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살막의 후예들이 먹는 검은 단약은 말이 약이지 사실상 독이다.
그것도 중독성이 강한 마약의 한 종류다.
마약은 본래 사람의 감정을 격하게 만드는 종류가 많은 법인데 그들의 단약은 그 반대로 작용한다.
그런데 약의 효능이야 둘째치고 저딴 걸 먹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마야의 모습을 보고 군황은 혀를 차며 미친 년이라 욕하기 일쑤였다.
“좀 괜찮아졌습니까?”
오늘 하루 빌린 객실로 들어온 청운이 물었다.
묵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백합이 아프다.
원인은 짐작이 갔다.
수적들과 싸우며 잃어버린 약 때문이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뱉는 어린 백합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게다가 눈물도 흘린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듯 굴던 차가운 아이는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할머니. 죽지 마.”
백합이 울면서 칭얼거리자 군기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땀과 눈물을 닦아 줬다.
“추워.”
벌써 몇 겹이나 되는 두꺼운 이불을 객잔 주인에게 얻어 덮었는데도 백합은 오한을 느꼈다.
“이 아이가 먹던 약. 무슨 약인지 아시나요? 약선을 찾아 길을 나서신 걸 보니 보통 약은 아닌데.”
청운에 질문에 묵기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마나 싶었다.
그러다 어차피 약선을 만나려면 청운을 따라가야 하고.
약선을 만나면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하니 먼저 좀 알린다고 뭐가 대수랴 싶었다.
“그게. 나도 잘 모르오. 근데 우리 형이 말하길 이 아이가 살막이라는 단체의 후인이라고 하더군.”
“살막? 지금 살막이라 하셨습니까?”
청운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놀란 얼굴의 청운을 보며 묵기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몰라 말을 멈춰야 했다.
“험험. 아닙니다. 살막이라는 단체를 들은 게 처음이 아니라서 그만. 계속하시지요.”
헛기침을 해 놀란 표정을 환기하며 청운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뭐 살막의 후인은 살수이니 감정을 지우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이 보다시피 고약한 약이오.”
백합의 작은 몸 안에 도사린 검은 약의 기운은 살아 있는 듯 움직였다.
그것을 몰아내고 싶어도 몰아낼 수 없어 약선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약선을 찾아 해독시키려는 거군요.”
“약선을 찾기 전까지만 약을 먹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단약을 할 줄은.”
묵기는 작은 몸으로 약의 기운과 싸우고 있는 백합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사지를 묶은 큰 형이 매타작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직도 중독자일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참 대단하군. 자기 자신을 중독시킨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있어.”
이제는 백검문도인 삼촌들이 원래는 도박장의 패거리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묵기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과 엇나가지 않은 건 모두 큰형인 백청기 덕분이었다.
과거는 버리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큰형의 가르침이다.
“그때 큰 형처럼 해봐?”
“큰형이란 분이 어떻게 하셨는데요?”
“나 때는 내 사지를 결박해 삼일이고 사 일이고 약기운이 빠질 때까지 후드려 팼소.”
“그건 지양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묵기의 말에 청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아이를 묶어 사일 씩 패는 건 어디서 나온 치료법인지.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 형이 참 무식한 방법으로 나를 치료했군.”
“그 큰형이라는 분을 많이 의지하셨나 봅니다.”
“티가 나나?”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묵기의 얼굴을 빤히 보던 청운은 옅게 뜬 미소를 소매로 살짝 가렸다.
그러더니 백합에게 시선을 가져간다.
긴 속눈썹이 살짝 내려와 감겨 눈 아래 검은 그늘을 만들었다.
“이 아이. 살막의 후인이라면 혹 마야라는 노인이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마야?”
“모르십니까?”
“내가 이 아이를 처음 본 건 둘째 형의 방에서요.”
“둘째 형?”
“백군기라고 우리 집안에 총관을 맡고 있는데 모란과 작약이라는 끝내주는 비서를...”
두 여인을 떠올리며 잡생각을 하던 묵기는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매끈한 도자기 같은 두 여인의 환상이 이내 사라졌다.
“뭐, 백합은 원래 그 형의 비서로 큰형이 붙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게 왔소. 비천당이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면서 내게 당원이라며 붙여줬지. 사실상 혹 두 개였지만.”
긴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마야라는 사람을 묵기가 모른다는 거였다.
청운은 그걸 알면서도 묵기가 떠드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내리깐 투명한 눈이 가끔 빛났다.
“큰형이라는 분. 굉장히 좋은 분 같네요.”
“청기형 말이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형을 모르는 청운이 이상한 거요.”
“제가요?”
“당금 무림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 우리 형이오. 성격이 차갑긴 한데 그건 다 위장이지.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챙기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라오.”
“그렇습니까. 제가 무림에 관심이 많이 없어서.”
“얼마 전에 하늘이 뚫렸다고 전 중원에 외친 괴물이 있지 않았소. 뭐 별호가 십이존자 뭐라고 했는데.”
“아. 그거라면 저도 압니다. 십이존자 금양자.”
청운은 금양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였다.
기다렸다는 듯 묵기에게 다가가 붙는다.
다가온 청운의 몸에서 나는 향기로운 향 때문에 묵기는 놀라 훕하고 숨을 참았다.
갑자기 숨을 못 쉬게 된 탓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계속 이야기하시죠. 궁금합니다. 하늘이 뚫렸다고 외친 거인도 공자님의 큰형님이 물리치셨습니까?”
청운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렸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청운의 눈빛을 버티지 못한 묵기는 달아오른 얼굴을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렸다.
“푸하! 좀 떨어지시오. 무슨 놈의 체향이 이리.”
자라처럼 목을 길게 빼고 숨을 쉰 묵기가 체향을 운운했다.
그 말에 청운이 자신의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제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납니까? 깨끗이 씻고 왔는데.”
“아무튼 떨어지지 않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내 가족 이야기를 할 때요? 백합이 이리 아픈데.”
“공자님. 제가 말씀드린 적 있지요. 제게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고.”
왜 모르겠는가.
그것 때문에 장강에서 살려달라 그 못난 연기까지 했는데.
“저는 어릴 때 그분에게 거두어졌는데 그때는 무척이나 허약했지요.”
강물 위를 뛰어다니며 수적을 몰살하는 고수가 허약했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대의 무공이 하늘을 찌르는 데 허약했단 말이오?”
“그때의 저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돌멩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보석이 아니고?”
“예?”
보석 아니냐고 훅 들어오는 묵기의 말에 청운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했다.
묵기는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고 헛소리를 한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커흠. 아니, 아니오. 실언했소. 갑자기 보석으로 들리지 뭐요.”
“후후. 이상한 분. 아무튼 약한 제 몸을 걱정했던 그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영약을 구해 제게 먹이셨습니다.”
청운은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소매가 중력을 따라 내려가자 백옥같은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래서 제 피는 어지간한 영약보다 뛰어나답니다.”
묵기가 말릴 새도 없이 단검이 청운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하얀 피부에 대조되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운형. 어쩌자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시오.”
상처를 낸 본인보다 묵기가 더 안타까워했다.
청운은 묵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흐르는 피를 백합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백합의 입안에서 검은 액체가 팔을 뻗듯 나오더니 게걸스럽게 청운의 피를 가져갔다.
피를 먹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던 백합의 호흡이 안정되고 식은땀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안정된 백합이 색색 귀여운 숨소리를 내고 잠들고서야 묵기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약선에게 가는 동안 이 아이의 상태는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공자께선 어서. 금양자를 누가 물리쳤는지 알려주십시오. 말씀하신 큰 형님입니까?”
상처에 깨끗한 천을 대며 청운이 눈을 부릅떴다.
달빛이 비치는 눈에 광기가 감돌았다.
“왜 그리 답을 들으려 애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대외적으로 소림이 물리쳤다고 하지만 우리 집안에선 누구도 믿지 않았지.”
“왜죠? 왜 공자님의 큰 형이 금양자를 물리쳤다고 생각하시나요?”
청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묵기는 왠지 답을 해주기가 싫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부탁드려요. 제발. 말씀해 주세요.”
애원하며 가까워지던 청운의 상체가 너무 기울어져 결국 무너졌다.
“이런.”
묵기는 자기도 모르게 쓰러지는 청운을 품에 안았다.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피어올라 와 묵기의 맘을 어지럽혔다.
“표정이오. 표정.”
“표정?”
결국 묵기는 자신이 생각한 이유를 발설했다.
“큰형은 모르는 것 같지만 일이 잘 풀렸을 때 항상 하는 표정이 있소. 그 뭐랄까. 위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자신감이 넘치는 그런 표정이 있소. 그 표정을 지으면 우리 가족은 항상 생각하지. 아 또 뭔가하고 왔다고.”
“표정. 그렇겠지요. 항상 그러셨으니.”
청운이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학사에게 기쁜지 묵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공자님. 제가 약조드리겠습니다. 제 집에 도착하는 즉시 약선에게 부탁해 아 아이를 해독해 드리겠으니 당신의 큰형님을 만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큰형을? 석백성 뒤에 있는 지역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곳은 이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청운의 간절한 부탁에 묵기는 잠시 생각했다.
백합을 구하고 금의환향하는 김에 청운을 데리고 가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좋소. 약속하리다.”
“감사합니다!”
아까 쓰러져 품에 기대어 있던 청운이 얼마나 기쁜지 이번엔 묵기를 꼭 끌어안았다.
이에 당황한 묵기가 두 팔을 어색하게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
무량검이라는 큰 손님을 맞은 백검문은 분주해졌다.
군황은 아낌없이 자금을 풀어 소와 돼지를 잡고 기악을 연주하는 악사들과 무희들을 불러 큰 잔치를 열었다.
무량검은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같이 온 매화검수들이 즐거워하기도 했고 잔치의 주인공 취급을 해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 무량검. 석백성에 자리 잡은 새로운 문파의 위명을 못 듣지 않았지만.”
무량검은 가장 상석에서 술잔 하나를 들고 내려와 백검문에서 마련한 거대한 술도자기에 잔을 넣었다.
“설마 정사마 상관없이 모든 강호 동도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수많은 사람이 모일 정도로 큰 잔치가 열린 곳은 학당 공사가 한 창인 산의 꼭대기 분지였다.
무량검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끝없이 이어진 걸 보며 출렁거리며 술이 넘치는 잔을 높게 들었다.
“어찌 보면 이리 모인 것은 하늘의 뜻이요. 여기 문주가 연 파티는 지상에 둘도 없을 풍류이니 오늘 한 번 코가 삐뚤어지게 즐겨 봅시다!”
크게 소리친 무량검이 술잔의 술을 단숨에 마셨다.
함성이 터지고 기악이 크게 울려 잔치의 시작을 알리자 주춧돌만 올라간 공사장이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내 문주를 얕봤는데 정말 대단하군. 어찌 서로 다른 성향의 자들을 규합했지?”
정과 마가 토론을 하고 사와 정이 어깨동무해 술에 취하는 것을 본 무량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운이 좋았지요.”
군황이 무량검의 옆에서 쉽게 대답했다.
“이건 운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럼, 제힘과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까요?”
“이런 젠장. 네놈이 뱀처럼 능글 대는 걸 보니 누가 생각나서 배알이 뒤집히는군.”
누굴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 군황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겉이 달라져도 사람의 성질은 변하지 않아 다들 아는가 싶었다.
“내 제자의 행방을 물었건만 며칠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벌이는 게 잔치라니.”
“선배님의 제자가 어디 있는지 제가 말해드리면 여기 머무르시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제자 하나에게 매여 있기엔 무량검의 실력이 아까워서 그러지요.”
실력이 아깝다는 말에 무량검이 군황을 빤히 봤다.
“내 실력이 아깝다고?”
“제자가 무량검을 이해했습니까?”
군황의 말에 무량검이 입을 다물고 신음했다.
안타까움에 젖은 노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못했군요.”
“무리란 원래 그런 것이다. 내가 깨달았다고 남에게 강요할 수 없지. 명진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무재지만 틀을 깨기에 너무 우직해.”
“화산검은 일단 멀리 밀어두고. 여기 이 넓은 공간을 좀 보시죠.”
군황이 수백 명이 먹고 마시는 공간을 가리켰다.
“여기에 정사마 어디에도 상관없이 스승을 하고 싶은 이는 스승을 하고 배우고 싶은 이는 제자를 하는 학관을 만들 겁니다.”
“그래서?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냐? 너 잘났다고?”
“수백 명에게 무량검을 알려주다 보면 저처럼 잘난 놈 하나가 익히지 않겠습니까?”
“허. 미친놈. 나더러 화산에서 파문을 당하란 소리구나.”
무량검은 군황을 미쳤다고 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수백의 머리를 봤다.
자신의 업적을 이어갈 후계를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세상 모든 무인의 본능이다.
당장 군황자신도 제자에게 배를 찔려 죽어가면서도 그 아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던가.
“미친 게야. 미쳤어.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는 발전도 없지.”
무량검의 혼잣말에서 군황은 가능성을 봤다.
Comment ' 0