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게시판.

올운이 왜 마을에 있는 건지는 디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씀대로 그 인수라는 분에게 마성의 칭호를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올운이 고개를 저었다.
“초월체에게 칭호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마성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던데요.”
“초월체라 확신하시나 보네요?”
“네. 다른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것 같지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거는요?”
“이렇다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강함을 이해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뿐이죠.”
“그렇군요.”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무튼, 이제 시작해 보실까요?”
“그러시죠.”
올운은 휴인에게 말한 대로 마갑이 없어도 이길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거리를 두고 서서 검을 뽑는 것을 신호로 대련이 시작됐다.
이미 하프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올운은 시작부터 당황하지 않았고, 서로 견제의 의미로 한동안 공방을 주고받았다.
치료를 마친 제란이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마갑전을 해야 했다는 거죠?”
디네가 답했다.
“모르면 맞아야죠. 수업료라 생각하세요.”
제란이 자신의 추측이 옳음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두 분 모두 이스트모스에서 후위죠?”
대답은 휴인이 했다.
“네. 다만 올운 님의 무장은 후위가 맞지만, 역할은 전위에 가까워요.”
디네가 덧붙였다.
“공격을 허용하는 일이 적으니 앞에 나서도 다른 전위 이상의 효과를 내죠. 타국으로서는 굉장히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분입니다. 혼자서 세 명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데, 마성을 묶어둘 수 있는 자가 없으면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알아도 못 막는 전술이었다.
“그게 지금 가란이 3년째 1등을 하는 이유고요. 그런데 한동안 참여 안 한다고 하셨으니 순위가 좀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대련은 점점 매서워졌고 오래지 않아 하프가 검을 놓치며 끝이 났다.
올운이 땅에 떨어진 검을 들어 건네주자 하프가 아쉬운 듯 말했다.
“마갑 없이는 이길 줄 알았는데, 차이가 생각보다 더 컸나 보네요.”
올운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저와 제 스승님을 제외하면 마갑 없이는 당신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인수 님도 있긴 하군요.”
“위로해주시는 건가요?”
“아니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스승님은 어떤 분이시죠? 강하신가 봐요?”
“강하시죠. 하지만 아쉽게도 그분이 지고 계신 마나의 선물 탓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계시죠.”
올운의 스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이스트모스에서 본 적 있나요?”
“아니요. 그분은 대표가 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저와 대련을 하고 싶어서 오셨다고 했는데, 언제 돌아가실 계획인가요? 가능하면 기다렸다가 인수 님도 보고 가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하프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언제 올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하루 정도만 있다가 돌아가려고요.”
“그렇군요. 그럼 전에 이야기했던 귀화 이야기 한 번 고려 해보세요.”
“알겠어요.”
필람과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차마 생각 없다고 답하지 못했다.
인수는 술집 주인에게 들었던 게시판이 생각나 길드로 향했다.
-굳이 건달들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뭐지?
“호식아.”
인수는 호구가 마을 걸자 호식이를 불렀고, 호식이가 나타나 머리 위에 앉자 답했다.
“그럼 다 죽여버렸어야 했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그저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야.
“필요악이라고 생각했거든. 남을 등쳐먹는 놈들은 절대 없앨 수 없으니 차라리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확실히 없앨 수 없긴 하다고 봐. 어디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니까.
“지금 돈을 버는 계획의 핵심인 라비엔에서 저런 놈들이 활개 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고, 피해를 감수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일단 저들을 이용해 봐야지.”
-알겠어.
이야기가 끝나고 인수는 길드로 들어갔다.
진 도시와 달리 규모가 작은 라비엔의 길드엔 게시판 마법 물품이 한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당장 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옆에서 함께 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언제 차례가 올지 감이 안 잡힌 인수는 길드 직원에게 물었다.
“게시판을 보려고 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보기 힘드실걸요?”
의외의 답이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문제죠. 지금 게시판을 보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뺏어낼 수 있겠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길드 안은 폭력 금지입니다.”
얼굴 들이밀 곳도 없이 빽빽하게 게시판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좀 뜸해지는 시간이 있지 않나요?”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길드가 열려 있는 모든 시간은 항상 저래요. 저들 중 몇 명은 고정적으로 자리를 지키고요.”
순간 인터넷 중독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중독자들을 이기기보다는 그냥 하나 장만하는 게 나을 것으로 보였다.
“게시판은 어디에서 구매할 수 있죠?”
“길드에서 판매합니다.”
“길드에서 마법 물품도 만들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저 마법 물품 공방에서 만들고 저희는 판매 대행을 하는 거뿐이죠.”
딱히 어디서 만들든 상관은 없었지만 플라의 할아버지가 발명한 마법 물품이라 좀 더 관심이 있어서 물었을 뿐이다.
“가격은 얼마죠?”
“5천 루로입니다. 참고로 종일 사용하신다면 약 일주일 정도면 마석의 마나가 다 떨어지고요. 공방에서 마나 충전 비용은 1백 루로입니다.”
마나 충전이야 직접 해도 되겠지만, 물품 자체가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1 루로가 아쉬운 인수가 물었다.
“중고는 없나요?”
“없어요. 그리고 있더라도 가격 차이는 크지 않을 겁니다.”
인수는 플라가 쓰지 않는 게시판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답변 감사합니다.”
인수는 곧장 저택으로 갔다.
“왔어?”
직무실에서 여전히 바쁘게 서류를 보던 플라가 인수를 보고는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인수도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 그런데 여전히 바빠 보이네?”
“초기잖아. 인사 문제도 있고, 예산 편성 문제도 있어서 한동안 바빴지. 지금은 그래도 좀 나아졌어.”
“도와줄 거나 내가 알아야 할 건 없고?”
플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아직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네.”
“지어진 매장 건물은 봤지?”
“어. 디자인은 무슨 명품 매장을 흉내 낸 건가?”
“아니?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베낀 건데?”
얼핏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아. 그래? 아무튼, 멋있더라.”
플라는 수행원이 가져온 차의 향을 맡으며 물었다.
“약속했던 일은 어떻게 됐어?”
제란과의 약속에 대해 물었다.
“별거 없어. 그냥 마을로 같이 가서 한동안 마을에 도움을 주기로 했지.”
“잘됐네.”
인수는 문득 올운이 떠올랐다.
“그런데 넌 올운이 누군지 알아?”
“알지. 가란의 마성이잖아. 왜?”
“그 올운이 마을에 있다고 말했던가?”
플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아니? 그자가 왜 거기 있어?”
“전에 진 도시에서 만났는데, 다짜고짜 나한테 카스토를 신청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기면 돈을 달라고 했는데, 돈은 없다고 하기에 3년 동안 날 도와달라고 요청했지.”
플라는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와. 마성도 이긴 거야? 그럼 혹시 칭호도 받았어? 이제 네가 마성인 건가?”
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칭호를 걸지는 않았어. 싸우기 전에 이기면 준다고 하긴 했는데, 뭔지 몰라서 거절했거든. 이기고 나서는 딱히 그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고. 혹시 받았어야 했나? 그거 돈 되는 칭호야?”
플라는 인수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뭐, 딱히 돈이 되는 거도 아니고. 너로서는 귀찮아지기만 할 테니 안 받는 게 낫긴 해.”
“그럼 됐어.”
“디네는 뭐래? 올운을 보고는 아주 학을 뗐을 거 같은데.”
플라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많이 놀라고 당황하긴 하더라.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야?”
“심각하지. 숲에서는 누구를 죽이던 법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나름 에란드에서 관찰자로 활약하는 디네니까. 올운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그런 거 같아.”
“디네도 함께 돌아온 거야?”
“아니. 누구를 마을로 데리고 올 거라고 하던데. 잘은 몰라.”
플라가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안부는 됐고. 오늘 찾아온 이유는 뭐야? 필요한 거라도 있어?”
“어. 전에 게시판 하나 가지고 있다고 했잖아? 그거 좀 빌려줘.”
“게시판? 어디에 쓰게?”
“핸드백 반응 좀 보려고. 소식지에 광고도 했다며?”
“어. 봤어?”
“본 건 아니고 전해 들었어. 그래서 게시판이 떠오른 거지.”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플라는 수행원을 불렀다.
“내 방에 가서 게시판 가져와.”
“알겠습니다.”
이내 수행원이 게시판을 가져왔고 플라가 먼저 작동시켰다.
“사용법은 알아?”
“아니. 스마트폰하고 비슷하지 않아?”
플라가 끄덕였다.
“뭐, 그렇지?”
손으로 드래그를 하며 검색을 했고, 인수도 옆으로 이동해 같이 봤다.
“별로 많은 이야기는 없네.”
아직은 핸드백에 관한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양산 판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제 시작이겠지.”
이따금 보이는 내용은 꽤 우호적이었다.
“다행히 예쁘다는 의견이 많아.”
플라는 인수에게 게시판을 건네줬고, 한동안 검색을 하던 인수가 말했다.
“그보다 라비엔에 관한 이야기가 여럿 보이네.”
“그래? 뭐래?”
“여러 사업이 진행되며 도시가 활발해지고 있다. 사람과 돈이 모이고 있다. 뭐, 이런 이야기.”
“그거도 좋은 이야기네.”
인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게시판은 내가 가져도 되지?”
“어. 혹시 쓸 만한 정보가 보이면 알려주기만 해.”
“그래. 그럼 이만 간다.”
인수는 저택을 나서 마을로 향했다.
진 가문에 가주인 척 속이고 들어간 디켈은 라인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가주의 직계 가족이 기거하는 저택과 정원에는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찾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눈에 띄는 걸 피하고자 가능한 한 조심히 움직여서 더욱 찾기가 힘들었다.
종종 시혼이 찾아와 조사의 진행 상황을 이야기해 줬는데, 사실 디켈에게 있어 진 가문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세한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입막음을 당한 모양이었다.
“···.”
“세한과 친한 가신들을 탐문하는 중입니다만, 아마 뭔가를 얻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전달자가 말했다.
-세한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약점을 잡혔거나 협박을 당했던 것 같다.
“아마 약점을 잡혔거나 협박을 당했을 겁니다.”
시혼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세한이 깊게 관여되어 있다면 뭐라도 나왔을 거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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