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3년.

“켈이면 날 찾는다는 가문 중 하나잖아? 알아챈 거야?”
“이용할 게 있어서 일부러 알려 줬어. 딱히 나쁜 의도도 아닌 거 같고. 괜찮지?”
“괜찮긴 한데, 왜 날 찾는대?”
“널 초월체라 생각하더라고.”
“응? 그게 무슨 소리?”
“초월체라고 들어본 적 없어?”
“들어본 적은 있는데, 무슨 전설 속의 이야기 아니야?”
“맞아. 나도 전설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워낙 규격 외라서 말이야. 착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옆에서 인수를 관찰하던 디네가 말했다.
“초월체가 설마 자신이 초월체라고 숨기지 않고 밝히겠어?”
플라가 디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도 차라리 초월체로 이해하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던 중이었어.”
인수가 플라와 디네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사실이야 어쨌든지 내가 밝히지 않는 한 확인할 방법은 없는 거잖아?”
“아마도?”
“반대로 내가 초월체라고 말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믿을 수 있을까?”
디네가 대답했다.
“전 믿을 수 있어요. 플라를 마갑도 없이 이겼다는 거면 충분해요.”
인수는 숨을 크게 쉬고는 말했다.
“제가 좀 특별한 건 인정합니다만, 초월체는 아니니 더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디네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죠.”
플라를 따라 라비엔으로 온 제란은 샤린과 테크와 함께 도시를 구경했다.
샤린이 물었다.
“만나서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격차가 그렇게 크면 또 싸워봤자 의미 없잖아요?”
“다쳐도 계속해서 덤벼드는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전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제란이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나도 딱히 무작정 덤벼들 생각은 없어. 사실 지난번에도 싸울 생각으로 그자를 쫓은 거도 아니었고 말이야. 설마 또 다짜고짜 칼을 겨누지는 않겠지?”
“제란 님의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 싸움을 건 거였다면 또 걸지도 모르죠.”
제란이 웃었다.
“그거라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네가 구해줘.”
“그래야겠네요.”
둘의 이야기가 멈추자 테크가 물었다.
“그런데 저까지 따라 올 필요가 있었나요? 이제는 카스토렌에 참여하실 필요도 없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네가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따라다니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자신을 높이 사는 제란에게 테크가 감사를 표했다.
“그런 거라면 감사할 따름이죠. 질리실 때까지 따라다니겠습니다.”
제란이 주변을 둘러보자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는 공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비엔은 란과는 달리 별로 발전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보이는 거라곤 가죽 공방밖에 없고.”
테크가 대답했다.
“사실 도시가 세워지기엔 너무 외졌죠. 제가 알기로는 마법사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도시가 유지되는 거라 알고 있습니다. 산업도 몬스터와 관련된 부산물 거래나 가죽세공 같은 것이 전부고요. 당연히 관광이나 돈벌이를 생각하고 오는 도시는 아닙니다.”
“듣기로는 별 볼 일 없는 곳인데, 그자는 이곳에서 뭘 하는 걸까?”
아직 인수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테크가 물었다.
“이곳에 찾던 자가 있는 건가요?”
제란이 끄덕였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야.”
“이야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초월체를 의심한다고요?”
“합리적인 의심이지.”
“혹시 초월체라 하더라도 스스로 밝힐까요?”
“모르지. 그래도 일단 만나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점괘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했고 말이야.”
샤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점은 또 언제 보셨대요?”
“란에 오기 전에 봤지.”
“너무 점만 믿고 계획 없이 행동하는 거 아닌가요?”
“딱히 아니라곤 말 못 하겠군. 그래도 아직은 배신한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제란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고. 슬슬 배가 고파지는데, 저택으로 갈까?”
“그래요. 어디 그럴싸한 식당도 안 보이네요.”
저택에 도착한 제란 일행은 식당으로 향했고, 식당에 들어가자 밥을 먹고 있는 인수와 눈이 마주쳤다.
숲에서 봤던 것과는 매우 다른 깔끔한 이미지라 못 알아볼 법도 했지만, 제란은 눈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 숨이 멈추고 소름이 돋으며 본능적으로 발이 멈췄기 때문이다.
제란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인수가 아는 척을 했다.
“혹시 뭐, 복수니 뭐니 할 거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다음에는 지난번처럼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제란이 애써 인수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배때기에 칼을 쑤셔 넣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딱히 전의가 보이지는 않아 인수는 고기를 썰면서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으면 배가 찌르는 게 아니라 두 동강을 냈겠죠. 그리고 뒤에 계신 여성분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샤린은 말없이 인수를 노려보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플라가 물었다.
“마침 잘 왔어. 식사는?”
“아직.”
플라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앉아. 이야기야 먹으면서 해도 되지.”
제란 일행은 테이블 반대편에 멀찍이 앉았고, 이내 식사가 준비되었다.
제란이 나이프를 들며 말했다.
“복수하려고 찾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때 굳이 죽이지 않은 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건지 말해 보세요. 바쁘긴 하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제란은 잠시 침묵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인간이 맞습니까?”
인수가 웃으며 되물었다.
“제가 초월체인지를 묻는 거군요?”
제란은 말없이 인수를 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고, 인수가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저는 초월체가 아닙니다.”
순순히 인정할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제란은 딱히 따지지 않았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썩 좋지 않은 첫 만남을 딱히 마음에 두지 않는 제란이 마음에 든 인수였다. 게다가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더 필요했고, 지금은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승낙하면 저에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나요?”
일단 내쳐지지 않은 것에 제란은 만족했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10억 루로가 필요합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에 제란은 역시 초월체는 스케일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만 금액이 너무 커서 현재의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소리인가요?”
“만약 제가 가주가 되어 가문의 수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10년 안에 가능할 거라 봅니다.”
이야기를 듣던 샤린이 놀라며 크게 물었다.
“가주가 되시려고요?”
디네도 아는 척을 했다.
“켈 가문은 마법사가 가주가 될 수 없지 않나요?”
제란이 피식 웃었다.
“규칙은 힘이 있는 자가 고치면 그만이죠. 문제는 그 힘을 어떻게 기르느냐는 거고.”
제란이 눈길을 돌려 인수를 보았다.
“요컨대 힘을 길러 가주가 되는 것을 도우면 1년에 1억씩 줄 수도 있다는 소리 같은데 맞나요?”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그걸 원하신다면 기꺼이 승낙하겠습니다.”
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3년 안에 필요합니다.”
제란이 눈썹을 올리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3년이면 꽤 빡빡하군요.”
“여러 계획을 세워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도 그 계획의 하나로 추가가 되었고요.”
긍정적인 대답에 제란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가주가 되는 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말인가요?”
“제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요.”
제란은 의심하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수가 제란에게 일정을 설명했다.
“숲에 있는 마을로 갈 겁니다. 위치를 비밀로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디네가 물었다.
“저도 따라가도 돼요?”
디네의 물음에 플라가 끼어들었다.
“야. 네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디네는 가볍게 플라의 물음을 무시하고는 인수에게 다시 물었다.
“괜찮죠?”
미인이 따라온다는 것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비밀만 잘 지켜주신다고 약속하면 상관없습니다.”
“약속드리죠.”
플라가 한숨을 푹 쉬고는 제란에게 물었다.
“카스토에 대한 약속은?”
제란은 관심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이젠 싸울 필요도 없어져 버렸군. 좋을 대로 해라.”
“한 번 싸워보는 거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플라가 조금 아쉬운 척하자 디네가 끼어들었다.
“괜히 지고 나서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
플라가 디네를 노려봤다.
“이길 수도 있잖아?”
인수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마갑의 차이 때문에 힘들걸.”
“쳇.”
믿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인수는 이어 제란에게 말했다.
“당장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해산할 때 플라가 인수를 불러 둘만 식당에 남았다.
“왜? 억울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만 알겠다면 말리지는 않아.”
플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경고 하나 해주려고.”
“경고?”
“디네를 조심해.”
“조심하라니? 뭘?”
“걔 분명히 너에게 작업 걸 거야.”
의외의 말이었다. 그리고 절대 나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남녀가 만나다 보면 썸탈 수도 있는 거지,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플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히 이렇게만 말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자세히 설명해 줄게.”
“말해 봐.”
“일단 지구와 다른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해. 마법사는 자식을 만들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댔지?”
“어.”
“그럼 하나 물어볼게. 마법사인 네가 만약 자식을 낳고 싶다면 어떻게 할래?”
“당연히 밤일을 열심히 해야겠지? 어쨌든 제로에 가까운 뽑기라도 뽑다 보면 나오니까.”
“맞아. 당연한 소리지. 그리고 나아가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상대를 여럿 두기도 하고, 자주 바꾸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첩 같은 건가?”
“첩이라기보다는 씨받이에 가까운 것 같지만, 딱히 남자만 그러는 건 아니야. 그리고 이런 문화는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고, 능력만 된다면 권장할 정도지. 덕분에 지구 기준으로 보면 문란하게 보일 수도 있어.”
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 지구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그런데 그게 네 사촌과 만나는 걸 조심해야 하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야?”
“아직 시작이야. 계속 들어봐. 두 번째로는 디잠모라는 모임이 있어. ‘디네와 잠을 잔 사람들의 모임’의 줄임말이야.”
인수가 피식 웃었다.
“별것이 다 있네. 뭐야 그 모임은? 구멍 동서끼리 만나서 뭐 하려고? 설마 이 세계에선 그런 거도 권장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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