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앞에서 PT를 하라구요?

- 47화 -
“네에? 일주일 후 전하 앞에서 PT를 하라구요?!”
이서치는 도승지 한종회 대감으로부터 세종대왕의 교지를 전해 듣고는, 너무나 놀라서 그만 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돌겠네! 세종대왕과 여러 대신들 앞에서 윤곤대와 함께 인재 추천으로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하라니!!!’
이건 이서치가 전생에서 광고대행사 시절 자주 했던 경쟁PT가 아닌가.
비딩. 지옥의 레이스. 한편으로는 광고대행사의 백미, 그 잡채!
“아냐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비딩에서 승자와 패자, 그 둘의 희비가 얼마나 갈리는 지를 말이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몇날 며칠을 온통 축배에 빠져 살았고, 만약에 지기라도 하면 그건 그거대로 연일 술을 퍼마시면서 그 얼마나 아쉬움과 씁쓸함에 치를 떨었던가···
분명 윤곤대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 갔을 터이다.
“그도 나처럼 좌절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잘되었다고 벼르고 있을까?”
도승지로부터 듣기로는, 조정에서 이런 일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초유의 사건이라고 했다.
“어이구야! 허허 허허허. 일 났네 일 났어~”
옆에 있다가 엉겁결에 그 소식을 같이 들은 권해룡은 마치 자신이 하명을 받은 듯, 연신 한탄을 하면서 주위를 뱅뱅 돌기만 했다.
“아이고. 형님! 정신 사납게스리~ 가만 좀 계십쇼!”
“이보게 서치! 이걸 어쩌나? 자네는··· 괜찮은가?”
해룡은 마치 본인이 곧 죽을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이서치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열심히 준비해야죠. 그리고 잘 해야죠! 하지만··· 저도 걱정되긴 하네요. 하하하. 허허허. 후후후. 흐흐흐. 헤헤헤.”
“자네는 배알도 참 좋네 그려. 나 같으면 그 소식을 듣고는 벌써 몇 번을 까무러쳤을 것인디···”
이서치는 연신 걱정만 늘어 놓고 있는 해룡 때문에 정신이 사나웠다.
정신을 차리고 머리 속을 좀 정리하려고 이조를 빠져나와 청계천으로 향했다.
* * *
한편 윤곤대는 비슷한 시간에 똑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이후로 집무실에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윤곤대는 윤곤대 대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본인이 세종대왕께 추천서를 올렸을 당시, 무조건 본인이 추천한 5명 중에서 최종 합격자가 나올 것으로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본인과 이서치에게 모두 같은 기회를 주다니···
그리고 둘이서 경쟁을 해 보라니···
그건 결국 윤곤대 입장에서 보면, 패배나 다름없는 거였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지! 그래. 어쩌면 전하 앞에서. 그리고 여러 대신들 앞에서 설명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다시금 내 능력을 전하와 그 모두에게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거지.”
윤곤대는 쓰라린 속마음을 부여잡고는, 이내 전의를 활활 불태웠다.
그는 자신 있었다.
‘아니··· 내가 절대로 질 수가 없지! 더군다나 상대가 이서치라면, 내가 진다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되지. 그러니 이건 단지 한 건의 인재 추천이 아니라, 어쩌면 내 명운이 걸린 기회 인게야!’
이제 겨우 단골이 된 지 몇 달 밖에 안 된.
불과 얼마 전까지는 수원에서 장사나 했던.
거기에다가 칠서를 이제서야 겨우 띠엄띠엄 읽을 줄 알게 된.
그런 단골 초보 이서치에게 본인이 진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봐라! 밖에 그 누구 없느냐?!”
“예이~ 나으리! 찾으시는 일이 있사옵니까?”
윤곤대가 호출하자 그의 비서 역할을 하는 서리 하나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윤곤대는 눈에 잔뜩 힘을 준 채로 결연하게 말했다.
“어서 가서 내 휘하의 단골 서리들을 모두 불러오거라! 아주 중차대한 일이 있으니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어서 오라 전하거라. 아··· 잠깐! 서리들 중에서··· 이서치 만은 그냥 놔두거라. 그리고···”
윤곤대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다시 말했다.
“권해룡도 놔두고··· 나머지 모든 단골서리들은 다 모이라고 전하라. 지금 당장!”
윤곤대는 꼭 이겨야만 하는 이번 승부에 본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최선을 다해서 완승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 또 다짐을 했다.
* * *
지금은 이서치 회귀 +5년. (1423년, 세종 5년)
“아이고 다리야~ 이보게 서치!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는가? 힘들어 죽겠네~”
“형님~ 조금만 참으세요. 오늘 이 후보자만 만나면, 드디어 모든 인터뷰··· 사전 면접이 다 끝납니다.”
벌써 며칠째, 해룡은 이서치를 따라서 한양의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다니고 있었다.
이서치는 자신이 추천한 5명의 후보자를 직접 만나서 심층 인터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세종대왕의 교지를 받은 승정원에서 각 후보자에게 미리 이 사실을 전달하여, 서치가 이들 5명의 후보자들을 만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서치는 이 5명의 후보자들 중에서 최종 후보자 1명을 선정해야 했고, 그것은 각 후보자들을 면밀히 인터뷰한 뒤에 결정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사실 세종대왕의 교지로 인해 지금 조정과 육조는 대단히 시끌시끌했다.
조선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뉴비즈의 책임자를 선발한다는 건, 그 능력과 책임을 떠나 조정의 관리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자리였다.
자그마치 세종대왕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프로젝트의 팀리더 포지션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얼마 후에 있을 경쟁PT 자리에 육조와 삼사의 모든 대신들이 다 모여서 심사를 한다 하니, 요 근래에 이보다 더 중요한 국가 이벤트는 없었을 것이다.
고로 이서치가 추천한 5명, 윤곤대가 추천한 5명, 총 10명의 후보자들에 대한 조정과 관료계의 관심은 아주 뜨거웠다.
그 명단에 들어간 것만 해도 소위 가문의 영광이었고, 어쩌면 앞으로 출세길이 보장되는 골든 티켓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불어 세종대왕의 특명을 받아서 인재 추천의 실무를 맡은 이조전랑 윤곤대와 단골서리 이서치에 대한 소문도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아니··· 이조전랑이야 원래부터 이조 안팎으로 워낙에 잘 나가는 유명한 자니까 그렇다치고. 근데 이서치란 작자는 대체 누군데?”
“그러니까 말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일개 단골서리가 어떻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을까? 거 참 신기하네···”
안팎의 이런 뜨거운 관심은 윤곤대와 이서치 둘 다에게 오히려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윤곤대는 윤곤대대로 이조의 채용 전문가로서의 체면이 있었고, 이서치는 이서치대로 단골 초보 신인으로서의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래서 이서치와 윤곤대는 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갖은 힘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원래는 이서치 혼자서 이 힘든 준비를 다 할 각오를 다졌었으나, 다행히도 윤곤대가 배려해 주어서 권해룡이 이서치를 도와서 함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서치에게는 조력자가 권해룡 1명뿐이었고, 윤곤대는 수십 명의 이조 단골서리들이 죄다 붙어서 거의 중대 단위로 착착 일을 추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며칠 전에 이서치가 5명 중에서 맨 먼저 인터뷰를 봤던 후보자는 ‘차두식’이었다.
그는 홍문관의 정6품 수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 황희 대감이 추천한 인물이었다.
차두식은 과거에 급제한 뒤에 주로 황희 대감 휘하로 이조에 있었지만,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이 탁월해서 현재는 홍문관에서 세종대왕의 브레인 싱크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꽤 있었지만 아직도 수염이 검은 색이었고.
눈매가 짝 찢어져서 매서운 인상이었지만, 이외로 성품은 꽤 온순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슬하에 아들 둘이 있는데 모두 공부를 잘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하던 참이라고 했다.
서류상으로만 보았을 때는, 내심 5명의 최종 후보자들 중에서 이 사람이 가장 적임자인 듯싶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차두식 본인은 과학기술 책임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밝혔다.
의외였지만, 자신은 그런 중요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게 딱히 단점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자리는 노장의 경험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맞네. 사실 내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할 수 있지. 하지만 나이가 들면 열정이 떨어지는 법이야. 이 일에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테니까···”
뜻밖의 거절에 당황한 이서치를 보고, 차두식이 얘기했다.
“대신 내가 자네에게 좋은 정보를 하나 주지! 자네가 추천한 5명의 후보들 중에 나보다 더 뛰어난 적임자가 있네.”
“네에? 그게 누구인데요?”
차두식이 검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게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바로 자네가 할 일이지 않은가?! 하하하.”
“네?”
차두식을 인터뷰하면서, 이서치는 느꼈다.
이 사람은 찐이라고!
그런데 그런 차두식이 그보다 더 뛰어난 적임자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서치는 그에게 매달렸다.
“아이고~ 수찬 어르신··· 뭔가 실마리라도 좀 알려 주십시오!”
“그럴까? 하하하. 음··· 열정만 놓고 보자면 나와 ‘하정무’를 합쳐도 그의 반도 안돼.”
응? 대체 ‘하정무’가 누구인가?
함께 갔던 권해룡이 하정무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통달하여 이름을 떨치고 22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 이조정랑의 벼슬을 지내다가, 작년에 그 유명한 집현전의 부제학으로 천거되었다는.
그야말로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 중에서도 시대의 아이콘 같은 학자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였다.
“홍문관에 차두식이 있다면, 집현전에는 하정무가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는 대학자인 하정무와 차두식을 합쳐도 그의 반이 안된다니.
‘도대체 그가 누구란 말인가?’
이서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두식 다음의 인물을 인터뷰하러 갔다.
다음은 ‘홍명성’이라는 한성부의 종6품 교수로, 역시 황희 대감의 추천을 받은 자였다.
‘홍명성’은 스마트하게 생긴 인상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은 거침이 없었고 다시 직설적이긴 하지만, 뭔가 뒤로 딴 생각을 하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홍명성에게 채용 포지션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에 임하는 홍명성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마음 속에 칼을 하나 갖고 있다네. 그 칼로 전하의 근심 걱정을 모두 잘라 버릴 생각일세!”
“네? 아··· 네. 정말 충정심이 대단하시군요!”
여기 조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빠(세종대왕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서치가 좀 더 물었다.
“앞으로 여러 아래 사람들을 부리실 터인데, 그들을 어찌 다루실 생각이신지요?”
“조직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다고 생각하네. 단, 전하만 빼고··· 그러니 모두 나와 하나가 되어 일심동체로 전하를 위해서 움직여야지!”
* * *
첫날은 그렇게 차두식과 홍명성을 인터뷰했고.
다음 날은 김종서 대감이 추천한 ‘하동구’와 ‘박영서’를 인터뷰했는데, 둘 다 공조에서 김종서 공조판서 아래 일하고 있던 현직들이었다.
먼저 하동구를 만났는데, 그는 공조의 정6품 별제 자리에 인물이었다.
역시 나이가 제법 있어서 가지런히 정비한 하얀 수염이 돋보이는 자였다.
하지만 골격이 장대하고 눈과 코와 입이 모두 커서 멀리서도 확 눈에 띄는, 다소 이국적인 생김새의 인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공조에서 일했던 자라서 과학기술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그 누구보다도 높았고, 그만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높은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물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네!”
“네? 아니··· 아직 아침 진지를 안 드셨는지요?”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서 이서치가 되물었다.
“내가 바로 그 적임자이네! 내가 어서 전하의 곁에 달려가서, 기필코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을 확 끌어 올리고 말걸세!”
“네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다음도 역시 현직 공조에 있는 인물로, 정7품 박사로 있는 박영서라는 자였다.
키가 자그맣고 얼굴은 까맣고 이마가 많이 벗겨진 그는, 얼핏 보면 관료로 보이기 보다는 수원의 저잣거리에서 흔히 봐왔던 촌로의 익숙한 모습과 비슷했다.
나이가 제법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7품에 머물러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어 보니 왜 아직까지 출세를 못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물욕이나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5명의 후보자 중에서 그가 가장 낮은 직급이었는데, 정작 자신은 직급에 대해서 전혀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다소 촌스럽고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순한 모습이었지만, 과학기술 얘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지면서 아무 거침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술술 말하였다.
이서치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래 사람이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조직에 누를 끼친 것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한다면, 그를 어떻게 꾸짖으시겠습니까?”
“아니··· 최선을 다했는데 고개를 왜 숙이나? 누구나 일을 하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 책임은 당연히 책임자가 지는 거 아니겠나? 그러니 그 사람이 내게 고개 숙일 일이 뭐가 있나? 오히려 나는 그의 용기를 더 북돋워주고 앞으로도 계속 거침없이 달려 나가게 해 주어야지!”
이서치가 다시 물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노파심에 여쭈어 보는 건데요? 새로운 일을 하시기에는 나이가 좀 있으신 거 아니신지요?”
“도전하는 데는 나이가 상관없다고 생각하네··· 오히려 능력이 남보다 좀 모자랄 지 모르지만, 열정만큼은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그러신가요? 그럼 이 일을 맡으실 의향은 있으신지요? 무척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텐데요···”
“무척이나 힘들겠지. 하지만 난 그 일을 맡고 싶네. 그 일은···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바램과 일맥상통하는 일이야. 조선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백성들을 이롭게 한다! 그건 관료로서 정말 가치있는 일이지 않나?”
그렇게 4명의 후보자를 인터뷰하고, 드디어 오늘 마지막으로 ‘안정수’라고 현재 예조의 종6품 주부로 있는 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예조판서 ‘허후(許詡)’ 대감의 추천을 받은 자였다.
안정수는 5명의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잘생긴 자였다.
인상이 밝고 명랑했으며, 잘 웃고 말하기 좋아하는 호인이었다.
예조판서의 추천서에 의하면, 안정수가 지금은 예조에 있지만 이것저것 여러 방면에 호기심과 재주가 상당히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과학은··· 시간과 공간의 싸움이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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