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면 쳐! 무작정 쳐! 다 쳐!

“지금 어디 있어?”
“한국.”
“뭐?!”
목을 쭉 뺀 태무의 눈이 커졌다.
한국에 있었다니 의외였다.
“해외에 있다가 최근에 들어왔어.”
“왜?”
사실 들어올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없거나 혹은 다른 급박한 이유가 생겼을 것이다.
“도박으로 돈을 다 탕진한 이유도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어머니가?”
“응. 그래서 오늘 장례식장 가보려고.”
“그래? 나도 같이 가.”
“경기 끝나고 갈 수 있겠어?”
경기가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긴 하지만, 그 사기꾼 여자는 꼭 잡아야 했다.
“어. 끝나고 연락할게.”
“그래.”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려서 가고, 그녀는 쉽게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입술 가까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자기가 도은한이면서 왜?”
혼잣말을 조용히 내뱉은 다정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게 걸렸다.
자기 자신이 도은한이면서 도은한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말투.
그러고 보니 그날, 도은한이 호수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던 날 이후로 그의 행동에는 변한 게 많았다.
성격도 조금 밝아진 것 같고, 모습도 보면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또한 공에 힘이 있고 구종도 이제는 다정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졌다.
변하지 않은 건 얼굴뿐이었다.
쓰러진 이후부터 도은한이 아닌 것 같았다.
꼭 다른 사람이 도은한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다정의 예리한 눈이 은한의 바삐 사라지는 등을 응시했다.
*
오늘 선발도 아니었고, 경기 전날 준비를 철저히 했음에도 생각이 많았다. 경기 전에 이렇게 생각이 많은 날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캐치볼을 하고 있는 그의 곁에 하민과 은호 그리고 윤석이 다가왔다.
“무슨 걱정 있냐?”
조창욱과 캐치볼을 하는 내내 볼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는지, 윤석이 그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물었다.
윤석은 어제 훈련 때문인지 왼손으로 오른팔 윗부분을 주무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다가왔다.
“개인적인 일.”
사실 경기에 대한 걱정은 시험 보기 전에 공부를 다 해둔 학생처럼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오늘 밤까지 그 사기꾼 여자가 장례식장에 남아 있을지 불안했다.
사기꾼 여자에게 미행할 사람을 붙여두긴 했지만 미행으로 붙여둔 사람들을 다 뚫고 사기꾼 여자가 도망갈까 봐 불안해 캐치볼 자체도 잘되지 않았다.
조창욱과 하는 캐치볼을 자꾸만 다른 곳으로 빗나가, 캐치볼을 얼마 하지 않았음에도 많이 움직여 힘들었던 조창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 멀리 있던 창욱은 잠시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무슨 일인데?”
윤석이 이마에 지렁이처럼 꾸불꾸불한 주름 만들며 물었다.
“그냥 아는 분 돌아가셔서, 거기 가봐야 해서.”
“아~”
“그런데 너 팔 아프냐?”
윤석의 모습을 본 태무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안 아프게 생겼어? 네가 그렇게 훈련을 시켰는데?”
어깨를 으쓱 올린 태무는 오히려 윤석을 나무랐다.
“반성해. 야구 선수가 그 정도 근육도 안 썼다는 거니까.”
“뭐?! 너 진짜! 내 친구 맞냐? 친구가 아프다고 하면 ‘얼마나 아프니? 괜찮니? 병원 안 가봐도 될까?’가 먼저 아니냐?”
옆에 있던 주장 정은호가 윤석의 말에 웃음을 살짝 터트리며 말했다.
“바랄 걸 바래라. 네 앞에 있는 사람 도은한이야!”
가만히 있던 하민은 한술 더 떴다.
“어제 그렇게 많이 운동하지 않으셨잖아요?”
“뭐?! 이게!”
윤석이 빠르게 고개를 획 뒤로 돌리며, 약간 뒤에 있던 하민을 째려봤다.
그랬다. 벌을 받을 때 뒤늦게 나타나기도 했고, 포수는 워낙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태무가 따로 힘든 훈련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타격에서 이번에 나올 투수 엘린의 단점에 낙차가 크지 않은 포크볼에 대에서 훈련한 게 전부였다.
“됐고, 수다 여기서 끝! 돌아가서 몸 풀어! 오늘 꼭 이겨야겠으니까!”
“이 자식 또 눈 돌았다. 가자. 무섭다.”
고개를 휙 돌린 정은호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입꼬리는 올리고 돌아섰다.
*
경기는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날씨는 경기 시작 전부터 꾸물거렸다.
비가 온다고는 했는데, 올 것 같으면서도 안 왔다.
관중석에서는 청록색 우비와 우산들이 관중석 옆으로 드문드문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우리 팀의 상징 색상이 청록색이라 그런 것 같았다.
4회 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제 옆에 있던 구찬성이 말했다.
“비 올 것 같지 않냐?”
“그런 말 하지 말죠? 지금 지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그래, 어제 열심히 했는데 5 : 1로 지고 있었다.
사실 투수 제임스는 어젯밤에 같이 훈련을 한 투수는 아니었다. 외국인 투수였고, 자신의 루틴이 있다고 했기에 존중했다.
그런데 오늘 생각보다 안타를 많이 맞았다. 이상할 정도로 많이 맞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구찬성은 투덜거렸다.
“말도 못 하냐?”
“하.... 쓰읍, 그런데 왜 저렇게 얻어맞는 거지? 공 좋은데?”
태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수비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중견수를 하다가 이번에 유격수로 옮긴 오은결이 빈틈 없이 막아내는 수비로 관중석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모든 선수들은 몸을 날려 최고의 수비를 하고 있었기에 투수가 수비 때문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고, 그렇다고 투수 제임스의 공의 질이 전보다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벌써 5점을 내줬다.
마치 공략법을 알고 나온 사람들 같았다.
4회 세 타자 모두 노리고 나왔다. 한 타자는 성공했고, 한 타자는 노리긴 했으나 운 나쁘게도 3루수 최진수에게 가는 직선타가 되고 말았다.
그는 다음 타자였던 손은수를 열심히 바라봤다.
첫 번째는 직구, 손은수는 방망이를 휘두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방망이를 일자로 들고 서 있었다.
두 번째는 변화구, 커브다.
변화구에 약한 손은수가 과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휘익!
탕!
공은 방망이에 맞고 짧은 안타를 만들어 냈다.
아! 두 번째와 네 번째 변화구다.
두 번째 혹은 네 번째 변화구를 던지는 것을 좋아하는 투수의 특징과 패턴이 읽힌 것이다. 이럴 때 빨리 눈치를 채야 한다.
어떤 공이 올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엄청난 이득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투수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김개화 감독을 바라봤다. 어떠한 말이라도 해주려고 바라봤으나 김개화 감독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김개화 감독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포수 유지헌이 마운드 위로 올라갔고, 지금은 1루와 2루가 차 있는 상황에서 1아웃이 된 상황이었다.
유지헌은 투수를 안정시켜주듯 등을 두드려주며 입을 가리고 말을 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땅에 한쪽 발로 정리를 하듯 툭툭 찼다. 새롭게 시작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투수가 외국인이었으나, 포수가 영어부터 일본어까지 잘하기에 통역은 필요 없었다.
포수 유진헌이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투수는 숨을 크게 한번 쉬었다.
마치 고릴라가 숨을 쉬며 제 몸집을 불려내듯 몸이 커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몸이 판판하게 펴진 제임스는 허리를 굽혀 로진백을 잡은 후, 툭 바닥에 떨어트렸다.
손에 묻은 로진을 덜어내기 위해, 손을 왼손부터 입으로 가져가 번갈아가며 후후 불었다.
준비를 마친 제임스는 포수 유지헌을 응시했다.
평소 제임스가 좋아하지 않던 패턴으로 던질까? 태무는 궁금했다.
좋아하지 않던 패턴으로도 안정적인 공을 던질 수 있을지, 더그아웃에서 마운드 위를 보고 있던 태무가 더 긴장이 됐다.
직구를 날리고 난 후, 지금은 원래 변화구를 던져야 하는 타이밍.
하지만 빠른 직구를 날릴 것이다.
그는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타자는 머리가 더 아플 것이다.
지금 직구를 던질까? 혹은 변화구를 던질까?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차 구역질이 나오기 직전일 것이다.
변화구 타이밍이지만, 변화구를 계속 맞았으니 직구이다. 그런데 제임스가 그렇게 패턴을 빠르게 바꿀 수 있는 선수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타자 강요세는 머리가 아팠다.
머리싸움이다.
마침내 투수는 자세를 잡았고, 다리를 들었다.
공은 투수의 손에서 곧게 뻗어나갔다.
아직 그의 공이 어떤 공인지 알 수 없다.
타자는 방망이를 꾹 잡았고, 공이 빠르게 날아왔다.
‘그래! 직구다!’
휘익!
강요세는 고민 끝에 방망이를 정중앙에 두고 직구 타이밍에 휘둘렀다.
퍼억!!
미트 안으로 공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심판의 외침이 들렸다.
“스트라이크!!”
“와~ 변화구에 저렇게 자신이 있었군요?”
“대단하네요.”
중계석도 놀란 모양이었다.
사실 직구가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중계석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그러니까 태무의 예상도 깨버리고 변화구가 날아와 버렸다.
그건 타자도 마찬가지였다.
태무도 놀라 입을 벌리고 감독을 바라봤다.
“속일 생각이었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국가대표 경기에 나갔을 때에도 언제나 어느 팀과 붙어도 김개화 감독은 수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다. 상대 팀이 아주 경기를 잘하는 일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그가 잠시 야구를 배우러 간다며 국가대표 감독직을 내려두고 자취를 감췄을 때에도 사람들이 그를 찾았던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태무는 자신이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우와, 너도 속았냐?”
넋이 나간 구찬성이 마운드 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재밌네, 야구.”
지고 있는데 이렇게 기대되는 야구, 그리고 꾸물거리는 이 날씨에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보는 야구는 구찬성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새로웠다.
그렇게 수 싸움에서 이겨낸 드래곤스는 8회까지 5점으로 막아냈고 2점을 낸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지고 있는 상황 8회인데 비가 한 방울씩 똑똑 경쾌한 음을 내며 내리기 시작했다.
구찬성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둘러보며 더그아웃 밖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뭐야? 비 와?”
찬성의 손바닥으로 비 한 방울 떨어졌다.
선수들은 정작 비 내리는 것을 몰랐는데, 관중들이 하나둘씩 우비를 챙겨 입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불안했던 건 지금 바뀐 상대팀 투수 김지섭이 볼 질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가 만약 비라도 많이 온다면 강우콜드게임으로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드래곤스로서는 되도록 빨리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아, 비 오네...”
포기한 듯한 하민이 고개를 흔들자, 마침 8회 공수가 바뀔 때, 공격이 시작되기 전 태무가 더그아웃 앞에서 선수들을 빠르게 불러 모았다. 선수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살짝 굽히고 둥그렇게 모였다.
“비 와,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손예준이 조용히 물었다. 태무가 오른쪽에 있던 손예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빨리하라고! 비 오면 끝이야.”
혹시나 상대팀이 듣고 느리게 행동할까 봐 목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말했다.
“빨리 쳐. 아무거나 쳐! 보이면 쳐! 무작정 쳐! 다 쳐!”
태무의 말을 듣고 있던 감독도 선수들을 보며 말을 더했다.
“그래, 초구부터 자신감 있게 방망이 돌려라! 알았나?”
“네!”
그 자리에 있던 선수들이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계석에서 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뭐 작전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무슨 작전일까요?”
“그러게요? 정말 궁금하네요. 흥미진진해요.”
“감독이 바뀌고 정말 재미있는 게임 하네요. 과연 끝에 승부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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