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의 마지막 식사

김은혜가 청와타워로 돌아가 유한에게 정체가 발각된 것 같다고 얘기했을 때, 성유화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만난지 한달도 안 됐을텐데."
"아가씨. 뇌과학 연구소 습격 사건에 관여하셨더군요.
어째서 대통령님이 저한테까지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큰 사건이 은폐된 걸 보고, 아가씨의 정체를 확정지었다고 생각합니다."
"확정지었다니...? 그럼 그 전에도 내 정체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는 안락사 요원들과 사병들의 정보를 편집증적으로 수집하니까요...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조사하고 있었을 겁니다.
앨리스의 장비 수준이나 활동시간 등을 종합해보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별로 없죠."
그 말은, 앨리스로서 유한과 처음 만나기 이전부터, 유한은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당혹스러운 성유화를 두고 김은혜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자는 직접 친위대를 끌어내, 이제부터 아가씨를 협박할거라고 당당히 선언하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데?"
연속된 사건으로 정신이 한계에 몰린 성유화는 지친 표정이었다.
"앨리스를, 처분해버립시다."
"!!"
"그것만 처분하면 아무 증거도 남지 않아요. 유한은 그 후에 언제든지 죽이면 됩니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난 밖에 나가지도 못 하고... 영원히 이곳에서..."
"아가씨...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바깥은 썩 아름다운 곳이 아니예요.
청와타워 밖을 나갈 필요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왜 다들 나보고 이 곳에 쳐박혀 있으라고만 하는거야! 아버지도, 은혜 언니도, 유한도!"
"아가씨. 간단한 이치입니다.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자유로워진 걸까요?
아니, 물 밖으로 나가면 죽을 뿐이죠.
아가씨... 당신은 깨끗하고 청정한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가씨는 더러운 바깥의 환경을 견뎌내지 못 하고 금세 죽어버리고 말겁니다...
당신은 그 로봇을 조종하는데 중독되어서, 자신이 구서울에 사는 쓰레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와서 정신적 치료를 받으세요..."
김은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그것을 듣는 성유화는 분노로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성유화의 입에서, 자신도 놀랄만큼 냉정한 어조가 튀어나온다.
"나가."
"...네?"
"명령이니 나가줄래? 친위대 대장. 당신 말은 이제 지긋지긋해."
몇년 동안이나 성유화와 친자매처럼 같이 지낸 김은혜였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차갑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아가씨를 불러도 싸늘한 반응만이 돌아오자, 김은혜는 풀이 죽어서 유화의 방을 나간다.
성유화는 한참을 방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한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앞의 허공에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우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찾아낸 것은, 청와타워 내의 고급 식당을 이용할 수 있는 초대권을 발송할 수 있는 페이지였다.
성유화의 '친구'들은 자기 돈을 내고 자주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다.
정상인과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유한이, 단순히 비싼 식당 초대권을 준다고 과연 올 지 걱정했으나...
성유화는 왠지 유한이 반드시 올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
청와타워 50층의 최고급 식당의 한 식탁에서 성유화는 기다리고 있었다.
무릎 길이까지 오는, 적당히 정숙한 드레스였다.
성유화와 경호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식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격적인 저녁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 식당 문을 열고 유한이 정말로 나타났다.
경호원들이 금속탐지기, X-ray, 신체 검사 등의 철저한 검문을 마치고 난 뒤에야, 유한은 겨우 앨리스와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성동현 대통령의 딸, 성유화라고 합니다."
여러 공식 석상에 참여해 본 성유화는 반사적으로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넨다.
"반갑군요. 청암 사무소 일개 직원인 유한이라고 합니다."
유한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정중했다.
그렇지만 구서울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호원들? 지금부터 사적인 대화를 좀 할게."
성유화가 말하자 경호원 한 명이 메모지 크기의 종이조각 두개를 식탁으로 가져온다.
그 종이에 인쇄된 것은 마법진이었다.
이 마법진을 지닌 자는, 자신의 말을 원하는 상대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다.
유한은 마법진에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 같았다.
"앨리스의 정체를 알아냈지?"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우리 소장 이름이 앨리스이긴 합니다만."
유한은 시치미 떼기로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내가 앨리스야. 알고 있었지?"
"갑자기 그런... 쉽게 믿기 힘든 소리군요."
유한의 놀라는 표정 연기는 완벽해서, 성유화는 공연히 더 화가 났다
"하... 나는 진지하게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구나...
너가 인정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 없어.
어차피 내일... 내가 내 입으로 밝힐거니까.
앨리스의 정체랑, 앨리스가 한 짓들을..."
"너... 미쳤어?"
성유화가 말을 마치자 마자 순식간의 유한은 연기를 곧바로 그만두었다.
"..."
"그딴 짓은 모두한테 손해야. 너가 죄를 자백하면 누가 기특해 할 줄 알아?
죄인들이 연구소로 보내지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
"또 네 특기인 남 위하는 연기야? 사실은 자기가 얻은 협상카드가 쓸모없어지는 걸 걱정하는 거지?
그리고 난, 죄를 자백하고 나서는 자살할거야.
죽이는 게 안락사 요원의 의무라며? 나 자신을 죽이면 되겠네..."
유한은 한참 동안 침묵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네 의지면 어쩔 수 없지. 잘 죽어라.
난 알아서 살아남을 생각이니까."
"...넌 그렇게 살아서 행복해?"
"당연히 행복하지. 난 모든 상황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거든.
'행복을 버리는 것을 행복으로 삼는 것'이지."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면 가진 행복을 버려나가면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만약 생각대로 행복을 못 버려도, 그건 행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행복한거지."
"네 말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워... 밥이나 먹자."
그 후로, 식탁 위로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성대한 코스 요리가 하나 둘 올려졌다.
요리의 수준은 훌륭했지만, 말없이 식사를 하는 유한과 성유화의 모습은 마치 모래알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유한은 편식도 하는지, 전체 요리 중 반은 손도 안댔다.
"마지막 부탁이 있어. 너가 죽기 전에 한번만 같이 이 주변을 산책하자. 이 청와타워 밖에서."
식사가 끝난 후, 유한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나는 이 건물 밖을 나갈 수 없는 몸이야. 앨리스를 조종하는 게 아니면..."
"오히려 그게 더 좋아. 곧 죽을 친구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으니까..."
유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성유화는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는다.
"그래. 그럼... 잠시 후에 청와타워 바로 앞에서 만나자."
***
이번에는 유한이 청와타워 바깥에서 앨리스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유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와타워에서 앨리스가 나온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앨리스는 정말 인간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유한은 오늘따라 앨리스의 금발 적안이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가볼까? 어딜 가고 싶어?"
"일단 무작정 걸어 보자. 그럼 어딘가 가고 싶어 질 수도 있지."
유한과 앨리스는 아무 의미도 없이 대도시를 걸었다.
대도시는 쓸데없이 높은 건물들과, 재미없는 표정을 하며 걸어다니는 행인들 뿐이었다.
하지만 앨리스에겐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만지작 거린다.
그곳에는 고열 광선총이 장착되어 있다.
그녀는 유한 만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유한이 갑작스레 산책을 제안했을 때도 기뻤다.
죽일 기회를 유한이 알아서 만들어 준 셈이니까.
"이봐."
앨리스의 앞을 걷던 유한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왜?"
앨리스는 유한의 등을 향해 고열 광선을 조준하면서 아무일 없는 듯이 말한다.
"역시... 넌 살아주면 안될까?"
유한의 진지한 음색에, 한 순간 앨리스는 망설였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건 금방이었다.
이것도 연기다. 모두 연기...!
"...살 수 없어. 이제 예전 같은 삶은 살 수 없을테니까."
그래! 그리고 그건 전부 너 때문이야, 유한!!
앨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주저 없이 고열 광선을 발사한다.
하지만, 갑자기 생성된 마력 방벽은 어떻게든 고열 광선을 막아내고 말았다.
"뭣...!?"
발사된 고열 광선을 보고 피한다는 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미 고열 광선이 발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앨리스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유한은 앨리스를 향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의 무기인 카본-코팅된 검은 칼이 들려있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오른팔에 장착된 빔소드로 유한의 칼날을 막아낸다.
"어떻게...!"
"내가 누가 날 증오하는 지도 모를 것 같아?"
그리고 유한과 앨리스는 몇 번이고 칼날을 부딫히기 시작한다.
스스로 마력을 생성할 수 있게 된 앨리스는 이전과 같이 간단히 제압당하지 않고, 유한과 대등한 합을 친다.
"네년과 나는 정말 맞는 게 하나도 없지만, 딱 하나는 통하는 것 같군?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은 그 마음은 말이야!"
아무래도 유한 역시 앨리스와 똑같은 생각으로 산책을 나온 것 같았다.
쓸데없는 폭로로 상황이 곤란해지기 전에, 입막음 하려고 한 것일까?
한 동안 검과 마법의 공방이 이어졌다.
전투 AI는 확실히 최선의 수로 행동하게 만들지만, 결국 고점을 높이지는 못한다.
유한은 그 점을 착실히 공략해, 앨리스가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하게끔 유도한다.
행인들에겐 그 처절한 싸움이 좋은 구경거리였는지, 안전 거리에서 그 광경을 촬영하고 있다.
"제발, 좀, 죽어! 유한!!"
"죽는 건 너다!"
스치면 죽는 일격을 서로에게 몇 번씩이고 날려대다가, 마력이 어느 정도 소진된 둘은 잠시 거리를 벌리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 때, 우연찮게도 빌딩의 거대 스크린이 둘의 눈길을 끌었다.
아니, 눈길을 끌 수 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 스크린에 나와 있는 것은 둘 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니까.
긴급 기자회견이라고 나와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성유화였다.
"뭐냐, 저건...! 기만전술이냐!?"
드물게도 유한은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앨리스도 매한가지였다.
분명 자신은 여기 있을 텐데, 스크린의 저 '성유화'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조사 결과, 근래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원인은 태생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예기치 않은 상황과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이에 대해 정부는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둘이 각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그 '성유화'가 이어서 하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6개월 후, 현존하는 모든 태생체를 폐기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모든 죄를 폭로하고 자살하겠다는 성유화의 말이 진실이었을까요, 아니면 유한을 꾀어내기위한 연기였을까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