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전쟁터에서 큭 죽여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군황은 정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책에서나 보았지 포로로 잡힌 인간이 정말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진에 홀로 돌진한 고리타분한 적을 살려줄지 말지 처음으로 고민했다.
“이건?”
입구에 깔린 안개를 헤치고 조금 나아갔을 때 군황을 맞이한 건 묵가가 만들어 놓은 구멍 뚫린 판이었다.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이곳에 들어오는 자 뱀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말만 어렵지. 한 마디로 사영검으로 저 구멍을 찌르라는 말이군.”
군황이 즉시 사영검을 펼쳐 구멍을 모두 찌르자 판이 땅 밑으로 꺼지더니 숨겨진 길이 나타났다.
지하 동굴로 이어진 길은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인 건 안개가 완전히 걷힌 아름다운 산천초목이다.
“어떻게?”
이제껏 안개로 가득했던 촉산은 어디 가고 이렇게나 맑은 하늘이라니.
그런데 옆에서 병장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 쪽으로 군황이 고개를 돌리자, 안개 낀 촉산이 보인다.
아예 목표를 엇갈리게 하는 방법을 썼는가.
과연 수성으로 이름난 묵가였다.
“안개 안에서 진법과 혈투를 벌이고 있겠군.”
군황은 촉산안으로 간 자신을 따라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진 자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안개 속에서 얼핏 보이는 깃발은 촉산 아래 결집한 대부분이다.
하나가 들어갔다고 안에 보물이라도 있을까 전진했나.
“어리석군.”
군황이 촉산안으로 들어간 건 왜곡왕이 사서 펼쳐 놓은 진법을 단신으로 돌파할 자신이 있어서였다.
저들처럼 충동적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제갈가의 지모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니 매한가지였나 생각하며 군황은 산길로로 난 소로를 걸었다.
소로의 끝 산 정상에 학모양으로 만든 지붕이 올려진 산장이 있었다.
“왔군.”
산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군황을 기다리던 자가 거부 두 개를 손에 말아쥐고 평상에서 내려오며 웃었다.
작달막하고 옆으로 남들보다 큰 남자는 몸은 단련이 너무 과해 네모난 근육덩어리처럼 보인다.
“왜곡왕 고독.”
군황이 그를 보며 웃었다.
“하늘이 뚫렸다는 금양자의 외침을 듣고 이 고독 얼마나 맘에 떨렸는지 모른다. 마제.”
“보자마자 인사는 고사하고 반말부터 하는 것이냐?”
“너는 한 번 죽었으니 나와 너의 군신 관계는 끊어졌다.”
“부하가 아니다라. 그게 나를 배신한 이유냐? 자유롭고 싶어서?”
“아니다.”
“아니라고?”
고독은 거짓말을 모르는 사내다.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배신을 한 것인지 군황은 궁금해졌다.
“그럼 왜 나를 배신하고 제자의 편에 섰지?”
“나는 전장에서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허약함으로 인해 살고 말았지.”
“내가 살려준 것이다. 그럼 망해가는 나라와 죽게 내버려뒀어야 한단 말이냐.”
“내버려두었다면 내 영혼에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삶이었다. 너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어 그날의 끝을 제대로 볼 것이야.”
군황은 왜곡왕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다시 붙고 싶어 나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
“그렇다.”
“내가 살아날 것을 믿고?”
“믿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지. 당신이 보증한 자는 내게 당신이 살아날 것이라 말했고 나는 그저 믿었을 뿐이다.”
“허. 이런 미련한 놈. 그냥 내가 마제였던 때 죽여 달라고 하지 그랬나.”
“그랬다면 너는 나를 죽이는 대신 쫓아냈겠지. 병신 같은 놈이라면서. 난 안다. 전장을 떠돌 때 정심은 네가 차가운 인간이라 말했지만 마제 네가 얼마나 정에 굶주린 인간인지.”
군황은 고독의 말에 말이 막혔다.
이래서 저자가 껄끄러웠다.
거짓말을 못 하니 상황에 따라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오로지 들소처럼 들이받아 대화하는 상대와 항상 싸우기 바쁜 인간이었다.
“그리고 마제의 몸이었다면 난 일초 지적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살아난 지금이 너와 싸울 적기다. 아무리 빠르게 무공을 익혔다 한들 너는 아직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 분명 내공이 부족할 것이다.”
“머리 좀 굴렸구나. 고독. 하지만 난 금양자와 독심호의 내공을 흡수했다.”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강하다.”
맞는 말이었다.
십이고수일 때도 왜곡왕 고독은 무투파 중에 무투파였다.
십이 존자라 불리는 지금은 얼마나 차이가 날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정직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지. 변한 게 없군. 그런 고독에게 마제로서 하나만 묻지. 그 녀석은 왜 날 배신했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가 모를 거라는 걸 알고 물었겠지. 너라는 인간. 마제라는 천하의 재수 없는 놈은 그런 이니까.”
마제가 자신의 말에 대꾸가 없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독이 씩 웃었다.
“어차피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나. 그분을 용서해야 하나. 아니면 죽여야 하나. 나 같은 옹졸한 자였다면 당장 죽이러 갔을 것이다. 그렇게 어딘가에서 왕 노릇을 하며 유유자적 괜찮은 척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독. 네가 이래서 싫다. 남이 싫어할 법한 말은 마음속에 그냥 담아두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고독은 웃는 얼굴 그대로 도끼를 쥔 채 포권을 했다.
“골백번도 더 들었을 겁니다. 마제. 그러나 어쩌겠는가. 낭인왕이여! 이것이 나인 것을. 이것이 이 고독인 것을! 이것이 나의 생인 것을!”
고독이 풀쩍 뛰어 올랐다.
두 개의 거부가 위에서 아래로 회전하며 날아온다.
군황이 몸을 움츠려 그 사이로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발목과 머리가 잘려 나갔을 것이다.
“시작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냐!”
군황은 검을 빼 들어 사영검을 날렸다.
뱀들이 날아다니는 도끼날에 마구 썰려 사라진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 마제! 우리 둘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춰 보자꾸나!”
“남정네와 춤을 추라고! 꿈도 크구나!”
군황의 대수인이 고독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고독은 헙하고 숨을 한 번 멈추더니 미친 듯한 기세로 도끼를 휘둘러 대수인을 잘게 썰어 버렸다.
대수인이 미끼가 된 사이 가까이 다가간 군황이 흑살마장을 사용했다.
“흑살마장? 어딜!”
도끼의 면이 되는 부분으로 흑살마장을 막아낸 고독이 회전하며 튕겨 나갔다.
흑살마장을 적중당하면 대결이 끝이라는 걸 고독은 잘 알고 있었다.
내공을 빨려 죽든 심장이 터져 죽든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흑살마장을 깨부수기 위해 마제 네가 죽었을 때부터 난 방법을 강구했다. 오늘 그 결실을 보겠다!”
고독이 허공섭물로 뭔가를 손으로 빨아들였다.
군황이 뭔가하고 보니 천 조각이다.
뭔가를 가리는 데 쓸 법한 것이었다.
“이것이 천하무쌍부법이다!”
고독이 휘황찬란한 이름을 붙인 무공은 단순히 도끼 두 개를 던지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도끼 두 개에 천하를 가를 기운이 넘실거렸다.
내공을 얼마나 실은 것인지 공간이 휘어 보였다.
“피하면 그만이다!”
군황은 발을 내딛어 몸을 틀어 회전해 도끼의 회전 방향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그런데 피했던 도끼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군황의 허리를 갈랐다.
상당량의 피가 터져 나와 군황은 상처를 억지로 봉하려 그 부위에 내공을 집약시켰다.
천만다행인 것은 저게 스치고도 허리가 잘려 나가지 않았다는 거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도끼 두 개의 파상공격은 고독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날아든다.
“이기어검인가?”
내공으로 무기를 가져오는 수법은 간단하지만 그걸 계속 날려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기엔 내공 소모가 무척이나 심하다.
거기다 날아다니는 도끼에 금강공을 무력화시킬 내공까지 곁들이다니.
“상당한 내공을 쌓았구나! 밥 먹고 내공 수련만 한 거냐!”
군황은 농을 던지며 아까 고독이 회수한 천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아무리 놈이 노력했어도 이것은 과했다.
이기어검의 경지는 그렇다 치고 이것을 이렇게 많은 합까지 쓸 수 있다는 건 삼천갑자 동방삭이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할 것이다.
“단순 방출도 아니고 유지라고? 그것도 금강공을 깰만한 내공을 담아서? 웃기지 마라! 고독! 정직한 줄 알았더니 사기를 쳐? 독심호와 어울리며 배운 것이냐!”
군황은 천이 날아온 방향에서 거울을 발견했다.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게 배치했지만 그건 분명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돌을 던져 그것을 하나 깨자 방금 뒤에서 날아오던 도끼가 갑자기 사라졌다.
“환술이로군!”
금강공에 허리가 갈라지지 않은 이유를 군황은 깨달았다.
환술 속에 들어와 있지도 않은 부법을 보고 있다.
군황은 바로 돌을 연속으로 주워 사방팔방에 있는 거울을 깨뜨렸다.
그러자 날아다니던 도끼가 점점 그 범위를 줄이더니 고독에게로 돌아가다가 결국 그의 두 손으로 돌아왔다.
“내 패배로군.”
환술이 사라지자 고독은 포기한 듯 도끼를 놓았다.
쿵 하고 두 개의 도끼가 땅에 박혀 들어갔다.
“도끼를 들어라. 마지막까지 싸워야 고독 너답지 않나.”
군황의 말에도 고독은 말이 없다.
죽음을 각오한 듯 보였다.
“실망이군. 겨우 이 정도인가.”
군황은 그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다가갔다.
흑살마장으로 내공을 흡수하고 죽일 작정이었는데 도끼가 스쳐 간 허리가 뜨끔했다.
보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환술로 이 정도의 상처를 내는 게 가능할까?
답은 불가능이다.
“이놈! 거울은 미끼였구나!”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군황이 긴급하게 뒤로 물러나자, 여덟 개나 되는 거부가 가로 세로 대각선 모든 방향으로 그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만약 저기 서 있었다면 고기 조각이 되어 즉사했을 것이다.
열 개 나 되는 거대한 도끼가 두 손을 든 키 작은 남자의 옆에서 빙글빙글 돈다.
왜곡왕 고독, 그 경지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덤벼라! 마제! 나는 이제 너보다 강하다고 자부한다!”
“그러시겠지! 너는 생전 나에게는 덤빌 용기가 없어 지금에서야 덤비는 놈이니 말이다!”
“이놈!”
독심호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쪽이 더 고독의 심기를 거슬린 모양이다.
이기어부의 수법으로 날아온 도끼들을 막아내기 위해 군황은 극성의 선녀검을 일단 펼쳤다.
보이지 않는 검막이 도끼들을 밀어냈지만 길게 가지 못했다
군황의 검이 밀리고 있다.
“죽어라!”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한 건지 날아드는 열 개의 도끼의 기세에 불이 붙었다.
군황은 사영검으로 도끼의 끝을 때려 다시 밀어내며 내공의 차이가 너무 난다고 생각했다.
내공이 부족하니 막아내긴 하는데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군황이 누구던가 내공 하나 없이 전쟁터에서 전쟁병기라 불리던 무림인을 상대했던 자다.
“아니?”
군황은 최소한의 내공을 사용해 날아드는 도끼들을 가까스로 쳐내며 앞으로 나갔다.
목표는 이 도끼들을 달고 고독의 바로 앞까지 가는 것이다.
“오지 마라! 오지 마!”
고독은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도끼들을 군황에게 날려 보냈다.
그럴수록 군황의 자세는 더 작게 더 세심하고 촘촘하게.
정말 피부에 날이 닿도록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는 도끼를 튕겨냈다.
보검의 날이 상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내공을 아끼고 아끼며 고독을 향해 걷는다.
“천하무쌍인지 개소린지보다 네 놈이 들소처럼 달려들 때가 더 무서웠다! 고독!”
결국 그는 고독의 이기어부를 이겨내고 흑살마장을 왼손으로 펼쳤다.
이기어부를 펼치느라 정신이 없던 고독은 눈앞에 흑살마장이 당도하고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황급히 공중에 있는 도끼를 회수하려 했지만 그 전에 흑살마장이 가슴을 격타했다.
고독의 방대한 내공이 순식간에 군황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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