세림을 안으면서 문 쪽을 힐끗 봤다.
살짝 열렸던 문이 닫혔다. 두현이었다.
태무는 세림을 안고 있는 팔이 썩어 들어가 갈 듯 기분이 나빴지만 두현의 똥 씹은 얼굴을 상상하니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아 세림을 더욱 꽉 안았다.
*
바로 다시 김수천이 누워 있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중환자실 앞에는 다정이 서 있었다.
인정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수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빠지는 법이 없던 다정이었다.
다정이 멀리서 태무를 먼저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 선발 일정이 잡혀 있으니 와도 선발 일정이 끝나고 올 거라고 예상했다.
고개를 숙이고 오던 태무는 다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중환자실 앞이 분주해져 불안한 얼굴을 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넉넉한 티셔츠가 땀으로 젖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태무는 더운지 목 부분을 손으로 잡고 흔들며 다정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눈은 중환자실 문 쪽을 향해 있던 태무의 물음에 다정도 중환자실 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깨어났어, 수천이가.”
“뭐? 그게 정말이야?”
태무가 다정을 바라봤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입을 벌리고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태무에게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일반 병실로 옮긴대.”
다정의 말이 끝나고 중환자실에서 수천이 나왔다.
수천은 침대 위에 누워 힘겹게 눈동자만 움직이고 있었는데, 수천의 침대 옆에는 의료진 여럿이 붙어 침대를 밀고 있었다.
수술이 잘 됐다는 의사의 말, 괜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 보호자를 만나서 할 말이 없으니 하는 예의상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오래 누워 있어본 태무의 경험상 그 말은 그런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 의사의 말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기도는 했지만, 뇌 수술이었기에 이렇게 빨리 깨어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신께 감사했다.
의료진들 사이에 수천의 아버지가 끼어 수천의 손을 꼭 잡고 침대 옆에서 따라가고 있었고, 태무와 다정도 침대 뒤에 줄을 이루고 종종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병실 안에 도착해 침대와 이것저것을 설치한 의료진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담당의는 보호자를 불렀다.
수천의 아버지가 몸을 휘청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기에 다정이 얼른 일어나 수천의 아버지의 몸을 부축했다.
다정은 문밖으로 나가며 고개를 돌려 태무에게 눈짓했다.
아픈 수천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이럴 때 보면 다정은 참 오지랖이 넓다.
태무 때문에 다쳤는데, 그가 알아서 잘 챙기지 않을까?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다정이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
수천의 목소리였다.
태무는 급하게 수천에게 다가갔다. 수천에게 다가간 태무는 얼른 허리를 굽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수천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왜? 어디 아파?”
“아뇨.”
그는 다시 멀어졌다. 그러고는 수천의 얼굴을 바라봤다. 허리는 아직 구부린 상태였다.
“그럼?”
“그만 가보시라고요.”
그는 허리를 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 왜?”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가라니?
“내일 선발이잖아요?”
내일 선발인 건 어떻게 알아서..
이제 막 깨어나서 날짜 개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까 아버지께 날짜를 물어본 이유가 이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 넌 지금 내 선발이 중요하냐?”
그의 눈매가 찌그러졌다. 깨어나긴 했어도 아직 수천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운동선수는 몸이 재산이다.
몸이 다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몇 시간 전까지 깨어나기만 바란 건 맞지만, 깨어나고 나니 수천의 팔 다리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가 보였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듣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태무는 이렇게 수천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뿐인데, 수천은 고작 태무의 선발 걱정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풋"
수천은 그의 매서운 얼굴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어이가 없었던 태무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너 웃냐?”
지금 자신의 꼴을 알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형이 나 되게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가세요.”
“뭐?”
“걱정하지 말고 가요. 이제 내가 이겨낼 문제니까.”
수천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제 몸이 지금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는 것.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형 때문 아니고, 그 뺑소니 때문이고! 혹시 죄책감 같은 거 있다면, 우승이나 해요.. 내가 한국 시리즈 무대에 서보는 게 꿈이라. 최대한 빨리 회복하고 갈 테니까.”
“후.”
그는 한숨이 푹 나왔다.
그때 밖에서 정다정이 들어왔다. 아직 수천의 아버지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던 모양인지 다정 혼자 들어왔다.
“그래, 가봐”
“너나 가!”
그녀가 그의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너?! 너 자꾸 누나한데!”
“누나나 가세요. 됐죠?”
“선발이잖아! 나한테 맡기고 가! 내가 상태 보고할 테니까. 수천이 한국 시리즈 경기 서 보는 게 꿈이라고 하잖아.”
“하,”
다정은 그의 등을 밀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다정에게 말했다.
“꼭 연락 줘, 상태 어떤지. 속이지 말고.”
“알았어, 내가 왜 속이냐? 가서 푹 쉬고 공이나 잘 던져!”
“그건 걱정 말고.”
태무는 한숨을 푹 쉬고 숙소로 향했다.
*
다음날 그는 어김없이 마운드 위에 섰다.
관중석은 1회부터 떠들썩했다. 관중석뿐만 아니라 중계석도 떠들썩했다.
5회가 끝날 무렵 해설진이 감탄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오늘 공 못 치겠는데요?”
“그러게요, 도은한! 오늘 왜 이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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