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짜 친구 먹어도 될까요?

- 65화 -
“자자~ 또 한 잔 받으시죠.”
“하하하. 거 좋지!”
섣달 그믐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이서치는 정인지와 함께 어느 객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월이 참 빠르네. 이제 올해도 얼마 안 남았어···’
정인지는 소문난 애주가였다.
이서치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정인지도 한 술 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이서치가 박영서 채용 건으로 임금과 여러 대신들 앞에서 윤곤대와 승부해서 마침내 이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서치의 팬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오늘의 술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안주거리는··· 윤곤대.
“난 말일세. 그냥 윤곤대··· 그 사람이 싫어!! 나랑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 양반이 너무 잔소리가 심하고, 자기가 세운 틀에 다른 사람들을 모두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원래 예전에 성균관에 있을 때부터 나랑은 너무 안 맞았어. 그냥 세상 모든 게 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거야! 허 참···!”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양반의 그 기고만장을 자네가 한 방에 보내 버렸지 뭔가? 그 얘길 듣고 내가 얼마나 유쾌 상쾌 통괘 하던지 말야. 크하하하.”
“에휴~”
하지만 이서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웃음 대신 길게 한숨을 쉬자 무슨 사정이 있냐고 정인지가 물어왔다.
그래서 이서치는 그 동안에 윤곤대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죄다 털어 놓았다.
요즘 조금 한가해지자 부쩍이나 외롭다고 느끼던 이서치는, 가끔씩 윤곤대가 그리웠던 것이다.
이서치가 작년에 그와 처음 만났던 이후로, 그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칠서 공부를 했던 거하며.
그로부터 배우고 혼나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다가, 박영서 채용 건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된 거.
그 이후에 윤곤대를 다시 찾아갔지만, 그가 만나주지 않았던 일들을 모두 다 털어 놓았다.
“··· 이렇게 된 겁니다. 휴우~ 오늘 이렇게 정 수찬님 앞에서 털어 놓으니까, 속이 후련하네요. 그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었거든요···”
“허허. 그런 일이 있었구먼···”
지금까지 가만히 이서치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정인지가 모처럼 말을 꺼냈다.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네. 서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조금씩 다른 곳을 보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 작은 차이가 결국은 사이를 엄청 멀게도 만들고 말이야···”
오늘 술자리 담화의 주제가 처음에는 윤곤대의 얘기로 시작했다가 어느새 인간 관계의 어려움으로 흘러가면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아 버렸다.
그래서인지 정인지는 이후 한참동안 조용히 술만 마셨다.
‘이 친구도 뭔가 사연이 있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던 이서치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수찬님은··· 이미 예전에 장가를 가셨다고 하셨죠?”
“나? 응. 장가가서 이미 아들이랑 딸도 있지. 그런데 갑자기 장가 얘기는 왜?”
“아뇨··· 저는 그간 잘 모르고 살았는데, 요새 부쩍 여기저기서 장가 아직도 안 갔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서요.”
“하하. 그야 자네 나이가 만혼 중에서도 만혼, 그것도 아주 넘쳐 버린, 노총각 중의 노총각이라서 그런 게지···”
하지만 끼리끼리 논다고··· 사실 그의 주변에는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총각들이 제법 있었다.
무흑도 그렇고 이종국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도승지 대감도, 권해룡도, 박영서도··· 이서치만 보면 그만 장가가라고 성화였다.
“그나저나··· 자네는 정인이나 혼약자도 없는 겐가? 진짜로? 아니면 어디 단골 기루에 지명 기녀라도 있는 겐가?”
“아뇨. 그런 거 일절 없습니다. 저도 술은 웬만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기방에는 안 가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이서치는 자기도 모르게 혜수와 수진이를 떠올렸다.
‘혜수는··· 잘 있나? 요새는 전갈도 통 없구나··· 오히려 수진이가 자주 서찰 보내던데···’
갑자기 이서치가 정인지에게 물었다.
새삼 조선시대의 연애와 혼인에 대해서 궁금한 게 생각나서였다.
“근데요··· 이게 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수찬님은 지금의 안주인님과는 연애로 만나셨어요? 아니면 집안의 소개로 만나셨어요?”
“나는··· 집안끼리 예전부터 정해진 거라서 끽 소리도 못하고, 혼인식 당일 날이 되어서야 신부 얼굴을 보게 되었지.”
“아··· 그러셨군요··· 그러면 혼인하기 전에는 혹시 달리 사귄 정인은··· 없으셨어요?”
“··· 정인? 휴우~”
과거를 캐물으니, 갑자기 정인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서치에게 놀라운 사연을 하나 들려주었다.
* * *
정인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소싯적에는 용모가 매우 수려해서 장안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긴··· 완전 조선시대 엄친아였던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사는 중에,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매일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
그런 와중에 옆집의 처녀가 정인지의 글 읽는 모습과 목소리에 홀딱 반하였다 한다.
그녀는 급기야 남녀가 유별한 조선 시대에 혈혈단신으로 한밤 중에 담을 넘어, 글을 읽고 있는 정인지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 처녀 역시 용색이 절륜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정인지는 그녀의 대쉬를 과감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본인은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에, 여자에 통 신경 쓸 때가 아니었던 탓이다.
정인지는 그녀를 심하게 호통치고는 매우 차갑게 대하였고, 상심한 그녀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한다.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정인지는 어머니께 이를 얘기해서,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처녀는 정인지가 이사 가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자, 그만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이 사연을 듣게 된 정인지 역시 이 비극을 두고두고 슬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물리칠 필요는 없었는데···.'
세월이 흐른 뒤 정인지는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고 집안끼리 내정한 양가의 규수와 혼인을 한다.
공부하던 시절에 꿈꾸었던 야망들을 하나 둘 씩 실현하여 점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죽은 처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고, 오늘 이서치에게 고백했다.
이야기를 다 마친 정인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가엾은 여인···. 내가 어리석었지···."
정인지의 얘기를 다 들은 이서치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이거 이거··· 나랑 수진이 얘기 아니야? 소름끼칠 정도로 너무 비슷한데? 휴우~’
술이 들어간 김에 이서치도 혜수 얘기와 수진이 얘기를 정인지에게 꺼내 버렸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된 거죠···”
“와! 자네는 나보다 더 얘기가 복잡하구먼··· 근데 앞으로 어쩔려고 그러나?”
“그게요··· 혜수는 저를 그리 심각하게는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저번에 보니까 덤덤한 것 같더라구요. 근데 수진이는 제가 혜진 교두와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조금 조심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친구가 너무 적극적이어서···”
“그러면 정작 자네는 둘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하는데?”
“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어쨌든 결론은··· 둘 다··· 영 쉽지가 않다는 거죠.”
연애 얘기 만큼 좋은 술안주거리가 있던가?
이서치와 정인지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꽤 많이 마시게 되었다.
이서치는 결국 그가 전생해 온 이방인이라는 비밀을 빼고 나머지 얘기는 다 털어 놓게 되었다.
정인지도 이런 저런 자신의 속마음 얘기를 많이 늘어 놓았다.
이서치는 조선에 오면서 묘한 재주가 하나 생겨버렸다.
그와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그만 이서치에게 마음이 무장해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가 전생에서 AE와 헤드헌터로 쌓은 소통과 공감의 경험 및 능력 때문인 듯했다.
이서치의 다소 직설적이면서 솔직 담백한 화법은, 마음 속 얘기를 직접 안 하고 멀리 멀리 에둘러서 말하는 게 통례인 여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접근이었던 것이다.
이서치는 기본적으로 굿리스너였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과는 다른 솔직함과 직선적인 의사 표현법이 오히려 여기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으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튼 세종대왕도 무흑도 사방지도 윤곤대도 박영서도 이종국도, 그리고 정인지도···
이서치에게 만은 웬만한 걸 모두 털어 놓는 그런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리곤 했다.
그렇게 12월의 겨울 밤은 깊어 가고, 술은 둘 사이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주었다.
* * *
그 술자리를 계기로 정인지와 이서치는 꽤 막역한 사이가 되어서, 이후부터는 자주 만나서 술도 먹고 같이 어울리며 놀았다.
애주가에 덜렁거리지만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정인지는, 유독 이서치와 어울리기를 좋아라 했다.
그러다가 그 둘 사이에 어쩌다가 이종국도 끼어들게 되었다.
이서치가 이종국 헤드헌팅 석세스 후의 AS 때문에 공조의 이종국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이종국은 박영서와 함께 만들던 해시계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어느 중요한 부품의 치수 계산에 한참이나 애를 먹고 있었다.
이서치는 유독 산학(수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인지를 떠올리게 되어서, 혹시나 하고 정인지에게 그 문제를 얘기했다.
그랬더니 바로 정인지가 찾아와서는 뚝딱하고 그 어려운 난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그걸 계기로 이서치와 정인지와 이종국, 셋은 자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먹고 놀게 되었다.
원래부터 술을 좋아라 하던 이종국과 정인지는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가만 보니, 셋은 공통점이 많았다.
진취적이고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편이고,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윤곤대와는 참 안 맞는다는 것.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이종국도 윤곤대와는 그리 좋은 인연이 아닌 듯했다.
* * *
지금은 이서치 회귀 +6년. (1424년, 세종 6년)
해가 바뀌고 새해 정월이 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또 셋이서 뭉쳐서는 초저녁부터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서치와 정인지가 툭닥툭닥하고 장난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종국이 갑자기 뚱딴지 같은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둘은 이제 친구가··· 되신 겐가?”
갑자기 던진 화두에, 정인지와 이서치는 순간 당황했다.
“맞···소!”
“···아뇨!”
정인지는 맞다라고 했는데, 이서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둘이 동갑이고 워낙 잘 맞는 사이긴 해도··· 지금 조선시대에 서로 간에 친구를 먹기에는 무리가 좀 많았다.
워낙 출신 성분과 품계가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서치의 뒤에서 비록 내금위장이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다고는 해도, 엄밀히 말하면 그가 양반은 아니었다.
그리고 품계도 정인지가 정6품이고, 이서치는 종7품이기 때문에 차이가 컸다.
정6품과 종7품의 차이는 생각보다 꽤 크다.
정 6품 > 종6품 > 정7품 > 종7품···
이런 식으로 품계가 차이가 나는데, 거기에다,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상과 하로 구분된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직급 체계는 총 18품 30계인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워낙 죽이 잘 맞았기 때문에···
그동안 출신 성분과 품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 둘의 관계 규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지내지 않았었다.
거기에다 이서치에 대해서는···
세종대왕과의 특별한 친분, 내금위장이 후견인을 자청하고 있다는 점, 도승지 대감이 그의 출신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한 함구령 등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몰락한 고려의 어느 귀족 출신이 아니겠냐는 추측과 소문이 조정 내에서 파다한 상태였다.
그래서 박영서와 이종국을 물론이고 정인지도 모두 이서치를 그저 그런 하급관리 중의 하나로만은 여기지 않았다.
그만큼 이서치는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하고도 괴이한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재발굴 하나 만큼은 엣지가 있었고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소탈하고 친근한 자였던 것이다.
결국 이상의 그런 저런 이유로, 이서치는 여러 사람들과 신분과 품계를 뛰어 넘는 아슬아슬한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이종국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이종국이 정인지보다 몇 살 위였지만, 품계는 정인지가 조금 더 위였다.
하지만 평상시 그런 격식에 별로 개의치 않았던 그들이었는지라, 그 둘은 서로에게 하는 호칭과 어투를 대충 대충 얼버무리고 있던 터였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이서치와 정인지를 보고, 이종국이 지나가는 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뭐··· 사람마다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도 호칭도 다 다른 거니까··· 근데 말이지. 저번에 내가 해시계 부품 치수 땜에 한참 동안 골머리 썩고 있을 때, 이서치. 자네는 바로 정 수찬 님을 떠올리더니 즉각 가서 데리고 왔지 않은가?”
“그랬었죠···”
“그리고··· 정 수찬 님은 이서치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하던 일 다 물리치시고는 바로 공조로 와 주셨잖소?”
“그랬더랬죠···”
“그런 걸로 봐서는··· 내가 보기엔 둘은 영락없는 친구인데? 안 그렇소? 이서치는 누군가 필요한 순간에 바로 정 수찬 님을 떠올리고, 정 수찬 님은 이서치가 부르니까 다른 일 다 제쳐주고 제깍 와 주시고··· 어때유? 제 말이 맞쥬? 둘이··· 친구 맞쥬?”
이종국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정인지와 이서치는, 잠시 후에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맞소!!”
그래서 이서치는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친구 같은 친구를 만들게 되었다.
셋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이서치가 정인지에게 물었다.
“으음··· 딸꾹! 우리, 진짜 친구··· 먹어도 될까요? 흐흐흐.”
“뭐? 될까요가 뭐냐 될까요가! 우리 이미··· 친구 아이가? 그러니··· 되냐? 라고 해야지! 딸꾹~ 안 그래? 하하하.”
“하하하. 친구··· 야! 그런 건가?”
“그런 거야. 친구야! 하하하.”
술에 취해 꽁냥거리는 이서치와 정인지를 보고, 이종국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허허. 놀고들···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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