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구원자

"힘들게 잡은 타나틱스 조직원들을 놓치다니, 현 정권은 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무능하고 부패한 성동현 정권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김제현은 구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러 온 시민들은 김제현이 구서울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물론, 모든 시민들이 감격한 것은 아니었다.
"젠장, 웃기고 자빠졌군... 자기도 딱히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한 시민이 투덜거린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김제현의 지지자들이 살기로 눈을 번뜩인다.
"너 이새끼. 방금 우리 김제현님을 모욕한거냐!?"
지지자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몽둥이로 그 시민을 두들겨 팬다.
그는 시체가 되었다.
김제현은 그런 사소한 트러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연설을 이어나간다.
"여기 부패한 정치인, 사병, 안락사 요원들의 리스트가 있습니다! 물론, 딱히 무언가를 하라고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이런 리스트가 있다는 말입니다."
김제현의 부하들이 지지자들에게 '부패 리스트'를 나눠준다.
리스트를 나눠 받은 사람 중 한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김제현 씨는 왜 그런 소리를 하는거지?"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지지자가 핀잔을 준다.
"이 빡대가리야. 김제현 님 같은 결백하신 분은, 아마 이 사람들조차 용서하려고 하시는 거겠지.
그러니 우리가 그런 순수하고 선한 김제현 님을 위해 이 자들을 대신 처리해줘야해."
"과연 그렇군!"
지지자는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구원은 부패한 부자들이 아닌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김제현이 힘차게 외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이 쏟아져 나온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던 것 같은 글귀지만, 시민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순간, 지지자들은 김제현 뒤에 내리쬐는 기묘한 빛을 보았다.
그 빛 속에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국가를 지켜낸 영웅, 이순신.
외적의 수괴를 처단한 안중근.
...그리고, 신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예수.
그들의 영혼이, 김제현의 곁을 지키고 서있는 걸 지지자들은 분명히 목격했다.
그들은 깨닫는다.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할 인물이 김제현이라는 것을.
***
유한은 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며칠마다 말도 안되는 스케일의 싸움들에 끼어들었다.
"젠장, 무관 중소 축구 구단 선수는 2주일에 한번 경기에 나가고도 몇억씩 받는데, 개같군."
유한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저번에 부상당했다가 고친 이후로 계속해서 쑤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도 없으니, 그냥 죽으면 죽는 셈 치고 살기로 했다.
그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올 만한 사람이나 물건이 없었으므로, 유한은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아예 문을 부술 기세로 시끄럽게 두들겨 댔다.
"젠장. 죽여버려야겠군."
화가 난 유한은 자신의 카본-코팅된 보급형 칼을 들고 무례한 방문자를 썰어버리러 나섰다.
일단 철문을 발로 걷어차서 문 앞에 있는 침입자를 넘어뜨린다...
"이게... 무슨 짓이야!"
철문에 맞고 쓰러진 불청객은 다름 아닌 앨리스였다.
"아. 안녕, 앨리스. 어떻게 내 집 주소를 알아낸거지?"
유한은 분노로 가득찬 표정을 순식간에 누그러뜨리고 세상 스윗한 표정을 꾸며낸다.
"가은이에게 물어보고 왔어."
유한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김가은에게 속으로 불평했다.
물론 김가은은 앨리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 판단해 알려준거지만, 유한이 알리가 없었다.
"그보다. 잘도 날 속였겠다?"
"속이다니? 우린 함께 양진무를 쓰러뜨린 동료잖아?! 동료끼리는 믿어야지!"
유한이 입에 발린 소리를 지껄였지만, 앨리스는 더이상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철 씨가 다 말해줬어. 너가 타나틱스와 연관이 있을거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어떻게 양진무가 그 공장에 올 줄 알았는데? 그것도 형편 좋게 혼자서 말이야.
그리고 네가 봉인한 양진무는 탈출해버리고."
"전부 정황 증거로군. 정황만으로 날 몰아가는거야?"
유한은 생각 외로 빨리 자신을 의심하는 앨리스를 보고 난감했다.
한 순간, 죽여버려야 하나 싶었지만... 들키지 않을 방법이 생각 안 나서 일단 보류했다.
대신, 벽에 기대고 허탈한 표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하하... 뭐 그렇겠지. 결국 나도 태생체라 이거지? 태생체 따위는 정황 증거만으로도 유죄니까 말이야.
재밌어? 적당한 꼬투리를 잡아서 애먼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게?"
"아, 아니... 그런건 아닌데..."
신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구서울 사람들, 특히 태생체들을 경멸하는 지 알게 된 이후로, 앨리스에겐 은근한 죄책감이 있었다.
유한은 앨리스의 마음속의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양진무가 탈출한 것도 다 내탓이지, 안 그래! 일이 잘 풀릴 때는 아무 말 없더니 말이야...
내가 범인이 되어 죽길 바라지? 그럼 이 칼로 날 죽여! 자! 너도 안락사 요원이잖아!!"
유한이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앨리스한테 떠넘기는 시늉을 한다.
원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의 표정에는, 무고하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태생체들의 한이 깃든 것만 같았다.
"미, 미안... 내가 너무 섣불리 단정지었나봐..."
유한은 속으로 앨리스를 마음껏 비웃으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 와중에도 원통한 표정을 유지하는 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앨리스의 눈이 갑자기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래서, 어떻게 양진무의 테러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결백하다면 말해줄 수 있지? 말 못하겠다면 사병들에게 신고 할게."
"아~ 그거!"
유한은 의외로 침착한 앨리스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다.
///
며칠 전
<그래서, 양진무 씨를 봉인시킨 다음, 신서울에서 탈출쇼를 벌이겠다고?>
<뭐... 그런 셈이지. 일단 양진무를 자연스럽게 봉인할 역할이 필요한데.>
이남용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유한이 당당히 나선다.
<잘 됐군. 이 참에 양진무 씨를 잡아서 포상이나 두둑히 챙겨 볼까?>
<너가 하고 싶은거냐...? 뭐, 열심히 하는게 좋을거다. 어설픈 실력으로 어설픈 연기를 하면 양진무가 죽여버릴테니.>
///
...이런 일이 있었다고, 유한이 앨리스에게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어서, 말 해보라니까?"
앨리스가 압박하고 있는 그 때,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왔다.
"젠장. 타나틱스인가!?"
유한은 이것을 기회 삼아 후다닥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간다.
앨리스도 엉겁결에 그를 따라간다.
***
"끼얏호-! 죽여라 죽여! 성동현 지지자들은 남김없이 죽여라!!"
김제현의 지지자들은 신서울과 구서울을 아우르는 대규모 폭동을 벌이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무나 붙잡고 김제현을 지지하지 않으면 곧바로 죽인다.
'부패 리스트'에 있는 사람도 죽인다.
매우 간단한 행동 원리였다.
유한과 앨리스는 말도 안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이봐요! 당신들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에요!"
앨리스가 말리러 오자 세 명의 지지자들의 눈이 또다시 번뜩였다.
"어이 로봇! 넌 성동현을 지지하나?"
뜬금없는 질문에 앨리스는 말문이 막힌다.
성동현은 분명 앨리스에게 있어서 아버지인 셈이지만, 자신이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땡! 시간 초과다! 정답은 '김제현 님을 지지합니다'라고 했어야지!!"
세 명의 폭도는 각목, 쇠파이프, 전기톱을 들고 앨리스에게 달려든다.
폭도들이 휘두르는 각종 무기를, 앨리스는 전투 AI 모드를 발동해 간단히 피한다.
그리고 오른손에 장착된 빔 소드를 꺼내어 망설임 없이 썰어버린다.
"이제는 좀 각오를 다졌나 보지?"
유한이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듯이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살려두기는 너무 위험하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뭐, 칭찬은 기대하지 말라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유한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는 그 때, 2m가 넘는 거대한 로봇이 날아오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성유화가 앨리스를 조종하는 것처럼 이 로봇 역시 사람이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동료들을 죽였나 했더니... '부패 리스트'에 있는 놈들이잖아?
네놈들... 양진무를 봉인했다고 주장한, 사기꾼 놈들이었지?
이렇게 잔인하게 동료들을 죽이다니... 역시 타나틱스와 성동현의 앞잡이 답군!"
로봇은 말도 안되는 음모론을 연속해서 늘어놓고 있었다.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유한은 곧바로 검에 마력을 담아 공격한다.
무생물이라 마법 저항력이 없는 로봇은 간단히 썰렸어야 하지만, 오히려 마력 보호막으로 공격을 막아낸다.
"쓸데없는 저항하지 말라고! 이 로봇에는 마력 배터리가 장착되어있다!
마법을 사용하는 AI가 얼마나 파괴적인 성능일지는 알겠지?"
로봇은 4배속으로 주문을 영창하여, 본래는 전투에 쓰기 힘들었을 복잡하고 긴 주문을 가진 마법들을 난사한다.
평범한 마법으로 대결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유한은 곧바로 '순수한 마력 에너지'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백색의 에너지가 유한의 주위를 휘감는 듯 했지만... 불현듯 에너지가 흩어졌다.
순수한 마력 에너지는 체내의 마력 평형을 깨뜨리고, 각종 부작용을 일으킨다.
유한은 그 부작용으로 일시적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로봇의 육중한 강철 주먹이 유한의 몸통을 가격한다.
마력으로 보호막도 못 치고, 신체 강화조차 할 수 없게 된 유한은 샌드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한!!"
앨리스가 소리쳤다.
"이 가증스러운 앞잡이 놈...! 죽어라..!"
로봇이 유한의 머리통을 깨부수려고 한다.
현재 앨리스가 가진 어떤 수단으로도 유한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유한을 살리기 위한 수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그때, 갑자기 앨리스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무생물이 감지할 수 없을 마력의 흐름이, 앨리스의 눈에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도 그 흐름이 생성되고 있는 걸 목격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앨리스의 팔에서 뻗어져 나온 마력의 실들이 로봇의 다리를 묶어두고 있었다.
"바보같은...! 로봇의 체내에서 직접 마력을...?"
로봇의 주인은 그 광경에 놀란 모양이었다.
자신처럼 비싼 마력 배터리를 장착하거나, 원거리 마력 전송 수단이 없으면 로봇은 절대 마법을 쓸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잘했다고... 칭찬해주지. 꽉 잡고 있어라."
거의 죽어가는 순간에 마력을 다시 쓸 수 있게된 유한은, 최후의 전기 마법을 자신의 손끝에 발동시킨다.
앨리스는 유한의 말을 듣고 각종 마법과 고열광선을 동원해 로봇을 방해한다.
그리고 유한에게 대응할 틈이 없는 로봇의 몸체에, 유한의 손이 닿는다.
"끄, 끄아아아악!!"
유한의 손이 닿자, 분명 고통이 없을 로봇일텐데도 고통스러워한다.
"비싼 로봇 뒤에 숨어 있으니, 죽지 않을 것 같았지? 정말 너 같은 놈들을 죽일 방법이 없을 것 같나?"
유한의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로봇이 쓰러진다.
유한 역시 부상의 고통으로 땅바닥에 대자로 뻗는다.
자가치료에도 한계가 있다.
이번엔 확실히 죽었다고 유한은 생각했다.
'아직, 죽이고 싶은 놈들이 많은데....아깝...다...'
유한은 마지막으로 땅바닥의 찬 기운만을 느끼며 의식이 끊어졌다.
***
"하아... 하아..."
로봇을 조종하고 있던 남자, 조칠상은 연결을 끊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유한이 남긴 고통이 본체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제길... 저지능 범죄자 성동현 지지자 놈들이 잘도...!
더 비싼 기체를 구입하면, 그럼 그깟 놈들은!"
국회의원 조상무의 아들인 조칠상은, 평생을 유복하게 자라, 재산도 능력도 출중, 여러명의 여친을 거느리고 다니며 자신을 알파메일이라고 자칭해왔다.
정의롭고 우월한 자신이 진 것은, 신이 부과한 역경일 것이라고,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둘을 처치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다음 기회는 이미 없었다.
"뭐, 뭐야 이건!!"
어느새 자신의 옷 위로 흥건하게 피가 적시고 있었다.
이것은, 코피...?
비정상적인 양의 코피를 깨달음과 동시에 현기증이 몰려오고, 그대로 죽었다.
뉴럴링크 로봇 조종자를 겨냥한 전기 마법은, 치명적인 버그를 일으키고 조종자에게 고통을 준다.
그 출력을 강하게 하면, 뇌출혈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국회의원이 되었을 신서울의 알파메일 조칠상.
편히 잠들라.
***
"그런가... A.L.I.C.E 가 벌써 각성하다니..."
성동현은 수많은 화면이 띄워진 방 안에 서있었다.
화면 속에선 최상위 실력을 가진 사병들이 폭동을 진압해나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진압까지는 얼마 안 남았지만, 성동현은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유한... 넌 앞으로도 목숨을 태워가며 증오하고, 저주하면 된다.
신서울도, 구서울도, 내 딸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어... 역할을 다한 뒤 바스라져 사라지거라."
성동현은 한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 할 유한을 불쌍히 여기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 작가의말
이야기 속의 내용은 실제 사건, 인물, 단체, 지명과 무관합니다.
작 중의 캐릭터들의 발언은 작가의 생각, 사상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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