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도 패자도 모두 현자타임

- 53화 -
“앞으로 조선의 과학기술을 이끌 책임자는···”
도승지가 대신들 앞에서 인재 경연의 최종 결과를 발표하려 하는데, 그 순간 세종대왕이 직접 나섰다.
“잠깐만, 도승지! 아무래도 짐이 직접 전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도승지가 얌전히 뒤로 물러나고, 세종대왕이 윤곤대와 이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 대신들과 상의한 결과, 이번 과학기술 책임자 자리의 최종 적임자로···”
모두들 세종대왕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윤곤대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고, 이서치도 손에 살짝 땀이 나는 듯했다.
“이서치 단골서리가 추천한 박영서 박사를 선발토록 하였도다!”
세종대왕의 말에 윤곤대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그대로 얼어버렸다.
반면에 이서치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실, 세종대왕으로부터 처음 이 채용 건의 JD를 들었을 때부터 그는 내심 알고 있었다.
이번 채용의 핵심은.
과거에 어떤 일을 한 사람이었냐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 사람이냐는 것임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윤곤대가 읍소를 했다.
“전하~ 다시 한번 재고를 해주시옵소서! 이건 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
갑자기 황희 대감이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
“어허! 내 그동안 자네를 그렇게 안 보았는데··· 착오가 있다니! 이조전랑은 설마 전하와 여러 대신들이 잘못된 판단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황희 대감의 꾸짖음에 윤곤대는 그만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소신은 단지···”
“전하 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도 대부분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만. 나도··· 박영서 박사가 적임자라고 믿게 되었네.”
“대감!!”
“앞으로 조선의 과학기술을 책임지고 발전시켜야 할 그 자리에, 자네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지적한 성리학과 출신성분이 실상은 그리 중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 아니··· 원래는 나도 자네와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이서치와 자네의 경연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지.”
“아···”
“이서치가 아니었다면 나도 분명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겠지. 하지만 박영서 박사는 그간의 업적으로 보나, 그리고 주위의 평판으로 보나 이번 채용에 가장 적임자임이 자명해 보였네. 하마터면 그런 인재를 그냥 썩힐 뻔했지 뭔가.”
그리고는 황희 대감이 세종대왕께 고하였다.
“전하! 박영서도 박영서지만, 이서치 단골서리가 이번에 아주 일을 잘 처리했사옵니다. 제가 저번에도 잠깐 만나 보았지만, 이서치는 앞으로 좋은 단골이 될 자질과 품성을 지닌 자인 듯 하옵니다. 그가 아니였다면 박영서같은 훌륭한 인재를 아무도 알아채거나 발굴해 내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황희 대감의 계속되는 발언에 윤곤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황희 대감이··· 내 스승님이··· 나를 이리 꾸짖으시면서 대신 이서치는 저토록 칭찬하시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윤곤대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번에는 김종서 대감이 세종대왕에게 고하였다.
“전하~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박영서 박사도 물론 좋은 인재이지만, 그런 숨은 인재를 기어코 찾아서 발굴해 낸 이서치 단골서리야말로 앞으로 전하와 조정에 큰 복이 될 자라고 생각되옵니다.”
김종서 대감의 말에 윤곤대는 그만 멘탈이 아주 나가 버렸다.
‘김종서 대감도 이서치를···? 왜 모두들 이서치만 끼고 도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뭔 일이 있던 걸까? 도대체 왜···?!’
그렇게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멍하니 서있는 윤곤대에게 김종서 대감이 나즈막하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조전랑. 자네는··· 앞으로 좀 더 수양을 쌓아야 하겠네. 어찌 사람을 그리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려 드는가? 자네는··· 어찌 전하의 의중을 그리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겐가?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미래를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참으로 안타깝네···”
김종서 대감의 말에 윤곤대가 큰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 윤곤대는 아직도 그의 완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 부정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걸 본 황희 대감과 김종서 대감이 이번 일을 내시반청, 통정사통의 기회로 삼으라는 차원에서 윤곤대에게 작정하고 쓴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런 윤곤대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서치의 마음도 영 편치 않았다.
결과는 이서치의 완승이었다.
그의 간절함이 지난 1차전의 결과를 뒤집고 오늘 역전승을 이끌어낸 것이다.
처음에 부정적이었던 대신들도 오늘 이서치의 발표를 듣고서는, 결국 그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설득력 높은 발표로, 결국에 대신들을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철수는 영 똥씹은 표정이었다.
반면 박영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이서치와 마주 쳐다보더니 서로 씨익 웃기만 했다.
둘 사이에 별 말이 필요 없었다.
세종대왕이 이서치의 공을 치하했다.
“이서치 단골서리. 참으로 장하도다! 짐의 의도를 정확히 잘 파악해서 참으로 훌륭한 인재를 추천했도다. 역시··· 짐의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내가 자네에게 일을 맡긴 것이 역시나 신의 한 수였다! 하하하.”
세종대왕은 이서치의 사람 보는 안목을 칭찬하면서도, 그런 이서치를 중용한 세종대왕 자신의 혜안을 자뻑했다.
심지어는 무흑에게 동의도 구했다.
“내금위장. 안 그런가?”
“네! 전하~ 역시 전하의 안목은 더할 나위 없으십니다!”
하지만 이서치는 기쁘면서도 뭔가 찜찜했다.
‘이겼는데··· 이 찜찜함의 정체는 뭘까?’
* * *
세종대왕이 합격자를 발표하자마자, 흔히 말하는 논공행상이 바로 뒤따라왔다.
말도 안되는 초스피드였다.
박영서가 꽤나 마음에 든 세종대왕은 혹시라도 대신들의 마음이 그새 바뀔까 봐.
바로 논공행상을 열어서 박영서의 임명을 기정사실로 공표하려는 뜻이었다.
세종대왕은 박영서에게 종3품 ‘사간’의 품계를 하사하려 했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이 놀라서 그런 파격적인 선례는 없다고 난리를 치며 극구 반대했다.
하긴 종7품에서 종3품으로 승진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6급 주무관이 한 번에 2급 국장으로 승진하는 거와 마찬가지의 파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절충을 한 끝에, 결국 박영서는 정5품 ‘별좌’로 품계를 받게 되었다.
이것만 해도 마치··· 충주시 공무원 승진과 비슷할 정도로 놀랄만한 케이스였다.
박영서가 세종대왕에게 감사와 각오의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앞으로 소신, 정 5품 공조 별좌 박영서, 조선과 백성들을 위해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겠나이다!”
원래는 박영서의 임명과 품계 제수로 끝날 일이었지만.
이번 채용 건의 숨은 공로자인 이서치에게도 논공행상을 해야 한다고 김종서 대감이 발의를 했다.
그게 맞다고 황희 대감이 제청하였다.
이에 세종대왕은 처음에 종7품을 얘기했지만, 역시나 대신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죄다 일어섰다.
세종대왕이 난처한 표정으로 가만히 이서치를 바라보자, 이서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잠자코 가만히 있는 이유는, 처음부터 윗사람들에게 찍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서치에게는 가장 아래 직계인 종9품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앞으로 소신, 이조 참봉 단골서리 이서치, 앞으로도 좋은 인재를 찾는데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새로 품계를 수여받는 그들을 구경하던 이철수가 윤곤대에게 한마디 던졌다.
“자네··· 그토록 자신있어 하더니만. 결국 이게 뭔가? 남의 잔칫상에 들러리나 선 꼴이고, 나는 망신살만 잔뜩 끼었지 않은가? 에잇!”
이철수의 비아냥에 윤곤대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힘없이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논공행상이 끝나고 세종대왕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황희 대감이 힘들게 나오신 김에··· 앞으로는 대감이 다시 영의정으로 근무해 주셔야겠소이다! 오늘 결정에 황희 대감도 적잖이 거드셨으니,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 하지 않겠소?”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소신은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 일을 하기에는 영 무리가 있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오늘은 어찌 나오셨소?”
“아··· 전하~ 그게 아니라...”
세종대왕이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대신들은 어찌 생각하오?”
모든 신하들이 환호를 질렀다.
“이조전랑은 어찌 생각하는가?”
“네? 네··· 전하. 분부대로 하시옵소서. 제가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사옵겠니까.”
“이서치도 그리 생각하는가?”
“네? 네... 전하~ 낙장불입이옵니다!”
세종대왕은 이서치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낙장불입? 한번 내어 놓은 패는 다시 물릴 수가 없다?! 허허허~ 거 정말 그럴싸한 표현이로다. 황희 대감! 낙장불입이오! 허허허~”
그렇게 번개같이 또 하나의 인사명령이 이루어졌다.
박영서와 이서치는 세종대왕 앞에 섰다.
전하께서 명하였다.
“듣거라. 종5품 공조 별좌 박영서와 종9품 이조 참봉 이서치는 앞으로도 조선과 백성을 위해서 그 충심을 다하도록 하거라!”
“네이!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렇게 해서 이서치는 드디어 조선의 9급 공무원 정직원이 되었다.
* * *
지금은 이서치 회귀 +5년. (1423년, 세종 5년)
그렇게 최종 합격자 발표와 갑작스러운 논공행상까지 모든 게 끝나고 난 후, 이서치는 박영서와 함께 퇴청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도승지로부터 전해 듣는 바람에, 그날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퇴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나서 선정전을 막 빠져나오려는 순간, 이서치는 홀로 남은 윤곤대를 볼 수 있었다.
모두가 퇴청하고 없는 텅 빈 선정전 앞마당에, 윤곤대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망연자실함에 이서치도 속이 쓰라렸다.
서치는 그에게 다가갈까 하다가, 오늘은 그냥 이대로 그를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박영서와 함께 미리 예약해 두었던 객잔으로 향했다.
오늘의 승리와 승진의 쌍축배를 들기 위해서였다.
객잔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박영서의 전.현직 동료들이 여러 명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영서를 축하하는 건배와 덕담의 물결 속에 객잔은 밤새 흥청거렸다.
하지만 이서치는 그 기쁨의 파도에 함께 올라탈 수 없었다.
아까는 발표가 드디어 다 끝났다는 후련함에, 그리고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어서 제대로 알아 차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서 흥분된 마음이 좀 진정되자, 아까 선정전 앞마당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윤곤대의 축 져진 어깨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의 그런 무너진 표정은 오늘 처음 보았다.
그제서야 서치는 뒤늦게 현타가 몰려왔다.
‘내가 간만의 경쟁PT에 승부욕이 불타서, 앞뒤 안 가리고 너무 무자비했구나···’
윤곤대와 ‘우애는 우애고, 승부는 승부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윤곤대도 마차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승패가 갈리자, 그 명암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서치도 경험해 봐서 안다.
그냥 PC방 게임에서 한 판 진 정도가 아니다.
경쟁PT에서 진 후에 몰려오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그 얼마나 쓰디 쓴 지는 당해 본 사람 만이 안다.
이서치는 의기소침해 있을 윤곤대를 떠올리자 기분이 많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박영서에게는 좀 피곤하다고 말하고, 술자리를 먼저 빠져나와서 집으로 갔다.
집으로 향하는 밤길에, 수많은 생각이 뒤따랐다.
‘내가 너무한 걸까? 윤곤대는 괜찮을까? 앞으로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까? 나는 그를···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 휴~’
집에 와서도 밤새 뒤척이다가 잠을 쉽사리 이루지 못한 이서치는, 다음날 하루 종일 끙끙 앓아 누웠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지난 2달 동안 찍어 눌러 두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 닥친 탓이었다.
* * *
이서치는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었어도 이조로 출근할 엄두가 영 생기질 않았다.
윤곤대를 마주하기가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서야 용기를 내서 이조의 윤곤대 집무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의 방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권해룡을 마주쳤다.
“형님! 출장가셨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돌아오셨군요?”
“아! 이서치! 난 어제 막 돌아왔다네. 그나저나··· 내가 없던 사이에 아주 큰 일이 벌어졌었구만! 자네 얘기는 어제 오늘 이사람 저사람으로부터 아주 진이 나도록 들었네! 하하하~”
“무슨 얘기를요?”
“자네가··· 천하의 이조전랑님을 제끼고 경연에서 이겼다는 걸로 그냥 여기저기 아주 난리가 났지 뭔가. 참··· 보기보단 대단한 사람이야! 자네는···”
“운이 좋았던 거죠 뭐···”
“아! 그리고 또 하나 기쁜 소식이 있지? 축하하네! 이번에 체아직 꼬리 떼버리고 내침 김에 종9품 참봉으로 정식 품계도 받았다며? 그거 참, 잘 된 일이야! 정말 축하하네. 이 친구야!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제가 그간 형님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그러니 다 형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조전랑님은 어디 가셨나요? 글쎄··· 웬일로 대낮부터 방문이 잠겨 있네요?”
“어? 자네··· 그 소식, 아직 못 들은겐가?”
“네? 무슨 소식요? 제가 어제는 몸이 안 좋아서, 지금에서야 출근하는 터라서요···”
“음··· 당분간은 이조에서 이조전랑님을 볼 수 없을 거라네.”
“네? 아니!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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