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갈 카덴.

아케가 휴인의 답을 재촉했다.
“누군데?”
휴인이 식사를 멈추고 아케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마갑으로 무장한 마성을 마갑 없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케도 뛰어난 마법사였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농담하는 거로 보이지는 않으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세상은 넓으니 있다고 해서 못 믿을 것도 없다고 생각해.”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직접 싸우는 걸 보셨다면 또 달라졌을걸요? 오죽하면 초월체를 의심하겠어요.”
“네가? 아니면 올운이?”
“둘 다요. 물론 마성이 먼저 의심된다고 저에게 말해 준 거지만요.”
“그래서 지금 그 초월체로 의심되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중이란 거니?”
“정확히는 3년 동안 따라다녀야 해요. 3년을 걸고 카스토를 신청했다가 졌거든요.”
아케는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휴인을 쳐다봤다.
“괜찮은 거니?”
“오히려 저는 더 좋아요. 딴짓 안 하고 저만 봐 주니까요.”
아케가 콧방귀를 꼈다.
“흥. 올운 그 녀석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더니 쌤통이구나.”
아케는 올운이 휴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알고 있기에 좋게 보지 않았다.
휴인이 아오라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말렸지만 휴인이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승낙한 것일 뿐이었다.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예요.”
“아무튼, 너도 3년간 함께 따라다닐 거란 소리지?”
“네. 물론 저는 필요하면 지금처럼 들를 수 있고요. 원하시면 종종 찾아뵐게요.”
“나야 좋지. 최대한 많이 오거라. 내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휴인은 가란에 돌아온 또 다른 목적을 떠올렸다.
“그럼 왕성에 가셔서 3년간 못 올 거라고 좀 전해주시겠어요?”
돈을 가지러 왔지만 돈이야 휴인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바쁜 어미를 잘도 부려먹는구나.”
“필요한 거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뱉은 말이 있어 무를 수도 없었다.
“알겠어. 그럼 언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니?”
“식사 끝나고 챙길 거 챙기고 바로 가려고요. 괜히 꾸물거렸다가 왕성에서 찾아오면 귀찮아지니까요.”
바로 간다는 말에 조금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려무나. 종종 찾아온다는 말 잊지 말고.”
휴인은 곧장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식사가 끝나기 전에 무산되었다.
“왕성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아케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땐 참 빠르구나. 모셔라.”
이윽고 벨룬이 식당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인지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케는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여주었다.
휴인은 태자의 측근인 벨룬을 알고 있었다.
“태자께서 보내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식사는 하셨나요? 어디 안 도망가니 함께 드시죠.”
예의상 한 말이라 여긴 벨룬이 거절했다.
“아닙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바로 보고를 드리러 가야 해서요.”
“저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겠죠?”
“그렇습니다.”
“전갈 잘 받았습니다. 두 시간 정도 뒤에 찾아뵙겠다고 말씀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말을 전해 받은 이상 이대로 도망갈 수는 없었다.
벨룬이 돌아가자 휴인이 말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졌네요.”
아케는 그래도 아쉬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룻밤 자고 내일 간다고 하지 그랬니?”
휴인이 웃으며 답했다.
“금방 또 올게요.”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던 중 아케가 휴인이 매고 있는 작은 가방을 보고 물었다.
“처음 보는 패턴이구나? 그건 뭐니?”
휴인도 잊고 있던 허리춤의 핸드백을 보고는 말했다.
“아. 핸드백이라고 불러요. 가죽으로 만든 액세서리인데, 예쁘지 않아요?”
가방은 하인들이 드는 거란 고정 관념이 있음에도 작아서 그런지 감성을 울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구나.”
“에란드에서 유행하나 봐요. 라비엔에서 팔고 있다는데, 관심 있으면 사람 보내 봐요.”
“한 번 만져봐도 되니?”
휴인은 핸드백을 건네줬고 아케는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아얀하크의 가죽으로 만든 것 같구나. 가방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운걸?”
“잘은 모르지만, 가격이 꽤 나가나 봐요.”
“재미있네.”
아케는 진심으로 흥미를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 휴인은 돈을 챙기기 위해 은행으로 갔다.
‘그런데 얼마나 가져가야 하지?’
많을수록 좋겠지만 금화를 가져가기에는 너무 성가셨다.
‘수표도 받으려나?’
나라가 다르다 보니 확신이 없었다.
‘일단 100만 가론 가져가고 필요하다면 또 오지 뭐.’
은행에 10만 가론짜리 수표를 10개 요구해 받은 휴인은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휴인은 이어 순간이동을 이용해 수도로 향했고, 왕성에 도착한 휴인은 곧장 태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왕성 안에는 많은 신하들과 하인들이 있었는데, 서로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도 휴인을 보자 하나같이 눈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왕성의 한 객실. 백작 가문의 아들인 휴 구헨은 18세의 나이에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왕성에 처음 와 본 그는 자신의 수행원과 이야기 중이었다.
“왕성도 뭐, 크기만 크지 별거 없네?”
“그 크기가 대단한 것입니다.”
수행원은 구헨과 달리 처음 본 왕궁의 크기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지금 마성의 아오라가 올 거란 말이잖아?”
“멜 공작가의 휴인입니다.”
멜 공작은 가란의 둘뿐인 공작가 중 하나로 위세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따라서 수행원은 구헨이 조심하기를 바랐다.
“그래. 멜 공작가의 여식. 그런데 어딘가 문제가 있으니 아오라를 하는 거 아니야?”
“어떤 경위로 마성의 아오라가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모르니까 물어봐야지. 내 아오라가 될 생각은 없냐고.”
수행원이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건 마성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당장 마성이 행방불명이니 어쩔 수 없잖아?”
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휴인을 아오라로 삼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구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순혈이라며? 순혈 아오라를 다른 데서 구할 수 있어?”
“아마 없겠죠. 그래도 마성과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고 판단됩니다.”
“설마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척을 질까?”
“만약 도련님의 아오라가 된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건 순혈의 아오라를 얻는 대가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무리 마성이 아오라를 뺏겼다고 해서 나나 우리 가문에 해를 주지는 못할 거 아니야?”
“그건 그렇겠죠?”
“쪼잔하게 보복한다는 소리를 듣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마성은 휘하 세력도 없잖아?”
올운은 작위는 있지만 영지나 부하는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행원은 구헨을 설득할 근거가 부족하다 느꼈다.
“대신 휴인이 거절하면 깨끗이 포기하는 겁니다?”
“물론이지. 나도 나 싫다는 사람 붙잡는 사람은 아니야.”
똑똑똑.
“들어와.”
마침 미리 이야기해둔 자가 객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멜 휴인이 도착했습니다. 태자님의 직무실로 향하는 중입니다.”
구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 그럼 다녀올게.”
구헨은 곧장 휴인이 지나갈 곳에 미리 가서 기다렸다.
멀리서 휴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주변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왕족이 행차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뭐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휴인을 보고 계획대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휴 백작가의 구헨입니다.”
휴인은 신기한 눈빛으로 걸음을 멈추고 구헨을 쳐다봤다.
“지금 나한테 말 건 거야?”
다짜고짜 말을 놓았기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서열상 문제 될 건 없었기 때문에 따지지는 않았다.
“네. 멜 휴인. 마성의 아오라 맞으시죠?”
“맞는데,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바쁘니까 가능하면 간단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허례를 차리지 않는 성격으로 보여 구헨도 굳이 예를 갖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아오라가 되실 수 없겠습니까?”
의외의 말이라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라고?”
“제 아오라가 되어 주시길 요청합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잘못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 혹시 진혈의 마법사야?”
“아닙니다.”
“그러면 과락이네.”
휴인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무시를 당한 구헨이 화가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등 뒤에 대고 해버렸다.
“공작가의 여식이라고 해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휴인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무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휴인이 몸을 돌려 구헨을 보며 말했다.
“너, 삶의 미련이 없는 거야? 나에 관해서 이야기 들은 거 없어?”
공작가의 여식에게서 나올만한 말로는 들리지 않는 막말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예의가 없어도 이런 식으로 협박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일은 구헨의 상식에 없는 일이었다.
구헨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무례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무례 맞지.”
휴인은 가볍게 인정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람 안에 너는 없는걸?”
휴인은 가란에서 왕족과 부모님. 그리고 다른 공작가와 올운을 제외하면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억울하면 카스토 신청해. 네가 이기면 예의를 갖춰주지. 반대로 지면 앞으로 처신 잘하고.”
휴인은 마성에게 지기 전까지 모든 카스토에서 이겨온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카스토를 신청할 자신이 없어 세력을 이용하거나 정치적, 혹은 여론을 이용하는 자는 귀족 간 전쟁을 선포해 가문을 지워버림으로 철저히 박살을 내놨다.
당연히 그런 휴인에게 예의를 바라는 사람은 없어졌는데, 시간이 흘러 과거의 행실이 누군가에게는 잊힌 모양이었다.
구헨은 휴인의 실력을 몰랐거니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 카스토를 신청하려고 했다.
“좋습니다. 카스토를···.”
“잠깐!”
구헨이 말을 하던 중에 갑자기 태자인 카덴이 황급히 나타나 말을 끊었다.
휴인이 우아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구헨은 이미 인사를 했기 때문에 적당히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카덴이 따졌다.
“지금 애 데리고 뭐 하는 거야?”
“다 큰 성인을 애라고 하면 안 되죠.”
“됐고. 갑자기 또 무슨 카스토야? 나 보러 왔으면 잽싸게 왔어야지?”
“가던 길이었습니다. 이자가 저를 붙잡고 아오라가 되라고 하질 않나, 예를 차리라고 하면서 못 가게 막아서 말이죠.”
카덴은 입을 다물고 구헨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 애 맞네. 잘 몰라서 그런 거니 한 번만 봐 줘.”
“알겠습니다.”
카덴은 응접실로 향했고, 휴인은 조용히 따라갔다.
혼자 남겨진 구헨은 상황파악을 위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 중 눈이 마주친 신하를 붙잡고 물었고, 과거 휴인의 화려한 전적을 들은 구헨은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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