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톨 케힌.

응접실에 들어간 휴인은 마성의 일을 보고했고, 카덴은 이마를 감싸며 골치 아파했다.
“초월체? 3년? 후우···.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휴인은 생각해둔 바를 정리해서 답했다.
“일단 3년간은 초월체로 의심되는 자를 따라다니며 조용히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트모스에 참가는 못 할 거고요.”
“그 인수라는 사람을 설득해서 이스트모스만이라도 참가를 허락받을 수 없을까?”
“돈이 필요한 눈치라 돈이면 충분히 설득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당장은 마성이 거절하지 않을까 싶네요.”
“왜?”
“애초에 불만이 있어 에란드로 도망갔던 거니까요.”
“불만?”
“아시잖아요. 아오라가 저 하나뿐인 거요.”
“알지. 그런데 그건 네가 원하는 거였잖아?”
“하지만 마성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요.”
카덴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한 명이라도 좀 허락 해주면 안 돼?”
휴인이 단호히 대답했다.
“저 혼자라는 조건은 계약에 명시되어 있어요.”
“계약이야 당사자가 원한다면 얼마든 바꿀 수 있어.”
“제가 원하지 않아요.”
애초에 계약은 마성의 입장에서는 사기 계약에 가까웠다. 사실을 알지 못할 뿐.
“결국, 너만 설득하면 된다는 말이네?”
휴인은 대답 없이 멀뚱멀뚱 카덴을 쳐다봤다.
“내 권한으로 계약을 무효로 할 수도 있어.”
휴인이 투덜댔다.
“저 말고 순혈의 아오라를 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던가요. 좋다고 진행할 때는 언제고 조금 수 틀어졌다고 이렇게 나오시기에요?”
카덴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그땐 널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할 줄 몰랐지.”
“제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도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런 거죠.”
“···.”
카덴이 말을 잃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휴인이 말했다.
“아오라 이야기는 그만 해요. 이스트모스 건은 기회 봐서 이야기 꺼내 볼게요.”
똑똑똑.
“무슨일이지?”
“톨 케힌이 찾아왔습니다.”
카덴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답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장신에 근육질 몸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중후한 분위기의 그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무장한 상태로 태자를 보는 것이 제지를 당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톨 케힌. 태자님을 뵙습니다.”
그는 이어 휴인에게도 인사를 했다.
“휴인 님도 오랜만이군요.”
“오랜만이네. 검술교관.”
톨 케힌은 가란의 마법 기사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과거에 올운도 그에게서 검술을 배웠다.
케힌은 카덴의 앉으라는 손짓을 받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굳이 휴인과 이야기 중에 찾아온 이유는 뭔가?”
“올운이 도망가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는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저도 은퇴할 때가 됐으니 따라가 볼까 하고요.”
외모보다 나이가 많은 케힌은 올해로 60이었고, 왕에게 은퇴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아직 윤허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케힌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저도 올운처럼 도망가야죠.”
카덴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왕실의 권위가 말이 아니네.”
카덴의 반응이 반쯤은 농담이란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말로는 사과했지만 그렇다고 도망가겠다는 말을 철회하지도 않았다.
카덴이 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했다.
“올운이 교관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상황인 것 같아.”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휴인이 말하기로는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상황이라고 해.”
케힌은 믿기 힘든 말에 휴인을 잠시 보고는 물었다.
“누가 마성을 붙잡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카덴이 휴인을 턱짓하고는 답했다.
“말로는 무슨 초월체가 의심되는 자가 있다고 하는군.”
케힌은 다시 한번 휴인을 쳐다봤고 휴인이 답했다.
“마성이 먼저 의심했습니다. 저는 그저 마성의 판단을 존중하는 거고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뭔가 그렇게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휴인은 카덴에게 했던 말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마성이 카스토를 신청해서 졌대. 마갑도 쓰지 않고 아주 손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가 또 나왔다.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겹치니 오히려 냉정해지는 기분이군요.”
케힌이 말했다.
“말로 해 봐야 뜬구름만 잡는 식일 테니 기왕 따라갈 거라면 일을 좀 맡겨야겠어.”
“그럼 은퇴는 처리되는 겁니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래도 임무를 잘 처리하면 설득은 시도해볼게.”
협상할 처지가 아니기도 하고,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말이었다.
“하명하십시오.”
“첫째로 휴인을 따라가서 올운을 설득해줘. 적어도 이스트모스는 참가해 달라고 말이야. 설득 과정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보고하고. 참고로 아오라를 늘려주는 건 불가능해.”
케힌은 다른 걱정이 들었다.
“다른 대표들과 훈련도 없이 이스트모스만 참가하는 건 나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케힌이 끄덕였다.
“뭐, 일반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마성인데 참가만 해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라 믿네.”
“알겠습니다.”
“두 번째는 그 초월체로 의심되는 자를 조사하고 보고하게. 가능하면 귀화도 권유해 보고. 마찬가지로 필요한 게 있다면 이야기해. 이상이야.”
“분부받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휴인이 말했다.
“오늘 바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분부하실 말씀 더 없으시면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카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물러가도 좋다.”
오전에 마을을 떠나 저녁에 돌아온 휴인과 그녀를 따라온 케힌은 먼저 올운을 만나기 위해 테크와 레이가 훈련하는 곳으로 갔다.
케힌을 본 올운이 놀란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스승님이 여기는 웬일입니까?”
“제자가 재밌게 놀고 있다는 것 같아서 저도 놀러 왔습니다.”
“놀고 있다니요. 제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합니다.”
케힌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별로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군요.”
올운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카덴이 보내서 절 설득하려고 오신 것 같은데, 소용없습니다. 아오라 안 늘려줄 거면 절대 안 가요. 아니, 이젠 가고 싶어도 못가요.”
“그렇군요.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초월체라 의심되는 자가 있다고요? 누구입니까?”
딱히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말하는 케힌이었다.
“인수라는 분인데, 한 번 붙어 보려고요?”
“그것도 좋지요. 마성이 생각하기엔 어떻습니까?”
올운이 손을 저었다.
“못 이깁니다.”
“마갑 없이도 말이죠?”
올운이 단호히 답했다.
“네. 그러니 대련이면 몰라도 카스토를 걸지는 마세요. 대련이라고 받아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케힌은 마갑을 사용할 수 없는 마나의 선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갑 없이는 올운도 이기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야기 들으셨죠? 그는 마갑 없이 마갑을 입은 저를 이겼다고요.”
“듣기는 했습니다. 다만 믿기지 않으니 그렇죠.”
“사실입니다. 다시 싸워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고도 말씀드리죠.”
케힌은 일단 싸워보겠다는 생각은 접고 주제를 바꿨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태자께서 귀화를 권유해 보라 하셨습니다.”
올운이 끄덕였다.
“차라리 그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말 나온 김에 바로 가시죠. 아직 마을에 있습니다.”
올운은 케힌과 휴인을 데리고 인수를 찾아 공방으로 갔다.
“10억 루로요.”
인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10억 루로를 주면 귀화하겠다고 불렀다. 잘하면 한방에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보였다.
올운과 휴인, 케인은 가란의 사람으로 10억 루로가 얼마나 큰 돈인지 감이 안 왔다.
-대략 6억 가론이다.
가란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호구가 말해줬고, 인수가 이어 말했다.
“가론으로는 6억 정도겠네요.”
“6억 가론이라···.”
국가적으로 보면 못 줄 돈은 아니었지만 인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인수는 답이 없자 한 마디 덧붙였다.
“3년 무이자 할부 가능합니다.”
일시불보다는 부담이 적긴 했지만 금액의 변함은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답하기 힘든 문제였다.
케힌이 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입니다. 일단 본국에 돌아가 보고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지구에서도 사람 하나 영입하자고 한국 돈으로 조 단위를 주는 경우는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돈을 받고 지구로 돌아가면 먹튀가 되는 건가? 살짝 미안해질 것 같긴 하네. 그래도 내 코가 석 자인데 어쩔 수 없지.’
인수는 생각을 정리하고 덧붙여 말했다.
“마성을 이기는 실력을 갖춘 마법사를 돈으로 살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케힌이 끄덕였다.
“그 말씀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만 거래라는 것이 손익을 따지는 것이 당연하고 당신을 귀화시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좋습니다. 저는 보통 이 고인물 마을이나 라비엔 도시에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련을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협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지 않겠습니까?”
네 실력 한 번 보여보라는 말을 돌려서 한 케힌이었다.
“대련 말고 카스토 어떻습니까? 제가 지면 귀화하는 조건으로요. 그리고 제가 이기면 단돈 10만 루로만 주세요.”
당장 돈이 없는 케힌이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 전에 휴인이 답했다.
“10만 루로면 6만 가론이죠? 제가 대신 드리죠.”
케힌은 사양하지 않았고 조건을 말했다.
“마갑 없는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인수는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전 마갑도 없어요. 그럼 나가실까요?”
“바로 가시죠.”
케힌은 굳이 다른 사람들이 구경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용히 인수를 따라갔다.
일전에 올운과 하프가 싸웠던 공터에서 카스토가 시작이 되었다.
인수는 설마 마성보다는 강하지는 않을 거로 예상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몇 수를 나눠보자 올운 보다 강함을 느끼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뭐지? 마성이 가장 강한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닌 건가?’
당연히 올운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것은 마갑이 없이 싸웠을 때의 기준이다. 인수는 케힌이 마갑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마나의 선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힘과 속도로 몰아붙이는 올운과는 달리 싸우면서 자신의 전투 스타일과 버릇 등을 파악하는 노련함이 느껴졌다.
‘다운로드 중인 건가?’
인수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생각에 일부러 결착을 내지 않고 싸웠다.
한동안 돈을 벌기 위해 싸움을 뒷전에 두긴 했지만, 인수는 태생이 호전적이었다. 기왕 싸우게 되었으니 철저히 즐길 요량이었다.
‘너만 다운로드를 하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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