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패션쇼.

인수는 올운의 표정을 보고는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저도 가능하면 심심함을 풀어드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취미 같은 거 있나요?”
막상 원하는 게 뭔지 물어오자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던 올운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수련하는 거 외에 취미가 없던 삶이 떠오르지 않자 올운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취미라 부를만한 건 없네요.”
인수가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여줬다.
“그럴 수 있죠. 일 중독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네요.”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제가 도와드릴 테니 지금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보통 취미는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하죠. 사람마다 욕구와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취미도 다양한 거고요.”
올운이 천천히 끄덕였고 인수가 이어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욕구를 채우길 원하십니까? 식욕? 성욕?”
올운이 하나씩 짚어가며 답했다.
“끼니를 걱정하는 상황도 아니고 미식을 찾는 성격도 아니니 식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욕 역시 아오라가 있어 간절하지 않고요.”
사실은 휴인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인수는 흔히들 즐기는 술이 생각났다.
“술은 어떻습니까?”
“술이나 마약도 해본 적은 있습니다만,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지구에서라면 게임을 추천했을 텐데 말이야. 인터넷도 없고···. 어?’
인수는 손에 들고 있는 게시판을 보이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올운은 게시판이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있었다.
“게시판이라고 하죠? 대충 뭔지는 압니다. 시간이 없어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요.”
인수는 미소를 지으며 건네줬다.
“그럼 이 기회에 한 번 사용해 보세요. 어쩌면 취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권장할만한 취미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한국에서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중독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재미있나요?”
“물론이죠. 새로운 세상이라 느껴질 겁니다. 사용법은···.”
인수는 적당히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주로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보는 게 좋습니다. 마법이라든가 이스트모스, 카스토 같은 건 마법사라면 누구나 관심 있을 테니 글도 많겠죠. 아니면 가볍게 유머 글을 보는 것도 좋고요.”
흥미롭게 게시판을 만지작거리는 올운에게 인수가 한 마디 덧붙였다.
“끝으로 핸드백과 관련된 글이 보이면 꼭 좋은 말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마을과 관련된 거니까요.”
올운은 게시판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한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그럼 전 다시 알렌에게 가보겠습니다.”
인수는 게시판에 집중하는 올운을 뒤로하고 다시 알렌에게로 갔다.
올운이 승낙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며칠 뒤, 알렌과 함께 라비엔으로 온 인수는 먼저 플라를 찾아 저택으로 갔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플라가 오며 반겼다.
“어서 와. 그쪽은 누구?”
알렌이 답했다.
“알렌이다.”
“응? 말이 좀 짧다?”
플라의 말에 알렌이 인수를 보았고, 인수가 말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에란드에서 살 수 있게 신분을 만들어줄 사람이니 예의를 좀 지키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렌이 다시 인사했다.
“알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플라는 만족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란 플라라고 해. 예의를 지키라면서 정작 내가 말 놓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수 있는데 이해해.”
알렌은 아쉬운 입장에서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인사는 나눴으니 잠시 자리 좀 비켜줬으면 해. 원한다면 식당에 가서 식사해도 좋아.”
마을에서 굶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급음식을 먹은 거도 아니었기에 반가운 말이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알렌이 응접실을 나서자 인수가 말했다.
“비샨테에서 제법 알아주는 마법사이었나 봐. 나한테도 초면에 대뜸 하대하더라고.”
“지금은 아닌가 봐?”
“어. 누구한테 예의를 좀 주입받은 모양이야.”
“너?”
“아니. 나 말고 마성.”
플라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무튼, 저자의 신분을 만들어달라는 말 하러 온 거야?”
“맞아. 매장의 호위로 쓸 생각이거든. 내가 항상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좋은 생각이네. 귀빈 매장도 슬슬 완공될 테니 보안도 더 신경 써야지. 처리하라고 해둘게.”
플라는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에게 손짓해 부른 뒤 내용을 전달하고는 다시 인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소식지에 판매 순위를 올렸더라?”
그사이 로혼이 소식지에 올린 모양이었다.
“어. 봤어?”
“이야기 전해 들었어. 제법 좋은 아이디어잖아? 돈 많은 귀족들 정신 차리기 힘들게 보이더라.”
플라가 아이디어를 알아주자 인수도 흥이 났다.
“그렇지? 너도 적당히 순위에 이름 올려봐. 1등 하면 너무 조작한 티가 나니 적당히 상위권으로 말이야. 그리고 파티 같은데 자주 다니면서 바람 좀 잡아주고.”
파티 이야기가 나오자 디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디네랑 잤다며?”
인수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대?”
“엊그제 와서는 자랑하듯이 말해 주더라고. 그런데 괜찮은 거야?”
디네가 가진 마나의 선물을 우려한 말이었고, 그 의도를 아는 인수가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지. 횟수가 늘수록 심해진다며? 그리고 다른 여자를 만날 일이 없어서 확인해 볼 수도 없었어.”
담담한 반응에 플라도 시큰둥 대답했다.
“별로 후회하지는 않나 보네.”
당연히 잠자리는 좋았고 같은 상황에 또 처해도 같은 선택을 할 거였다.
“후회할 게 뭐 있어.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병에 걸린다고 해도 잠에서 깨면 괜찮지 않을까?”
“글쎄. 확신할 수는 없지 않아? 네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잠에서 깬다 해도 이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인수가 작은 한숨을 쉬고는 답했다.
“그래도 괜찮아. 사실 그곳에서도 딱히 인기 있는 몸은 아니라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해볼지도 모르고. 한순간이라도 행복했으니 여한 없어.”
플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인수를 바라보다가 다리를 꼬며 화제를 바꿨다.
“지금은 패션쇼 무대를 만드는 중이야.”
잘은 모르지만, 모델들이 여러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영상은 패션에 관심 없는 인수라도 한 번쯤은 본적이 있었다.
“패션쇼 무대?”
“그래. 핸드백은 패션을 위한 아이템이고, 패션이라면 당연히 패션쇼가 있어야지.”
좋은 생각이라 여긴 인수가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런데 패션쇼면 옷도 어울리게 잘 입어야 하잖아? 설마 벗고 할 건 아닐 테고?”
플라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의외로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는데?”
“뭐? 옷 벗고 패션쇼?”
“그래. 당연히 옷을 어떻게 입힐까 고민을 하고 있었고, 채널 브랜드로 의류도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아가 구두랑 향수나 화장품까지도.”
인수가 감탄했다.
“그거도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하지 그래?”
“그게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당장은 힘들다고. 아직 핸드백의 인지도도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기도 하고. 그러니 첫 패션쇼는 오히려 누드로 하는 거도 괜찮지 않을까? 화제도 될 거고, 핸드백에 집중할 수도 있고 말이야.”
인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집중이 될까?”
플라는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응? 당연히 핸드백만 있는데 집중이 안 될 이유가 있어?”
인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플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라면 여자들이 나체로 왔다 갔다 하는데 핸드백에 집중할 수 있겠냐?”
눈을 깜빡이며 답하지 못하는 플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체라면 질리도록 봤다는 건가? 그거라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이상한가?”
인수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라면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본능일 텐데···.”
플라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내 생각이 짧았어. 남자는 집중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주 고객은 여자고 말이야. 또 집중이 안 되면 좀 어때? 그건 그거대로 좋은 거 아니야?”
“뭐, 그건 그렇지.”
“그럼 문제없잖아?”
인수가 손뼉을 한번 치며 말했다.
“좋아. 어쨌든 화제는 충분히 될 거니 그렇게 해보자. 여기는 그 여성 인권이니 뭐니 하는 말도 적을 거 아니야?”
“물론이지. 애초에 노예도 거래하는데 인권은 무슨. 뭐, 그렇다고 너무 퇴폐적으로 하면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 최대한 예술적인 느낌으로 해야겠다. 헤어스타일과 걸음걸이, 시선 정도 신경 쓰면 될 것 같아.”
인수가 끄덕이며 그림을 상상했다.
“그 패션쇼. 꼭 참가해야겠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의상의 시작은 속옷이 좋겠네. 지구에서만큼 예쁘게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흉내만 내도 성공이지.”
인수는 지구의 속옷들을 떠올려봤다.
“확실히 평범한 면 소재의 속옷은 몰라도 망사레이스 같은 건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네. 직물 쪽은 별로 발달하지 않은 모양이야?”
“아무래도 기계가 발달하지 않았고 합성섬유도 없으니까. 고작해야 실크 재질로 수작업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겠어?”
“있긴 있나 봐?”
“있기는 있지. 다만 속옷에 쓰이는 건 본적이 없어. 애초에 속옷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는다는 인식이 아예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인수가 작은 감탄을 내비쳤다.
“오. 그럼 핸드백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최초의 속옷이 되겠네. 기대되는걸?”
“좋아. 속옷을 포함한 의상 같은 건 내가 사람 시켜서 알아볼게. 괜찮지?”
“그래. 핸드백만으로도 바쁜데 거들어주면 좋지.”
“거들긴. 나도 빨리 지구로 돌아가고 싶으니 내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 중이야.”
인수가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인수는 식당으로 가 알렌을 찾았다.
“맛이 어떻습니까?”
알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래간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서 그런지 더 맛있는 거 같네요. 함께 하시죠.”
인수도 시장했기에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알렌과 함께 핸드백 매장으로 간 인수는 로혼과 알렌에게 서로를 소개해줬다.
“이쪽은 로혼. 매장의 전반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이분에게 요청해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알렌, 마법사이고 오늘부터 매장의 보안을 책임질 것입니다. 항상 상주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근처에 머무시다가 소란이 느껴질 때만 나서주면 됩니다.”
서로가 눈으로 인사를 했고 로혼이 서류를 건네며 보고를 시작했다.
“먼저 10명의 여성을 고용해서 핸드백과 게시판을 나눠주고 호의적인 글을 계속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아직 가시적인 매출의 증대 효과를 보기엔 이르지만, 게시판의 반응 자체는 꽤 긍정적으로 바뀐 건 사실입니다.”
“시작이 좋네요.”
“네. 그리고 귀빈 매장이 곧 오픈할 예정입니다.”
“No.1 제품은 되는대로 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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