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요··· 제가 그럴 능력이 안돼요

- 58화 -
느낌이 싸해서 뒤를 돌아보니.
머리에는 두건을 둘러쓰고 눈이 왕방울만 하고 수염이 북슬북슬하고 머리는 산발을 한 자가 어느새 나타나서 이서치 일행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놈들!!”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이어져 얼굴 주변을 빙 두르고 있는데, 사극에서 흔히 보았던 그 전형적인 '산적 수염'이었다.
“흐흐흐. 이게 웬 횡재여? 요놈들아! 목숨이 아깝거든, 가진 거 썩 다 내놓거라!!”
마동식이 나즈막하게 외쳤다.
“이런! 모두들 내 주위로 바짝 붙으시오!”
산적들은 모두 7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몸에는 어떤 짐승의 것인지 모를 가죽으로 만든 옷을 두르고 있었다.
각자 손에는 몽둥이부터 철퇴나 도끼 등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이서치 일행을 주욱 둘러싸고 포위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커 보이는 자가 앞으로 쑤욱 나오더니만, 잽싸게 이서치의 목에 커다란 칼을 들이댔다.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칼이었다.
그 무식하게 생긴 대도에 맞으면 어디가 베어지기 보다는, 그냥 다 부러질 것만 같았다.
“으억! 왜··· 이러시오? 이 칼 좀··· 치우시고, 우리 지성인답게 말로 합시다. 말로···”
“말로? 하하하. 그래 좋다. 말로 하마! 닥치고! 짊어진 짐 다 내려 놓거라! 저 수레와 나귀는 짐 채로 그냥 놔두고!”
그 때 뒤에 있던 마동식이 재빠르게 이서치를 낚아 채더니 그를 뒤로 밀어내고, 대신 산적 앞에 나섰다.
“너 뭐야? 산적이야?”
“얼래? 이 놈 봐라? 덩치에 비해 제법 잽싸구나? 허허허. 이 놈이 어디 겁도 없이 눈을 부라리고 쳐다봐? 그래 우리 산적이다! 어쩔래?”
“그럼··· 너가 두목이야?”
“두목? 이 놈아! 두목님이라고 해야지! 그래. 내가 여기 총책임자다! 왜?”
“그래? 그럼 너부터 좀 맞자!”
“아니! 이 놈이 그래도···!”
마동식이 손바닥을 쫙 펴고 산적 앞에 마주 서더니 어깨와 팔을 풀었다.
그 거대한 손바닥을 마주하자, 산적 두목이라고 한 자가 살짝 움찔했다.
그리고는 마동식 주위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호위는··· 너 혼자야?”
“어··· 나 미혼이야. 어떻게 알았어?”
“뭐? 허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이런 덜 떨어진 놈을 그냥···”
산적 두목이 대도를 마동식에게 있는 힘껏 내리쳤다.
“으악!!!”
이서치는 비명을 지르며,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덩치만 크지 송충이 따위에도 무서워 소리나 지르는 자가 혼자서 어찌 산적 떼를 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산적의 대도에 너덜너덜해진 마동식의 머리통을 떠올렸다.
하지만 마동식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솜씨로 두목의 칼을 피하고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냅다 두목의 뺨을 내리 갈겼다.
[ 퍼억!!! ]
“컥!!!”
두목은 마동식의 그 무시무시한 싸대기 한 방에 그만 저만치 나가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 두목···님? 두목! 정신차려요! 응? 어이구야~ 아주 갔네 갔어! 야! 뭣들 하느냐? 다들 저 덩치를 난도질하지 않고?!”
나머지 산적 6명이 우루루 마동식에게 달려 들었다.
마동식은 여유있게 그들을 피하며, 산적들에게 싸대기 1대 씩을 차례대로 날렸다.
그가 싸대기를 날리자 커다란 손바닥이 산적들의 얼굴에 마치 북 치는 소리를 내면서 내려 꽂혔고, 산적들은 모두 외마디를 질러대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칵!”
“켁!”
“으악!”
“어이쿠야!”
“쿠악!”
“억!”
산적들 일부는 바로 한 방에 기절했고, 또 일부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뭐.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기는··· 내가 지금은 공무 수행 중이라 바빠서 그냥 가는데. 너네들 다음에 만나면 다 죽는 줄 알아. 그러니 앞으로 이런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어? 응? 자자~ 쓸데없는 일로 지체되었으니, 어서들 서둘러 갑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쿨하게 마동식이 앞장을 서서 나갔다.
이서치가 뒤따라 가면서 그에게 말했다.
“형님! 와!! 내 다시 봤소! 근데··· 끝내주네요. 형님 싸대기 하나는··· 와우~”
“동생! 나, 괜찮았어?! 하하하~”
이서치가 그를 오해했었다.
마동식이 괜히 내금위 위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 * *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드디어 목적지인 천안삼거리에 도착했다.
천안삼거리는 조선시대 때부터 경상도, 전라도와 한양을 잇는 주요 길목이었다.
아래로는 대전 - 대구 -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방면, 논산 - 전주 - 광주 - 여수로 이어지는 전라도 방향의 길이 여기에서 갈라지고, 위로는 이 천안삼거리에서 모든 길이 모여서 북쪽의 한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일 아침이 오면 마동식 일행은 여기서 왼쪽 길로 갈라져서 경상도로 가야 하고, 이서치는 반대로 오른쪽 길로 갈라져서 전라도로 가야 하는 것이다.
천안삼거리가 워낙 교통의 중심지이다 보니까, 주변에 역참 뿐만 아니라 주막들과 객잔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상단 일행은 모두들 늦은 저녁밥을 먹고, 근처 객잔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이서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생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물론 지금은 부모님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조선시대지만 말이다.
이서치는 그쪽 방향을 향해 술을 한잔 올리고 절을 드렸다.
그렇게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이서치는 마동식 일행과 헤어졌다.
“형님~ 덕분에 그 동안 편하게 여기까지 왔소. 조심히 가시오. 내 나중에 한양에 가면 술 한잔 거하게··· 아니, 형님은 술을 못하시지? 내 맛있는 거로 대접하겠소.”
“응, 동생~ 잘 가시게. 아래로 내려갈수록 산적들이 많이 나오니까 몸조심하고!”
이서치는 마동식 일행과 헤어지고 전라도 방향으로 홀로 길을 떠났다.
산길로 가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었지만, 마동식이 만한대로 산적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평길로만 다녔다.
그리고 어둑어둑 해지기 전에 미리 객잔이나 주막을 찾아서 들어갔다.
“뭐··· 어차피 마감시한이 정해져 있는 일도 아니니까 말야. 조심조심 쉬엄쉬엄 가자구···”
그렇게 이틀을 걸어서 공주에 다다렀고, 그 다음날에는 논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또 이틀을 걸어서 드디어 전라도 땅인 완주에 발을 디뎠고, 또 이틀을 내리 걸어서 임실에 도착했다.
드디어 다음날 최종 목적지인 남원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양에서 여기까지 약 칠백리(280km)의 길을 열흘 만에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 * *
지금은 이서치 회귀 +5년. (1423년, 세종 5년)
이서치는 그 유명한 춘향전의 고장인 남원에 와서 제일 먼저 광한루(廣寒樓)에 올랐다.
이 곳 광한루의 유래는, 5년 전 아직 태종대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황희 대감이 남원에 잠깐 유배되었을 때, 황희 대감이 이 곳의 경치에 반해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기도 황희 대감의 인연이 닿은 곳이구나···’
한참 나중에 충청.전라.경상의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던 중 이렇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그 때부터 광한루가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중에는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 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되는데,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바로 그 다리를 말한다.
광한루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있는데, 남쪽에 지리산이 그 거대하고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 앉아서 이렇게 가만히 쉬고 있노라니, 한양에서 남원까지 달려온 피로가 한순간에 이서치를 엄습하였다.
‘에구야~ 오늘은 이미 날이 늦었으니 좀 쉬자! 그리고 일은 내일부터 하자···’
이서치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한양에서 떠나기 전에 사방지가 알려 주었던 주막을 찾아갔다.
“남원에 가시면, 제가 알려 드리는 주막에서 묵으세요. 제 이름을 대면 귀빈 대접을 해줄테니까요···”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커다란 주막이 하나 나왔는 데, 여기인 듯했다.
여기 주모는 예전에 사방지와 함께 기녀로 한 때를 주름잡았던 ‘월매’라고 하였다.
지금은 은퇴하고 주막을 운영 중이라고 하였다.
‘남원의 월매? 그 춘향이 엄마 월매? 그럼 춘향이도 볼 수 있는 건가? 에이 설마··· 그건 그냥 지어낸 소설 같은 얘기 아닌가?’
하지만 주막에 가보았더니 월매는 없었고, 그녀의 의동생이라는 여인이 대신 주막을 운영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그녀에게 사방지 얘기를 꺼냈더니, 다행히 그녀도 사방지와 인연이 있던 전직 기녀 출신으로 월매와 함께 주막을 운영하는 동업자였다.
그녀는 이서치에게 주막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월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옥에 갇힌 외동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혹시나 해서 월매 딸의 이름을 물었더니 ‘춘향’이라고 했다!
‘이런! 춘향전이 실화였어?! 참 나 원···’
하지만 춘향이 얘기를 꺼낸 주모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곡절을 물으니, 이서치가 알고 있던 춘향전의 얘기 그대로였다.
퇴기인 월매의 딸이자 남원의 이름난 미녀 ‘성춘향’은 몸종 ‘향단’이와 함께 단오날 그네를 뛰고 있었는데.
마침 구경 나온 양반가의 자제 ‘이몽룡’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몽룡의 하인 ‘방자’의 도움으로 미팅을 하는데.
곧 눈이 맞은 그들은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승진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남겨진 춘향은 애타게 이몽룡 만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고 있었지만, 남원 부사로 새로 부임한 ‘변학도’에게 억지로 수청을 들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한 그녀는, 괘씸죄로 지금 옥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서치가 그 얘기에 관심을 보이자, 혹시나 하고 주모가 물었다.
“사방지 님과도 관련이 있으시다면··· 혹 나으리는 관직에 계신 분이신지요?”
“그렇긴 한데요··· 아직 말단입니다만...”
그러자 지금 춘향이가 어찌 되어 있는 상황인 지, 월매를 위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서치는 속으로 생각했다.
‘춘향전 내용대로라면, 지금쯤 춘향이는 변학도에게 잡혀 있는 거지? 음··· 그럼 조금 있으면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서 춘향이를 구하러 오니까,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근데 이몽룡은 언제 과거에 급제하는 거였지?’
아무리 생각을 떠올라봐도 이몽룡이 언제 출세해서 춘향이를 구출하러 오는 지는 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서치도 춘향이의 실체를 한 번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바람에, 주모에게 그리 해보겠다고 덜컥 승낙을 해버렸다.
* * *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나서, 다음날 아침에 남원 관아에 가보았다.
포졸들에게 마패를 보여 주었더니, 곧 이방에게 안내해 주었다.
변학도는 근처 기방에 가서 밤새 술 쳐먹고 지금 외박중이라고 해서,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옥에 갇혀 있는 성춘향과 그 앞에서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월매를 만날 수 있었다.
월매는 사방지 또래의 나이에 흰머리가 군데군데 보이는 아줌마였지만, 아직도 예전의 고운 자태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었다.
춘향이는 혜수보다도 좀 더 어려 보이는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얼굴에는 제법 강단이 서려 있었다.
이서치가 월매에게 자신을 소개했더니, 춘향이를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죄송한데요··· 제가 그럴 능력이 안되요.”
대신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해서 암행어사가 되어 곧 나타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얘기를 해주었다.
월매는 반신반의했지만, 성춘향은 이몽룡을 믿는다고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성춘향의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데 월매가 서치를 따라 나왔다.
그녀는 한양의 이몽룡에게 지금의 상황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춘향에게 얘기를 꺼냈었지만, 춘향이가 이를 극구 반대했다고 하였다.
곧 과거시험을 앞두고 있는 이몽룡에게 방해가 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서치는 자신의 일을 다 마치고 한양에 가게 되면, 꼭 이몽룡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월매에게 약조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서치는 지리산으로 올라갔다.
박영서의 말에 의하면, 이종국은 남원에서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중간 기슭 쯤에서 대장간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비도 없고 그럴듯한 지도 자체가 없는 시대이다 보니, 그냥 막연하게 지리산 기슭을 뒤지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서치는 지리산을 너무 얕보았다.
전생에서 지리산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어서 쉽게 생각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지리산은 완전히 천양지차였다.
지금의 지리산은 개발이 전혀 안된, 거의 밀림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대장간은 커녕 사람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리산 기슭을 아무 대책 없이 뒤지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산 속의 해는 너무나 짧아서 금방 어둠이 깔렸다.
이서치는 어둠 속의 지리산을 헤맸다.
근처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렸고, 믿기지 않지만 멀리서 호랑이 우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두운 산길을 정처없이 헤매고 있는데,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정신없이 그 불빛을 쫓아가 보았다.
불빛 가까운 곳에 다다렀을 때, 이서치가 내는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주위의 누군가가 외쳤다.
“누구냐? 어떤 놈이냐?!”
흉악한 인상의 시내가 여러 명 있었는데, 가죽 옷을 두르고 손에는 칼과 도끼 등을 들고 있었다.
‘이런 꼬라지가··· 딱 산적이네?! 어이구야~ 또 산적?!’
이서치는 정신없이 도망을 쳤다.
하지만 달빛 하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의 산길은, 이서치에게는 너무 험난했다.
결국 멀리 도망 못 가고 금방 산적 떼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들은 이서치의 품을 뒤져서 소지품을 모두 빼앗고는, 그의 머리에 자루를 씌운 채로 어딘가로 끌고 갔다.
한밤중에 울리는 부엉이 소리가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아··· 이번 생은 오늘로 마지막인 건가? 나,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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