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마교가 세워지기 전 초기 무림에는 강해지기 위해 뭐든지 하는 자들이 많았다.
무인들은 그런 자들을 배척하기 위해 그들을 마두라 명명하고 무림공적으로 삼아 토벌하곤 했다.
불세출의 천마가 나타나 마교를 세워 마도의 길을 관리하기 전까지 말이다.
“혈교?”
군황은 흑기린의 명령으로 조사된 결과를 받아 들고 보고서의 맨 윗장을 읽었다.
혈교. 들어본 적이 없는 문파다.
흑기린의 보고로는 워낙 오래된 곳이라 자료가 별로 없다고 했다.
보고서 몇 장을 넘겨 본 군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혈교의 무공 중 희생자의 단전을 도려내 환단으로 만드는 비술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파계승 공허가 원래 소림의 속가제자임을 감안할 때 이야기의 아귀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그가 혈교의 숨겨진 후인이고 백팔나한의 단전을 취해 무공을 익히려 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굳이 왜 그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어서 지내던 혈교의 후예들이 하필 천년 소림에서 거사를 치렀다.
후계자를 무림공적으로 만들고 천라지망에 노출되게 하면서까지?
“말이 안 되는군.”
결국 파계승 본인을 찾아 얼굴을 확인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과거를 뒤져봐도 단서를 찾을 수 없고 그렇다고 정사마의 정보단체에 의뢰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에 그지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계승의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법륜에게 약속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군황은 보고서를 덮었다.
“잠깐. 파계승을 찾지 말고 혈교의 후계자를 찾으면 될 일이 아닌가?”
군황은 홀로 중얼거리다 벌떡 일어서 그 길로 군기를 찾아갔다.
녀석은 모란, 작약과 머리를 싸매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놈의 시선이 군황에게 닿았다.
“아니. 이. 게. 누. 구. 신. 가. 대. 단. 하. 신. 형. 님. 아. 니. 야.”
두 눈에 살짝 맺힌 눈물에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참 보기 안쓰럽다.
“문주님.”
“문주님을 뵙습니다.”
모란과 작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황을 맞았지만 그들도 밤을 지새운 건지 약간 힘이 없었다.
“총관. 왜 그러는가? 어째 날 보는 눈이 저 망할 자식 하는 눈 같은데?”
군황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걸 몰라서 물어? 과한 업무를 좀 줄여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석백산 꼭대기에 서원을 지으라고? 그것도 마교가 빌려준 돈으로? 그리고 이 천하제일무술대회는 또 뭐야? 제목만 적어서 당장 열어라하면 단가? 아니 대상이 백연과 일일 단풍놀이는 뭐야? 왜 하필 갠데? 이딴 상품에 누가 참가한대? 그리고 계획은? 예산은?”
“너 어째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네가 펼치는 사영검보다 빠른 거 아니냐?”
군황이 킥킥대며 웃자 군기가 바들바들 떨더니 혈압이 올랐는지 쌍코피를 흘렸다.
“저것도 형이라고. 으으으. 백합아. 네 상관 저놈의 형 때문에 죽는다. 아이고. 아이고.”
군기가 신음을 내며 작은 발걸음으로 차가 담긴 쟁반을 나르고 있는 백합에게 말했다.
군황의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키를 가진 백합은 쟁반이 자기 몸보다 커 두 손으로 그걸 받쳐 들고 힘겹게 손님으로 온 군황에게 다가왔다.
그러다 제 발에 발이 걸렸는지 휘청하며 넘어지려 했다.
“어어! 백합아!”
놀란 군기가 소리를 지르고 모란과 작약이 쓰러지는 백합을 잡으려 두 손을 펼치고 달려왔지만 군황은 그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누가 보면 쓰러지는 어린아이를 잡아주지도 않는 매정한 어른으로 보기 딱 좋았다.
하지만 군황의 눈은 쟁반으로 자신을 가리고 조막만 한 손에 딱 들어맞는 뼈 비수를 든 암살자를 정확히 봤다.
허리를 숙인 군황이 백합이 낸 일수를 가볍게 막았다.
“어?”
“어어?”
“어어어?”
군기와 모란, 작약이 군황의 검지와 엄지에 딱 잡혀 막힌 백합의 비수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죽으면 안 돼. 죽어. 나쁜 사람. 할머니도 죽였어.”
백합은 멍한 눈으로 군황과 군기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군황은 그런 백합의 비수를 빼앗아 버려버리고 이마를 살짝 밀었다.
백합이 힘없이 밀려나 뒤로 쓰러졌다.
“살막의 마지막 후인에게 형을 살해하라 명령하다니 군기야. 너 또 버릇 나오는구나.”
“뭐? 난 그런 적 없어!”
옛이야기를 꺼내는 형에게 군기가 펄쩍 뛰었다.
“살막이야기는 뭐야?”
당연하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렀다.
그러고 보니 군기에게 백합을 떠맡기면서 그 이야기를 안 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이 아이. 살막이라는 일인전승 암살자 문파의 마지막 후인이다. 살귀라고 알아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군기는 살막이 어쩌고 하는 형에게 기가 막혔다.
“그걸 지금 말해? 그런 애를 나한테 맡겼다고?”
“까먹었다. 아, 그리고 정사마 지부에 의뢰 좀 넣어다오 혈교의 후인을 찾아보라고.”
“혈교? 혈교는 또 뭐 하는 댄데?”
“흑기린은 무인의 단전을 파내서 환단으로 만들어 먹는 곳이라던데?”
“그런 델 왜 찾아?”
군기는 일부러 위험한 것을 찾으라는 군황의 말에 목소리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목덜미 잡고 쓰러질 것 같은 음량이다.
“오빠! 이거 뭐야?”
그런데 소식도 없이 새로운 방문자가 군기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을 세게 열고 들어온 방문자는 전단을 든 백연이다.
“이거 뭐냐고! 대상이 왜 나야? 미쳤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연이 전단을 들어 보이며 소리를 빽 질렀다.
군기의 눈이 군황을 봤다.
저쪽에 물으라는 행동에 연과 군황의 눈이 마주쳤다.
“큰오빠. 이거 큰 오빠 생각이야?”
“그래.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뭐?”
“내가 봐도 네 미모는 나쁘지 않아. 무림의 더 많은 사람이 네 미모를 알게 하면 네가 나중에 험난한 무림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대회가 열리면 대상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거라. 그래야 호사가들이 네 미모를 천하에 알려 천하제일미라고 불러줄 것 아니냐.”
군황은 최대한 연을 구슬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거 소교주랑 짠거지? 얼마 전부터 흑기린 이 자식이 자꾸 단풍놀이를 가자느니 어쩌고 했거든? 내가 헛소리 말라고 했단 말이야? 근데 갑자기 마교 애들이 서원 만들겠다고 돌 나르고 지랄발광하니까 상품으로 내가 나와?”
정확하군. 군황은 머리가 아파졌다.
살성 놈들은 평소에는 아무것도 신경 안 쓰다가 본인이 조금만 관련돼도 머리가 팽팽 돌아 갑자기 똑똑해지는 것 같다.
“진짜 너무해! 날 어떻게 보고! 내가 왜 상품이야! 나도 출전할 거야! 나도 출전해서 상품 타고 내가 최고란 걸 증명할 거라고!”
아, 상품이 된 게 열받는 게 아니라 출전을 못 하는 게 열받는 거였나.
군황은 연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교가 출자한 서원건설 비용이 없어진다.
군황은 할 수 없이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연아.”
군황이 연을 나긋이 불렀다.
흥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연이 군황을 바라보려 고개를 돌린 순간 군황의 손이 재빨리 연의 손을 펼치고 뭔가를 그 위에 건넸다.
그건 흑기린에게 회수한 태극패였다.
길길이 날뛰던 연이 순식간에 차분해지더니 바로 전에까지 보여준 자기 행동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라버니. 제 언행이 너무 과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래. 연이 네가 정 원한다면 출전할 수 있게 해주마. 근데 더운 여름날 연무장에서 땀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냉차를 마시며 너와 단풍놀이할 자를 뽑는 걸 구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연이는 큰 오라버니의 말씀을 따를게요. 그러고 보니 이 대회에 련주님의 손자도 참가할 거라고 하던데 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거든요.”
“련주? 사도련의 정심 늙은이 말이냐?”
“네. 사실 편지가 몇 장 왔는데 아직 읽지 않았거든요.”
“찢은 게 아니고?”
군황이 왠지 그랬을 것 같아 묻자 연은 안타까운 듯 아미를 찡그리곤 눈을 꼭 감았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그래도 쓰레기통에 파편이 남아 있을 테니 가서 맞춰보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럴래?”
군황은 가보겠다는 연을 막지 않았다.
태극패를 쥔 연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그 패에 귀신이라도 들린 거 아니야? 무슨 사람이 저렇게 휙휙 변해?”
군기가 가면이라도 쓴 듯 변한 연을 보고 기가 막혀 했다.
“어쨌거나 명 내린 일은 다 해내야 한다. 알겠지?”
군황은 뒷짐을 지고 일어나며 군기에게 말했다.
동생은 이이이하고 열 받아 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상관이 까라면 까야지. 그러니까 서원 만들고 무술대회 열고 혈교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찾고. 또 있어?”
군황의 눈이 백합에게 갔다.
군기가 또 한숨을 쉬었다.
“살막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온 후인도 돌보고.”
그제야 만족한 군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귀라는 엄청 무서운 별호를 달고 있는 앤데 자다가 내 목 달아날 걱정 해야 해?”
군기가 뭔가 작은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내먹고 있는 백합을 보며 물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아까 비수로 군황을 공격한 것만 봐도 백합에게 있어 군기는 아군 쪽에 속했다.
다만 백합을 돌봐준 귀살 마야를 군황 자신이 죽였다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정정하고 싶었다.
“마야는 널 여기서 살게 하려고 자결한 거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 그 점 명심하고 여기서 살 생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좋은 거다. 떠나 네 길을 찾겠다면 그것도 막지 않으마.”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하는 조언에 백합은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멍한 시선으로 방 한구석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는 방향이라 더욱 묘한 행동이었다.
“잰 뭘 먹는지 저렇게 먹고 나면 한참을 말도 안 하고 저렇게 있더라. 저게 뭐야?”
군기의 의문에 군황은 답해주지 않았다.
저건 살막의 살수가 감정을 지우기 위해 먹는 환약이다.
말이 좋아 환약이지 보통 사람이 먹으면 한시진만에 죽을 독이다.
“알 거 없다. 저 약을 계속 먹을지 말지는 이 아이의 판단이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군황의 싸늘한 반응에 군기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참. 형. 얼마 전에 온 식객 중에 형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거든?”
군기가 돌아가려는 군황을 불러 세웠다.
백검문의 식객에 들었다는 건 일단은 고수에 속하는 자라고 봐야 했다.
적어도 문을 지키고 마당을 쓸어내는 도박장의 무인들보다는 강하기 때문에 식객으로 받아들여진다.
“바쁘다고 해라.”
“나도 형님은 바쁜 사람이니 나한테 말하라고 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이게 신통하단 말이야.”
“신통해?”
“응. 얼마 전에 그자가 말하길 내가 바쁘게 일하는 동안 어머님께 불편한 점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얼른 가봤지. 근데 점심때 요리를 하시다가 그만 넘어지셨다고 하지 뭐야. 그 시간엔 그자와 내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호오. 그래? 그게 다냐?”
“아니, 그러면 그냥 우연인 줄 알고 넘어갔겠지. 근데 아버지가 잃어버린 게 있을 거라고 해서 급히 종을 보냈단 말이야? 출타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교지를 잃어버리셨다지 뭐야.”
교지란 왕이 내린 명령이 적힌 문서를 뜻했다.
그걸 잃은 성주는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다.
“흠. 그런데 그자가 그걸 찾아 주더냐?”
“어떻게 알았어?”
“알지. 알다마다. 원래 가진 게 많이 생기면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 놈들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그놈은 사기꾼이야.”
“사기꾼?”
군황은 놀라는 군기를 보고 씩 웃었다.
“어머니가 넘어진 건 부엌 바닥에 뭔가를 해 놓은 거고 교지는 직접 훔쳤겠지. 백검문에 기거하는 우리가 아닌 어머니, 아버지에게 손을 쓴 이유는 무인이 아니라 작업하기 쉽기 때문일 테고.”
“뭐? 정말로? 내 이 새끼를 그냥!”
화를 내는 군기를 앞에 두고 군황은 생각했다.
진한 사기꾼의 냄새가 난다.
그런데 보통 놈이 아니다.
백씨 일가의 부모가 아무리 무인이 아닌 자들이라지만 군황이 그들 옆에 붙여둔 백검문의 무인들은 군황이 직접 무공을 사사한 금강불괴공의 달인들이었다.
그들의 눈을 속이고 사기를 쳤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군황은 직접 그놈을 조져야겠다고 생각해 군기에게 명령해 놈을 마주했다.
“이거 반갑습니다. 백검문주님. 저는 손호라는 자로 강호에서는 미랑선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손님방에서 대기하다 군황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선 문사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군황은 제법 잘생긴 문사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도 아니다.
알 수가 없었다.
왜냐면 미랑선이라는 별호처럼 부채를 든 문사는 얼굴을 가리는 가면과 마찬가지인 인피면구를 썼기 때문이다.
“백검문주 백청기요. 이거 귀한 손님을 맞았습니다.”
군황은 상석으로 가기 위해 그를 지나치면서 뒤로 시선을 돌려 미랑선의 뒤통수를 보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진실을 보는 자신의 눈을 저렇게 완벽하게 속이는 인피면구를 만들 수 있는 자는 강호에 하나밖에 없다.
십이고수. 아니, 지금은 십이존자라 불릴 독심호 금연이다.
‘진짜는 아니라 하나 내 부모님을 건드려? 그날 녀석 편에 설 때도 그러더니 자살이 희망 사항인가 보군.’
“앉으시지요.”
멋도 모르고 호랑이 굴에 들어와 사기를 치려는 독심호에게 군황이 속내를 감추고 손을 내밀며 자리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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