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친구 만들기

낯선 천장이었다.
깨어난 유한은, 쓰레기 소설의 첫 문장으로나 쓸법한 감상을 느꼈다.
아무래도 사후세계에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사후세계라면 수액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필요는 없을테니까.
여기는 어딘가의 병원이었다.
침대 옆 의자에는, 김가은이 고개 숙이고 잠들어 있었다.
"이제 좀 일어나지 그래?"
유한이 김가은의 볼을 검지로 쿡쿡 찌른다.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뜬 김가은은, 먼저 깨어난 유한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유, 유한 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김가은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유한을 껴안는다.
"...덥다."
"앗, 네..."
김가은은 쑥스러워 하며 유한에게서 떨어진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있었던 일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겠지?"
유한이 요구하자, 김가은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유한은 로봇의 주먹에 맞고 갈비뼈들과 폐가 박살이 났다고 한다.
앨리스는 치료 마법으로 최대한의 응급처치를 한 후 유한을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시켰다는 모양이다.
김제현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은 사병들이 투입되어 진압됐다.
그러나 김제현 측은 평화로운 시위를 정부가 폭동으로 날조했다며, 성동현의 독재 정권이 물러나야 된다는 강도 높은 비난을 연이어 쏟아내는 중이었다.
"꽤나 재밌구만. 다음 대통령은 김제현 확정이겠어. 만약에 다음이 있다면 말이지만."
유한의 표정은 재밌기는커녕 지루한 표정이기만 하다.
"유한 씨, 그보다 앨리스 씨를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 알 바 아니야."
"...죽이시려는 거죠?"
"..."
유한은 김가은의 슬픈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김가은은 앨리스가 지금까지 만난 신서울 사람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앨리스를 증오해야 하는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그냥 죽이는 건 계산에 맞지 않지.
그 녀석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두 번까지는, 그냥 살려줘야겠군."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죽이려던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니, 터무니없는 궤변처럼 들렸다.
하지만 김가은은 그 궤변 같은 말도, '앞으로 앨리스와 잘 지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괜찮으니 빨리 퇴원하자고. 병원비를 더 뜯기고 싶지는 않으니."
"병원비도 앨리스 씨가 내고 갔어요."
"아, 젠장. 그럼 그것도 꼭 갚고 나서 죽여야겠군."
유한이 투덜대면서 병실 밖을 빠져나간다.
***
"하앗! 흡! 핫!"
성유화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기묘한 기합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김은혜가 성유화에게 질문한다.
"아가씨, 30분 동안 대체 뭘 하시는겁니까?"
김은혜는 약간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분명 앨리스에 접속했을 때 커먼 마법을 사용했었다니까?"
"아가씨는, 커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체질이잖습니까.
무언가 착각하신게 분명합니다. 물론 그러고 있는 것도 귀엽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진.짜.라.고!"
성유화가 삐질려고 하자, 김은혜는 달래기 모드로 들어가 조곤조곤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커먼 마법 따위를 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왜 중요하죠?
아가씨의 완전무결한 퍼스널 앞에선, 그딴 건 잔재주일 뿐입니다.
그런 퍼스널을 각성한 것도 아가씨의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 덕분이겠지만..."
"그렇지만, 커먼 마법만으로도 수준 높은 전투를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유한이라던가."
유한이라는 두 글자가 튀어나오자마자, 갑자기 김은혜가 무섭게 눈을 부라린다.
이마에 핏줄이 보일 정도로 화난 김은혜의 표정은 성유화조차 같이 지내면서 처음 본 표정이었다.
"그 자는! 그냥 잔재주밖에 부릴 줄 모르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 자는 추악한 영혼을 지닌 인간 말종! 그것은 그의 퍼스널 마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법은...!"
"뭘 말하는 건가? 자네."
숨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내던 김은혜는, 등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말 한마디에 섬뜩함을 느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성동현임을 알아 보고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안 되지, 은혜 양. 안락사 요원들의 개인 정보는 보호해야만 하는데."
"대통령 님. 하지만 그 자의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게..."
"내가 언제 자네 의견을 물었지?"
"...알겠습니다."
김은혜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마지못해 성동현의 말을 따랐다.
성동현은 유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유화야. 이젠 앨리스를 통해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그만두거라."
"어째서요? 전 아무 짓도..."
"이제 바깥은 지옥이 될 거니까. 그런 곳에 나가도 네 순수한 마음이 상처 입을 뿐이란다."
성동현의 말대로, 바깥은 여야 지지세력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타나틱스의 위협도 건재하다.
심지어 일부 안락사 요원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되었다.
하지만 성동현의 말에 성유화는 반발심이 일어났다.
"평생 청와타워 바깥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하셨으면서, 이젠 앨리스까지 뺐어가실려고요?!
대체 왜 저는 여기 갇혀 살아야 하냐고요!"
"순수한 영혼을 위해서."
"죄송한데, 제가 어린애마냥 언제까지 순수하지는 않거든요? 제가 알아서 하게 놔두시라고요!"
성유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김은혜와 성동현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런 유화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군...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기로 할까."
성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김은혜는 격하게 반발한다.
"강제로라도 그만두게 하셔야죠! 바깥의 오물들과 교류하다가 나쁜 영향을 받으면...!"
"난 내 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의 파멸을 부르는 선택일지라도 말이야..."
성동현은 이미 미쳤다고, 김은혜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반항기가 온 성유화를 지켜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반드시 성유화를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
"유한 씨.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퇴원하세요? 좀 더 누웠다가 가는 게..."
퇴원동의서를 쓰고 급하게 병원을 빠져나오는 유한에게 김가은이 묻는다.
"김제현 놈의 '부패 리스트'인가 뭔가에 내 이름이 실려있는거 못 봤어?
죽게 생겼는데 지금 잠이나 자고 있을 때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려고요?"
"이럴 땐 '친구'들을 모아 '우정'의 힘으로 극복한다... 그런 정석적인 전개로 가자고."
김가은은 유한의 헛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유한은 사랑, 우정, 친구 등의 단어를 경기가 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는다는 건,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김가은, 넌 어디 안전한 곳에라도 숨어 있어라. 모든 게 다 끝날 때 까지."
유한의 목소리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의 말의 뜻을 알아챈 김가은은, 웃었다.
"저도 안락사 요원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유한 씨가 하지 말라해도, 전 함께 싸울거예요."
"...그래."
유한이 그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김가은에겐 보이지 않았다.
***
생명관리국 구서울 지부에 유한과 김가은이 도착하자, 오늘따라 못 보던 사람 3명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유한이 오면서 연락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저번에 같이 일했던 엘프인 이상덕이었다.
다른 한명은 까마귀 부리 같이 생긴 괴상한 방독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헝클어진 머리에 대충 깎은 수염을 갖고 있었다.
"모여주셔서 고맙군. 친구들.
여기 왔다는 건 내 제안에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겠지?
서로 인사는 했나? 안 했으면 지금이라도 자기소개를..."
"이상덕이다. 나는 한때 평범한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였지..."
이상덕이 유한의 말을 자르고, 멋대로 과거 회상에 돌입한다.
///
핵전쟁 이후로 엘프 종족은 곳곳에 생겨났고, 나의 마을은 과거 북한이라는 나라였던 땅에 있었다.
나는 여느 엘프들처럼 자연을 사랑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풍력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구리선과 자석, 나무판 등을 이용해 만든 어린아이 수준의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어머니는 마치 흉물을 본 것 마냥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장난감을 무참히 짓밟아 부숴버린다.
<감히 사악한 과학 기술에 손을 대다니! 과학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뻔했는데!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거냐? 우리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돼!>
<하지만 엄마, 이것들도 자연물이잖아요. 엄마는 이 구리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그 날, 난 부모님에게 몽둥이로 호되게 얻어맞았다.
그와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었고, 나는 어느새 마을에서 가장 더러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던 날, 난 결심했다. 그들에게 진정한 자연의 힘을 보여주기로.
<끼야아아아악!!>
불타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온 마을이 불타고 있다... 내가 만들어낸 자연산 화염방사기로 인해.
<이봐, 다들! 불도 너희들이 좋아하는 자연이잖아!? 더 좋아해보라고!!>
진정한 자연의 힘으로 마을을 전소시킨 나는, 이후 사랑할 만한 자연을 찾아 서울로 내려오게 되었다...
///
"하아...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거를 다 나불거려서 참 고마워."
유한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감명깊은 이야기로군. 내 이름은 강승천이라고 한다. 나는 한 때 예술가였지..."
"이봐, 그만..."
유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강승천 역시 과거를 회상한다...
///
<제 예술이 형편 없다는 말입니까?>
신서울의 한 개인전에서 난 소리쳤다.
<그래. 고리타분한 한국의 예술계가 억지로 띄워준, 쓰레기로 밖에 안보이는군.>
유명한 기업가인 네이든이란 자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내 그림이 최소 몇 억원에 팔린다고 항의했다.
<그러면, 길거리에 당신 '작품'을 놓아보지 그래? 당신 예술에 관심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자존심 강했던 나는 내 작품을 길거리에 전시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칭찬은 커녕, 욕이나 비방조차 없었다.
아무도 작품을 보려고 5초 이상 멈추지 않았고, '작품'은 깨끗하게 돌아왔다.
나는 그 길로 내 작품도, 작업실도 불태워버리고, 타락한 한국 예술계를 떠나 구서울로 내려갔다.
예술가조차 아니게 된 채로, 나는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추구하게 되었다.
///
"참으로 흥미로운 과거로군. 제발 또 들을 일이 없길 바란다."
유한이 지긋지긋해하는 틈에, 김가은이 힘차게 손을 들고 일어났다.
"저는 김가은이라고 합니다! 한 때 연구소에 갇혀 있던 실험체 였죠... 운명을 비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어느 날..."
김가은이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네 과거엔 아무도 관심 없으니 그만해."
유한이 빠르게 제지했다.
"망할 유한 씨..."
김가은은 시무룩해하며 자리에 앉는다.
"남궁현이다. 시체청소업자지. 필요하면 연락하게."
괴상한 마스크를 쓴 남궁현이 자신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명함에는 '스캐빈져'라는 괴상한 회사명이 새겨져 있었다.
유한은 짧고 간결한 소개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쓸데없이 소개가 길었군. 이제 마지막 한 명이 올 차례인데..."
유한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동안 구서울 지부의 출입문을 박차고 다급히 누군가 도착했다.
갑작스런 유한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너...! 대체 무슨 속셈이야. 갑자기 사무소를 세우겠다니...!"
"마침 잘 왔군. 이 친구가 앨리스라는 작자야. 신서울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고 했지?"
"네 수상쩍은 계획에 협력해 줄 것 같아?"
앨리스가 유한를 노려봤다.
가족이라 여겼던 사람들까지 믿을 수 없게 된 판국에, 유한 같은 인간을 신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한은 불신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앨리스에게 말한다.
"난 새로운 세력을 모아서,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모든 적들과 싸울거다.
넌 구서울 사람들을 돕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쯧쯧. 내가 날 믿어달라고 했나? 네 목적을 이루는 데 내 계획이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따지란 말이다.
내가 너였다면 못 믿는다고 아예 협력하지 않는 멍청한 짓은 안 할거야.
오히려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 지 감시하면서, 최대한 이용해 먹겠지."
"..."
누구도 못 믿겠다고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유한이라는 인간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유한은 어떤 방식으로든 거대한 음모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좋아. 네 일에 협력해 줄게. 쓸데없는 짓 하면 용서 없을 줄 알아."
"명심하도록 할게. 그럼 이제 우린 친구인 셈이네?"
"친구라고? 우리가?"
"나와 이익을 공유하는 사이면 모두 '친구'지. 오래오래 친구 관계를 유지하자고?"
친구에 관한 유한의 삐뚤어진 정의에 앨리스는 기가 막혔다.
유한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보며 선언했다.
"오래 기다렸어, 친구들! 설득이 생각보다 좀 걸렸지?
모두 환영해주자고!
잘 부탁해, 앨리스 '사무소장'!"
"...뭐?"
모인 사람들의 맥빠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앨리스는 자신이 이미 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작가의말
과거 회상 따위에 몇 화를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 빠르게 하고 치워버렸습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